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마인드풀tv_ 나의 공황장애 극복기 1 | 데이트폭력, 트라우마, 자해, 자살기도

Buddhastudy 2023. 11. 7. 19:51

 

 

제가 겪은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

많은 분들이 듣고 싶어 하셔서 영상으로 만들어봤어요.

친구랑 수다 떨듯이 그냥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좀 두서가 없어도 이해해주세요.

 

진짜 그 어느 때보다도 공황장애, 너무너무 흔하잖아요.

그만큼 우리가 마음속에 상처, 정말 오래오래 간직하고

그게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다가

그 부담이 한꺼번에 발작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저마다 나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크냐 작냐의 차이는 있죠.

그리고 그게 굉장히 크게 작용할 경우에 불안장애로 나타나고

극심한 경우에는 공황장애까지 이르게 되죠.

 

겪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공황장애 발작,

그 느낌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감정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오랜 시간 겪고 스스로 극복한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해요.

 

이번 비디오에서는 제가 공황장애를 겪은 이야기에 대해 들려드리고

, 다른 비디오로 그 공황장애를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공유해 드릴게요.

 

 

저는 공황장애가 정확히 한 14살 정도부터 있었어요.

진짜 어린 시절부터 있었죠.

그래서 그게 공황장애인 줄도 모르고

또 그 시절에는 공황장애라는 말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병원에 딱히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어떤 증상이다, 어떤 정신적 질환이다 이런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그냥 제가 멘탈이 나약해서 이런 걸 겪나 보다 하고 자책만 하면서 살았죠.

한 번씩 죽을 것처럼 심장이 뛰고, 숨이 잘 안 쉬어지고, 어질어질하다가 앞이 잘 안 보이고, 식은땀이 나고, 극도로 불안하고...

그래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뭐 그런 적도 몇 번 있는데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의 발작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거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긴 것이든 그거에 익숙해지면

사실 그게 큰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살아가게 되거든요.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부터 그런 거를 겪어야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진짜 그냥 말 그대로 '극심한 스트레스'였던 것 같아요.

 

저는 흔히 말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분명히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가정폭력도 없었어요.

어머님, 아버님 두 분 다 살아 계셨고,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딱히 포기하면서 살아야 됐던 케이스도 아니에요.

 

이런 경우에 보통 많은 분들은

"아니,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네가 스트레스 받을 게 뭐 있어?"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죠.

 

돈이 많든 적든, 환경이 행복하든 불후하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트라우마, 스트레스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보고 그 환경에 따라서

그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진짜 무의미한 거죠.

 

저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복직을 하셔서 어머니랑 헤어져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할머니 손에 맡겨졌고

물론 할머니 너무너무 사랑하고, 지금 너무 감사하지만

그걸 떠나서, 아이에게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이란 건

굉장히... 큰 충격이에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 같은 경우는 너무너무 바쁜 업종에 계셨기 때문에

한 달의 반 정도는 새벽에 들어오셨어요.

그러니까, 잠을 자는 어린아이인 저와는 만날 수가 없는 거였죠.

그래서 엄마와의 애착을 그렇게 기르지 못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제가 저희 어머니를 생각하는 건

보통의 분들이 자기의 엄마를 떠올리는 것과는 약간 다른 느낌인 거 같아요.

저는 엄마를 생각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제 친구들을 보면

아빠를 떠올릴 때 느끼는 그 느낌?

전 엄마한테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굉장히 성실하고, 완벽하고, 강하고,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슈퍼맨 같은 느낌 있잖아요?

그 말은, 어린 시절에 자라오면서 그냥 보통의 친구들이 말하는

"... 너무 힘들어. 엄마 보고 싶다. 엄마랑 통화하고 싶어."

저는 사실 그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죠.

하지만, 딱 그 특정 나이에 형성되어야 했던 애착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엄마'라는 단어에서 받는 그런 안정감을 저는 사실 받지 못하고 살았던 거죠.

 

그러다가 7살에 동생이 태어났어요.

, 7년 정도를 엄마와 한 달의 반 정도만, 그것도 저녁에만 보면서 자랐는데

동생이 태어나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물론 부모님께서는 제가 너무 외롭고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동생을 낳아줘야겠다 생각을 하셨다고 하는데

제 입장에서는 정말 온 세상을 다 뺏기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직도 엄마와의 애착 형성이 되지 못한 상태로 불안한 심리를 갖고 있는데

어른이 되길 강요받기 시작했죠.

