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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르주나, 대승불교의 아버지 - 용수 / 공사상 / 연기 / 중도

Buddhastudy 2023. 3. 28. 19:44

 

 

 

붓다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가르침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결집을 통해 붓다의 뜻을 이어갔죠

 

하지만 100년 후

두 번째 모였을 때 교단의 분열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약 400년 동안 부파불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물줄기가 갈라지듯 수많은 부파들이 생겨났죠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정리했습니다

불교 이론이 갖춰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죠

 

하지만 너무 이론에만 치중했던 것일까요?

어려워진 불교는 대중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불자들은 점점 더 교법에만 집착하게 되었죠

 

서기 2세기 누군가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불교 이론들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이들이

과연 진정한 붓다의 본질에 맞는지 의심했습니다

스스로를 가르침에 가두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는 공사상으로 진정한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수행 끝에 마음을 비워냈다면

비워낸다는 생각조차 비워내라고 하죠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도 불린 그는 나가르주나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인도 승려입니다

서기 150년경부터 250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나가르 주나의 이름은 용을 뜻하는 나가와 인도 영웅인 아르주나의 합성어입니다

나가는 인도에서 용돈은 뱀으로 묘사되는 신화적 존재입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용을 통해 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자어로 번역해 용수라고 합니다

편의상 여기서는 용수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용수는 기록도 제각각이고 신화적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로 그려져 왔는지 간략하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용수는 남인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을 타고났습니다

어떤 게송을 들어도 바로 외울 정도였다고 하지요

성장하면서 다양한 학문에 통달했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 용수는

이제 즐거운 일을 찾고 싶었습니다

욕망을 충족시켜 쾌락을 맛보고 싶었죠

그는 친구들 3명과 함께 연금술사를 찾아가 은신약을 구합니다

그들은 은신약을 먹고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궁전으로 몰래 들어가 수많은 궁녀들을 범했습니다

100일 정도가 지나자 궁녀들이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왕은 대체 무슨 일인지 고민했고 지혜로웠던 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누군가 도술로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바닥에 모래를 뿌려 그들을 잡아내십시오

 

왕은 신하들을 시켜 바닥에 모래를 뿌리고 병사들을 대기시켰습니다

용수와 일행들은 그것도 모르고 다시 궁전에 들어왔습니다

뿌려둔 모래에 발자국이 남게 되었고 병사들은 주변으로 칼을 휘둘렀습니다

친구 3명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죠

하지만 용수는 기지를 발휘하여 왕 옆자리에 몰래 숨었습니다

병사들이 왕에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으니까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용수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뿌리에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는 궁전에서 탈출한 즉시 출가의 수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용수는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 달 만에 거의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고 합니다

나중엔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 한 늙은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에게 대승불교 경전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경전을 찾고자 했지요

공부의 통달한 용수는 논객이나 수행자들을 만나 그들을 쉽게 논파했습니다

 

--깨달음

용수는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보단

자신이 직접 교단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새로운 옷과 규범을 정해 제자들을 받아들였죠

 

어느 날 용수는 혼자 방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대룡보살이 찾아왔습니다

자만한 용수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또 다른 세계로 용수를 데리고 갑니다

그곳은 깊은 바닷속 용궁이었죠

용궁에 도착한 용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있던 보물창고에는 경전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내용도 심오했습니다

용수는 70일 동안 그것들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비와 공의 이치였죠

그제서야 대룡보살은 용서를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보냅니다

 

 

--용수의 활약

용수는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깨달은 이치를 저술하고

논객들과 토론해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공사상을 중심으로 상좌부를 비판하고

그들이 얼마나 허상에 매달려 있는지 알려주려 했죠

상좌부는 계율을 원칙적으로 지키려는 보수성향입니다

용수는 반대로 관념을 깨르는 진보성향이었죠

상자부를 비판한 용수에겐 적이 많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도전장을 내밀며 이론부터 도술대결까지 펼쳤지만

결코 용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치며 점점 그 세력을 키워나갔죠

 

--열반

용수는 오랜 시간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이제는 할 일을 다 마쳤다 생각했습니다

주변엔 글을 시기하는 한 상좌부 불교도가 있었습니다

용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가?”

그러자 그 불교도는 답했습니다

솔직히 아닙니다

 

이후 용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죠

이상하게 생각한 제자들은 기다리다 못해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이미 용수가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어 놓은 듯 사라졌다고 하죠

 

용수는 대승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대승불교의 중관학파를 주창한 인물이기도 하죠

중관학파는 공사상을 중시했습니다

 

 

--용수의 사상

용수가 생각한 불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는 공입니다

용수는 공사상을 분석하고 정리했습니다

공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체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언제나 있으면서 없어지지도 않는 본체입니다

 

용수는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저작 중론에서 세상 모든 존재를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

움직임, 발생, 삶과 죽음, 자아, 시간, 사성제 등

언어가 가지는 모순을 지적해

사실은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지요

사성제와 같은 붓다의 가르침조차도 말이죠

 

때문에 상좌부 불교도들은

용서를 붓다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허무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반대로 용수는 가르침이 공하지 않다면

오히려 가르침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공사상이 단순히 없다는 무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용수는 절대적 진리가 있거나 없거나에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르침에 갇혀 있는 것은 진정한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죠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나아갔다면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단계 더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용수의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연기된 모든 존재는 공하다

용수는 공사상을 연기법과 중도를 함께 동원해 설명합니다

연기법으로 공사상 이론 토대를 만들고

공사상이 곧 중도임을 말하죠

 

그는 공사상을 어떻게 풀었을까요?

