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용산창의 왜군 사령부를 포격하다
1592. 4. 13(이하 음력)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4. 14. 오전 왜군은 부산진 함락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
선조가 도망친 한양을 개전 20일 만인 5.3. 점령했다.
왜군은 용산을 조선 침략전쟁의 사령부로 삼았다.
용산에는 조선왕조의 경제적 토대인 세곡을
전국에서 거둬들인 용산창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과 의병들의 분전, 명군의 참전 등으로
평양성까지 북진했던 왜군이 쫓겨
1593년 초 한양으로 주력군이 밀려 내려왔다.
1593년 2월 용산창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2만 명이 넘었다.
1593년 초 조선군은 한양수복 작전을 개시했다.
한양성 주변 10여 곳에 전국에서 모인 조선군들이 모였다.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이 지휘하는 호남 병력이 선봉에 섰다.
1593년 2월 초 권율이 지휘하는 1만여 병력이
행주산성에 올라
한양성의 왜군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
행주대첩의 시작이다.
평양성 전투 패배 후 연전연패하다가
1월 초 벽제관에서 명군을 대파한 후
다시 기세를 올린 왜군은
한양의 입구인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2.12. 아침 6시 3만 명의 왜군이 총공격을 펼쳤다.
왜군은 한강변 행주산성의 남쪽을 제외한 삼면으로
늦은 오후까지 7차례에 걸쳐 파상공세를 펼쳤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자 여인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전투를 도왔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병력과 전투물자가 부족한 조선군은
시간이 갈수록 세불리로 몰리며 사투를 펼쳤다.
이때 조선 수군이 한강변에 출현,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꿔놨다.
충청 수군절도사 정걸이 이끄는 함선 두 척과
전라도의 조운선 40척이
행주산성 남쪽 한강변에 나타났다.
조선 수군은 배에 실은 수만 개의 화살을
행주산성으로 수송하기 위해 한강변에 배를 붙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조선 함대에 당황한 왜군은
공격을 멈추고 군사를 물렸다.
왜군은 조선군의 증원 병력이 참전할 경우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후퇴를 결정했다.
조선수군의 등장으로 일거에 전세가 역전되고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육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선조실록 최초 기록에는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지원했다고 나왔으나
수정선조실록에는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을 지원했다고 나온다.
선조실록 최초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권율은 여기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후퇴한 왜군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 승산이 낮다고 본 것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서의 철군’이라는 ‘매우 현명한 결단’을 내린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행주대첩은
단 하루 만의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그 승리는 조선수군의 참전과 조선 육군의 신속한 철군에 의해 담보됐다.
만약 명분에만 사로잡혀 행주산성에서 계속 전투를 했다면
첫날의 승리는 사라지고
결국 권율과 1만 조선군은 모두 몰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군의 재침 기미를 염탐한 권율은
행주대첩 직후 파주로 철군했고
행주산성을 정탐하러 온 왜군의 척후는
텅텅 빈 행주산성을 보며 허탈해했다.
한강에 나타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2년 차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2월12일 행주대첩에 등장한 충청 수군이
2월15일 한강에 나타났다.
1593.2.25. 선조실록 기사를 보자.
“2월15일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용산창(龍山倉) 아래에 다달아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는데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의 거의 2만 명이나 되었다.”
2월12일 행주대첩에 이어
2월15일 용산창에 대한 조선 수군의 포격은
왜군의 기세를 크게 꺾은 혁혁한 전과였다.
조선수군이 보유한 화포,
사거리 1km에 달하는 지자총통의 위력은
용산창에 주둔해있던 왜군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사거리 100m에 불과한 왜군의 조총은
한강 위의 조선함선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왜 수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막혀
한강은커녕 서해로도 진출하지 못했으니
한강의 제해권을 조선수군이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충청수사 정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전우였다.
정걸 장군은 151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154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일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이순신 장군이 1545년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했으니
정걸 장군이 30년 무관 선배였던 셈이다.
그러나 임란이 일어난 1592년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였고, 정걸은 그 휘하의 조방장이었다.
이순신은 고향 바다를 수십년 간 지키던
30년 선배 정걸의 지혜와 경험을 흡수하여
연전연승하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순신과 정걸은 옥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
임란 초기 조선수군의 연전연승을 이뤄냈다.
그 공로로 정걸은 충청수사로 진급했으며
1593년 2월 행주대첩과 용산첩 포격전의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1593년 9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80세의 노장군 정걸은
한산도에서 함대를 지휘하며 왜적들을 방어했으며
12월 전라도 방어사로 부임해 고향인 전라도 방어를 총책임졌다.
82세인 1595년에야 관직에서 물러난 후
84세인 1597년 사망했다.
한강의 역사에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패전 역사도 있지만
임진왜란 행주대첩과 용산창 포격과 같은
빛나는 승리의 역사도 있음을 기억하자.
임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다가 쫓겨났던 곳 용산
1904년 일본군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다시 차지한 용산
미군 기지를 거쳐
116년 만에 용산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2022. 5. 용산에 갑자기…
# 한강걷기 코스 : 이촌역– 거북선나루터 – 노들섬
이촌역에서 한강 둔치로 진입한 후
이촌 한강 둔치에 설치된 거북선나루터로 향한다.
거북선이 한강에 출현한 적은 없지만
1593년 조선수군이 용산 앞 한강에 출정
왜군 총사령부에 포격을 퍼붓던 역사를 회고해 보자.
거북선나루터에서 노들섬으로 가서
섬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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