아직도 나는 엄마한테 어리광을 제대로 부려본 적도 없는데,

어른이 되어야 했던 상황에 놓였어요.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해서.

 

그래서, 동생을 바라보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정말 세상에서 가장 미운 존재이기도 했죠.

그래서 그렇게 어른이 되길 강요받고,

나는 아직 너무 어린이인 상태에서

나는 어린이이고 싶은데 자꾸 어른이 되라고 하니까

그 갈등 속에 어린아이가 너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전히 제가 보고 싶을 때 엄마를 볼 수는 없었고요.

그리고 마침 동생을 낳고 나서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일을 하시기 시작한 거죠.

 

지금은 알죠.

엄마도 당연히 경제활동을 했어야 됐고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제 일에 욕심을 가지고

제 삶을 꿈꾸면서 사는 사람으로 분명 자랐지만

그때의 그 어린아이, 그냥 엄마가 너무 결핍되어 있던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 나를 낳고는 회사에 가고 싶었는데,

동생을 낳고는 집에 있고 싶은가 보다.' 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들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보통 어머니들처럼 조금이라도 더 섬세한 분이셨다면

"정민아, 너를 낳았을 땐 엄마가 이런 상황이었고

동생을 낳고는 지금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집에 있는 거야.

그때는 회사에 갈 수밖에 없었어." 라고 말씀을 해주셨겠지만

그렇게 섬세한 분이 아니고 굉장히 터프하고, 남성미가 넘치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그냥

'... 우리 집에 나는 필요 없는 존재구나.' 라고 생각을 했죠.

그리고 그런 울컥울컥함이 나올 때마다 그걸 표현을 하면, 항상 혼이 났어요.

"동생보다 7살이나 많은 네가, 이래서야 되겠니."

진짜, 첫째들이 굉장히 많이 듣는 말이죠.

이거는 두 살 차이든 열 살 차이든 모든 집에서 다 나오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 정말 나는 그냥 저렇게 멋있는,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우리 엄마의 성에

조금도 차지 못하는 정말 한심한 딸이구나.

나는 누굴 닮았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우리 가족에게 불행을 끼치는 거지?

왜 나는 이렇게밖에 못하는 존재이지?' 라는 자괴감이 굉장히 많이 들었죠.

 

그래서 그런 안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보니까

학교생활에서도 계속 안 좋은 일들을 만들어냈어요.

말고도 학창시절에 많은 문제를 겪은 분들이 많겠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계속-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해요.

 

제 에너지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 에너지에 상응하는, 같은 주파수에서 공명하는 그 에너지들을

제가 계속 끌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안 좋은 일들만 인생으로 끌어당기고 산 거죠.

 

하지만, 저를 비롯해서 이런 많은 일들을 겪는 분들께서

'나는 정말 피해자구나. 나는 이 세상의 희생양이야.'

'나는 왜 이렇게 안 좋은 일들만 겪고 살아야 되는 운명인 거지?'

이렇게 하면서 스스로를 동정하기 시작하죠?

 

저도 그랬어요.

'나는 그냥 이런 운명인가 봐. 나는 팔자가 엄청 드세.'

'진짜 다른 사람들, 다른 친구들은 하나도 안 겪는 일을 나는 1년에 몇 번씩 겪는 거야?'

'나 지금 몇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런, 이런, 이런 일들을 겪었어.

난 정말 불쌍한 사람이야.'

계속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양화하면서 살았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래요.

그때의 제 자신을 돌아보면

', 저 어린 나이에 저런 일까지 겪어야 됐을까...' 하는 일들은 많았는데

, 근데 후회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음에 너무너무 감사하고

그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그 확신이 있기 때문에

저한테 일어났던 모든 좋은 일, 안 좋은 일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정말 극심한 불안장애에 시달리고 있었죠.

 

성인이 된 지금, 그때의 사진들을 꺼내보면

', 무슨 아이가 이렇게 어둡고 칙칙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애가 왜 이렇게 순수해 보이지가 않고 뭔가 어른 같은 느낌이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실제로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길 들어봐도

', 너는 좀 또래랑 다른 뭔가가 있었어.'