연기, 중도, 공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연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연기법은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뭔가가 생기면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하죠

인연을 말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 없이 그냥 혼자서 생기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나무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먼저 적당한 땅과 흙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씨앗이 필요하고

씨앗은 토양의 영양분과 수분, 날씨 등등

충분히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죠

싹을 틔우고 크게 자라기 위해선 시간도 필요합니다

마침내 나무가 다 자란다면 시간이지나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수명이 다하든 나무꾼이 배어가든

환경이 바뀌면 변화가 일어나죠

조건이 모이면 생겨나고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집니다

나무는 결코 혼자 왔다 가는게 아닌 수많은 인연으로 연결된 상태입니다

연기법칙이죠

 

그런데 우리는 나무가 마치 실체가 있는 독립된 개체로 착각합니다

편의상 이름으로 구분은 했지만 사실 연기된 존재는 나눌 수 없습니다

수많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만약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나무를 이룬 조건이 다 빠져도 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죠

땅이 없어도 수분이 없어도 나무가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 , 입이나 자라온 환경, 성격, 감정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나를 이룹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연기된 존재입니다

편의상 나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따로 있다면

나를 이루는 구속 요소를 다 떼어내도

내가 남아 있어야 하죠

인연 없이 그냥 생긴 존재는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을 불이법이라고 합니다

경계가 없다는 뜻이죠

수많은 인연들로 연결된 존재는

딱 어디까지라고 나눌 수 없습니다

경계가 없죠

경계가 없다고 알아차리면

이것 저것 나누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것 저것 나눠서 생각하는 것은 그저 착각일 뿐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온갖 분별로 가득합니다

용수는 분별을 타파할 수 있는 자세로 중도를 해석해 이야기합니다

 

--중도

중도는 극단의 치우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결코 중간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있음과 없음에도 중도를 말합니다

있음과 없음에는 중간이 없죠

있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없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용수는 중론에서 이런 글로 시작합니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항상 이어져 있거나 끊어진 것도 아니며

서로 같거나 다르지도 않다

 

근본불교의 핵심은

무아입니다

나라고 할 만한게 없다는 사상이죠

그래서 당시 불자들은 내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

붓다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침묵이나 사성제로만 답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붓다가 무아를 설하긴 했지만

무아라는 사상에 집착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괴로움을 사라지게 할 방편일 뿐이었죠

 

그런데 자꾸 무아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이 또한 번뇌의 갇히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용수는이 점을 차단했는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중도의 자세입니다

용수는 중도를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않는 상태

분별이 생길 수 없는 상태를

곧 공이라고 말합니다

 

--

공은 본체라 할 만한게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물이든 인연이 모여서 생겨났을 뿐이죠

 

닭이 달걀에서 나왔다고 달걀이 본체는 아닙니다

달걀 또한 인연으로 생겨났으니까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무리 쫓아가 봐도

본체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체가 없으니

지금 보이는 현상들은 마치 꿈처럼

곧 사라질 허상과 같죠

 

--

그런데 공사상을 단손이 허무로만 이해할 경우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없다는 극단에 빠져버리니까요

 

용수는 잘못된 공견을 소금에 비유합니다

소금은 음식을 먹을 때 적당히 넣어 먹으면 맛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소금이 맛있는 줄 알고 한움큼 집어삼켜버립니다

하지만 입만 고통스러울 뿐이죠

이처럼 공사장이 치우쳐 남용한다면 올바른 공이 아니라고 합니다

공은 앞서 중도의 자세로

있거나 없거나에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하지요

 

간단히 개미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무심결에 개미가 작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보다는 작으니까요

그런데 개미는 다른 미생물과 비교하면 엄청 큰 편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죠

단지 사람 입장에서 개미가 작다고 생각할뿐입니다

이런 생각이 개미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럼 있는 그대로인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요?

분별을 걷어낸 상태입니다

 

개미는 본래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개미는 그냥 개미일 뿐이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공안 상태입니다

공은 분별이 없는 본래 모습이죠

 

 

분별이 없다면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나 또한 인연으로 연기된 존재인데

내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하죠

 

만약 내 것이 소중하다면

마찬가지로 남의 것도 소중합니다

나와 남은 다르지 않으니까요

 

때문에 공사상은 자비와 통합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남을 해하는 것은 곧 나를 해치는 셈이죠

 

 

--정리

간단히 쉽게 정리하면 공사상은 모든 집착을 끊어버린 깨달음을 말합니다

공에 대한 집착조차 끊어버릴 때 진정한 공을 알 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공하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무아와도 같죠

앞서 이야기한 연기와 중도 공은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저것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 이것저것이 없어져 분별심이

사라진 상태가 공입니다

 

분별심이 사라지면 나의 것 남의 것의 구별이 사라지고

비로소 나를 아끼는만큼 남을 아끼는 자비와 통하게 되죠

 

우리는 빛을 통해서 사물을 봅니다

촉각을 통해서도 형태를 느끼죠

그런데 그게 과연 진짜 사물의 모습일까요?

 

단지 나 자신의 필터를 통해 인지하는 것일뿐입니다.

세계는 나를 통해서 열리고 닫힙니다

세계가 있고 내가 있는게 아닌

내가 있어서 세계가 있는 셈이죠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분별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사물의 본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밝고 어두움, 있고 없고 등등

모든 것은 상대적인 분별에서 나오니까요

어쩌면 용수는 사물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끔

우리에게 힌트를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