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11장 法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Buddhastudy 2022. 11. 10. 20:13

 

 

 

有法有拂分

-법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다시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라고 한다면 그 수가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심히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모래의 수만큼 있는 항하도 무수히 많을진대

하물며 그 속의 모래야 말해 무엇하겠나이까

 

수보리야, 내가 오늘 너에게 진심으로 이르나니

만일 어떤 수행자가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수행자가 이 경에서 사구게라도 간직하여 남에게 일러준다면

이런 법시의 복덕이 칠보로써 하는 재시의 복덕보다 크니라.

 

또 수보리야,

이 경에서 사구게만 이해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온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마치 여래의 진신사리를 떠받들 듯 공경할 것이니라.

그럴진대 훗날 어떤 사람이 있어서

능히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어떻겠는가.

 

수보리야,

이 사람은 훗날 무상의 불법을 통하게 될 것이나니

만약 이 경전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펴는 곳이 있다면

바로 부처님이나 그의 출중한 제자들이 있는 곳임을 알지라.”

 

 

-해의-

불교의 주된 관심사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이다.

 

전자를 취해 영생을 얻고

후자를 통해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그렇기에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들

그것이 크게 느껴질 리가 없다.

 

불교는 오로지 깨달음에 관계된 것이어야만 그것의 가치를 높이 친다.

그 어떤 물질을 가지고는 불법에 추호도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재시는 그것의 규모에 관계없이 법시에 비해 부족하다.

 

사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열반을 물질로써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재시란 법시를 펴는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방편의 일종일 따름이다.

 

이만큼 불법에 대한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참된 법이 강조되고

유법유불과 같이 말이 나오게 된다.

 

이는 불교의 법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법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는 말은

법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부처의 법맥이 흐른다는 뜻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현실에서 이것이 성립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사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유법유불이 지켜지지 않아

법맥과 종통에 관한 다툼이 수없이 발생해 오지 않았던가.

조사의 가사나 발우, 사리, 유언.. 등으로

법통을 내세우는 사례를 차치하고라도

대승과 소승의 큰 갈래만 봐도 그렇다.

 

금강경의 관점에서 보면

대승과 소승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을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을 세존에게 했다면

크게 꾸중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 이런 질문 자체가 커다란 분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은 대승이냐 소승이냐

그 외에 어떤 종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체 분별의 족쇄를 끊고 해탈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방편에 마음을 두는 것은

들숨과 날숨을 견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