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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8)희우정 망원정 ... 흥선대원군이 개망신당한 조선시대 한강변 첫 정자

Buddhastudy 2022. 8. 4. 19:29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발포

국내에서 비밀리에 선교하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을 처형하고

가톨릭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다.

병인박해다.

 

살아남은 프랑스인 신부 가운데 리델 선교사가

중국으로 탈출해 중국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로즈 사령관이 지휘하는 프랑스함대가 조선을 침공했다.

 

로즈 제독의 프랑스 군함 3척이

9.18~10.1. 한강하류 양화진(현재 양화대교 인근)까지 올라와 정찰 활동을 벌인 후

한강 하구를 봉쇄한 채

1016일 강화도를 공격해 점령했다.

 

프랑스함대는 1110일 철군할 때까지

쇄국정책을 펴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양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병인양요 종료 후 조선은

가톨릭신자들을 매국노들로 규정하고

양화진 잠두봉에서 1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참수했다.

 

누에고치의 머리처럼 생긴 한강변의 아름다운 잠두봉은

그 후부터 절두산 切頭山 이란 비극적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병인양요에 놀란 흥선대원군은

부국강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철갑선과 대포, 소총 등의 성능에 맞서는 신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하루 아침에 신무기가 탄생할 수 없는 노릇,

백성들에게 신무기 개발의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했다.

전국의 차력사, 마술사들을 모아 신출귀몰한 부대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비롯해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다.

 

흥선대원군이 채택한 것은

학우선(鶴羽船:학의 깃털로 만든 배)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학을 잡아 날개의 깃털을 뽑아

그 깃털을 아교로 붙여 배를 만들자는 기상천외한 발명 아이디어였다.

 

깃털처럼 가벼우니 속도도 빠를 것이고

총에 맞아도 구멍만 뽕 뚫리니

그걸 또 메우면 수리도 쉽다는 어느 구라쟁이의 의견에

흥선대원군이 맞장구를 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포수와 사냥꾼들에게

학을 사냥해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반도에서 평화로이 살던 수만 마리의 학들이 사냥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양으로 공수된 학의 깃털을 모아

기술자들이 그럴듯한 배 모양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학우선鶴羽船의 진수식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적에 맞서면 될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인류가 학의 깃털을 재료로 만든 최초의 배의 이름을

비선飛船이라 이름 짓고

조선수군들이 훈련하는 장소인 망원정 앞 한강에서 진수식을 거행했다.

흥선대원군과 만조백관이 망원정에 가보니

한강에 눈부시게 하얀 비선이 떠 있었다.

 

이제 비선이 춤출, 아니 한강을 가로지르는 멋진 모습만 연출되면

신기술 자주국방의 신기원이 열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학의 깃털이 방수 기능이 있을 리 만무한 일,

물에 뜨자마자 비선은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한강에 가라앉고 말았다.

 

기상천외한 학우선의 장관을 보기 위해 모여든 조선의 백성들은

모두 흥선대원군의 헛짓에 혀를 차고 손가락질을 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의 패전에 이어 학우선의 코미디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게 됐다.

 

지금 양화대교 북단에서 한강하구 쪽으로 조금만 가면

망원정望遠亭이 있다.

충녕대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이곳 일대에 별장을 짓고 정자를 지으며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설움을 달래는 곳이었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니, 망원정은

조선왕조 최초의 한강변 정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종7(1425) 음력 513일에

세종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한양 서북쪽을 시찰하다가

형인 효령이 기거하는 한강변 별장에 들러 정자에 올랐는데,

마침 큰 비가 좍좍 내려 잠깐 사이에 들판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이에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세종실록에 망원정에 관련한 첫 기록이 등장한다.

 

세종 이후 희우정 일대의 한강은

조선수군의 훈련기지로 활용됐다.

세종16년 음력 318일의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새로운 수군전함 진수식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는 지금의 오키나와, 옛 이름 유구국도 등장한다.

유구국에서 온 사람이 만든 배와

조선수군의 전함을 나란히 한강에 띄우고 비교하는 장면이다.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새로 제조한 전함(戰艦)을 관람하니,

왕세자가 거가를 호종하였다.

처음에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우리나라에 오매

그에게 명해 전함을 제조하게 하고는

이를 서강에 띄우고

우리나라의 전함과 나란히 달려서 그 쾌둔(快鈍)의 정도를 비교한바

유구국 사람이 제작한 배가 약간 빨랐으나

심한 차이가 없었다” (세종16318)

 

희우정은 효령대군의 후손들이 소유했으나

60여년 뒤 성종 시대에 이르러

세조의 장손자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며

이름이 망원정望遠亭(멀리 내다보는 정자)으로 바뀌었다.

 

희우정의 주인인 효령대군의 동생이 세종임금인 것처럼

망원정의 주인 월산대군의 동생이 잘산대군 성종이라는 인연이 있다.

 

양녕대군이 태종의 눈 밖에 나

왕위계승자에서 밀려났을 때 둘째 효령대군에게 기회가 있었으나

셋째 충녕대군이 기회를 잡았다.

효령대군은 왕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희우정에서 달랬다.

 

망원정의 주인인 월산대군도 왕위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세조의 장남인 도원대군의 첫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원대군은 20살에 요절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에 세조의 차남이 예종에 올랐으나 2년 만에 요절하자

왕위 승계권은 예종의 4살 아들인 제안대군보다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당대의 세도가 한명회가

월산대군의 아우 잘산대군을 왕위로 밀어 올린다.

잘산대군은 한명회의 사위!

왕위승계 1순위에서 눈칫밥 왕자 신세가 된 월산은

망원정에서 한을 달래다 3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나

왕의 형으로 조용하게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왕자들이 거닐던 정자가

희우정, 망원정이다.

 

을축대홍수(1925)와 한강개발로 원래 정자는 사라졌다가 1989년 복원됐다.

복원된 정자의 바깥에는 망원정

안쪽에는 희우정이라는 현판을 달아놓았다.

 

# 한강걷기 코스 : 합정역 망원정 절두산

합정역에서 인근의 망원정을 찾아 둘러본다.

망원정에서 한강둔치로 내려가 동쪽으로 향해 걷다가

양화대교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고개를 들어보면

누에고치처럼 생긴 작은 봉우리를 만난다.

 

옛 잠두봉

현재는 절두산

가톨릭 순교성지를 둘러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