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압구정 강남부자들은
한명회의 노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인 한명회(1415~1487)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두 왕의 장인이라는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딸들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큰딸은 예종의 세자빈으로서
인성대군을 낳은 직후인 16세에 요절했다(예종 즉위 후 장순왕후로 추존).
막내딸은 잘산대군에 시집갔다가 예종이 1년 만에 승하하자
예종의 사촌동생인 잘산대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왕후가 되는 행운을 누렸으나 자식을 낳지 못한 채 17세로 요절했다.
공혜왕후 시호를 받았다.
잘산대군 성종이
친형인 월산대군과 사촌동생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최고의 권신한명회의 사위라는 것이 작용했다는 설이 정설일 정도로
한명회의 권세는 당대 최고였다.
하지만 세조 사후 한명회의 말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두 딸을 허무하게 잃으며
외척으로서 권력을 향유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한씨 가문을 조선 제일 명문가로 이어가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전 재산 국가 헌납’이라는 승부수를 띄우기까지 했다.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한명회는
성종 7년(1476년) 한강변에 정자를 하나 짓고
자연과 벗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호인 압구狎鷗를 딴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한강변에 지었다.
압구정은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란 뜻이다.
성종은 고인이 된 왕비의 아버지이자
최고의 권신 한명회를 예우하여
압구정을 지은 뜻을 예찬하는 시를 지어 내렸다.
당대의 사대부들도 앞다퉈 예찬시를 지어 바쳤다.
압구정 예찬시만 수백편에 이르렀다고 하니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은 뜻이
단지 정계은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말년의 권력을 다지고
자신이 죽은 후 한씨 가문의 번영을 노린 ‘신의 한 수’였음을 알 수 있다.
말년까지 내려놓지 못한 한명회의 권력욕은
1481년 ‘압구정 명나라 사신 접대’ 사건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드러났다.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의 명성을 알고 방문하고자 했는데
정자가 좁아 잔치를 열 수 없으니
왕이 사용하는 차일을 보내달라고 성종에게 청했다.
이에 성종은 대노하여 옛 장인을 꾸짖었고
그 일을 계기로 한명회는 일체의 공직에서 사실상 쫓겨나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벼슬을 떠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은 압구정이
그를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나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압구정의 최초 위치가 여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20년 5월에 발간한 보고서
'여의도, 방송과 금융의 중심지'에서
압구정의 첫 소재지는 여의도라고 밝히고 있으니
흥미롭다.
한명회는 죽기 전 성종에게 보낸 유언에서
“처음에 부지런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게을러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나중을 삼가기를 항상 처음처럼 하십시오”라고 했으니
마지막에는 자신의 노욕을 반성했음을 왕에게 알리고
한씨 가문의 미래를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본 한명회의 업보였을까.
한명회는 사후에 부관참시 되는 불운을 맞는다.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부서진 채로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압구정의 위치는 현재의 동호대교 남단 부근이다.
압구정에 올라서면 한강의 가장 넓은 곳인 ‘동호’와
삼각산 도봉산 인왕산 남산 아차산 등
한양의 모든 명산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명회가 압구정을 세운 이후 조선의 권문세가들은
이곳 일대에 수많은 정자들을 세워 자신의 권세를 뽐냈다고 한다.
압구정은 한명회가 부관참시를 당한 후
여러 주인을 거쳐 조선 말 박영효(1861~1939)의 소유였다가
그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몰리면서 파괴됐다.
현재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지석(址石)만 남아있다.
지금 압구정동에서 살고 있는 ‘강남부자’들은
한명회의 노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한강걷기 코스 : 압구정역 – 동호대교 – 달맞이봉
압구정역에서 내려 동호대교를 걸어가며
압구정 아파트 단지와 한강의 동서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동호대교 북단에서 옥수역 부근 100m 높이 달맞이봉에 오르면
한강과 한강 중랑천 건너편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