'너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어.'라고 말을 하는데,

그게 좋게 말해서 묘한 분위기지 그냥 너무 어두운 거죠.

 

친구들이랑 뛰어놀기 바빴을 나이인데,

정말 세상에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늘 있었는지...

놀이터에 나가서 친구들을 보면

', 저 친구들 참 예쁘고 순수하구나.

나는 저렇게 살 수가 없어. 나는 그냥 저렇게 태어나질 않았어.'

'나는 불행한 존재이고,

너무너무 화목한 우리 가정에도 불행을 끌어오는 존재이고

나는 그냥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항상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요.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자살을 결심했던 게 무려 열한 살 때예요. 4학년.

11살짜리가...

정말 그냥 세상에 저는 혼자라고 느꼈어요.

'완전히 혼자고, 아무 데도 나는 갈 곳이 없다.'

'이렇게 인생을 100년이고 50년이고 더 살아서 뭐 하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살았던 아파트가 5층짜리였는데 옥상에 올라갔죠.

 

근데, 제가 굉장히 심한 고소공포증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는데

밑을 내려다봤는데,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는 거예요.

그래서 ', 나는 아직 죽을 준비는 안 됐나 보다.

여기서 뛰어내리는 것도 무서운데,

다른 사람들 보면 20, 30층에서도 뛰어내리던데

, 나는... 나는 아니야. 난 더 살아야겠다.'

그냥 그러고 내려왔어요. 어린애였죠.

 

근데, 그 이후로는 자살- 원래 자살기도도 중독이에요.

껌뻑하면 죽고 싶어요.

겪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요만한 일만 일어나도

', 진짜 다 포기 하고 싶어. 나 그냥 죽어버릴래.' 이런 생각 들어요.

그렇지만, 또 죽을 용기도 없는 나 자신한테 실망을 하죠.

이런 자존감이 낮아지는 악순환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모르겠는데

그때 김진표 씨가 했던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되게 장문의 글이었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뭐 이런 제목의 글이었어요.

그리고 그 내용이 되게 길어서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기억나는 게

'젓가락으로 아니면 손톱깎이로 겨드랑이의 살을 집을 자신이 없으면

죽을 생각하지 마라.' 이런 끔찍한 이야기였어요.

그니까 그만큼을 할 자신이 없으면, 너의 삶을 너 스스로 끊으려는

그런 어마무시한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게 되는 거잖아요.

그 글을 접하고 나서 조금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아무리 힘을 내서 살려고 한들, 힘이 그냥 나나요?

저절로 나지 않죠.

나의 일상은 계속 똑같고 집에선 외롭고, 학교에서도 외롭고

어딜 가도 진짜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고

그냥 '아직도 나는 세상에 혼자구나.' '죽지 못해 산다.'

그냥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초등학생이.

 

그 당시에 저랑 친했던 친구들은 조금은 알아요.

제가 가정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지만, 누가 보기에도 너무 멀쩡한 가정이었고

경제적인 환경이 조금 불우하거나 아니면 한부모 가정이었던 친구들은

"너는 부모님 다 계시잖아. 부모님 함께 계시잖아.

그리고 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잖아. 근데 왜?"라는 말을 항상 했기 때문에

', 그래. 나는 정말 불평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불평하고 사는 정말 한심한 사람이구나.'

또 그런 악순환으로 들어갔죠.

 

난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든데

사람들은 나보고 힘들면 안 된다고 하니까

, 그걸 더더욱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빠져나오려고 노력할수록 깊게 빠져드는 늪 같은 거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 부모님이 두 분 다 굉장히 바쁘시기 때문에,

야근도 많은 업종이고.

그래서 주말에는 항상 저희와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정말 여행도 저희는 엄청 많이 다녔어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식들과 함께 좋은 것들을 하려고 하는 그 노력은

분명히 있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너무 감사하고 대단해요.

하지만, 저는 동생이 태어나고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어요.

두 번 다시 부모님에게 내 마음을 표현해서

그걸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죠.

동생과 비교당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너무 어렸던 나날에 사소한 트라우마가 너무너무 크게 자리 잡아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거죠.

 

그 역할을 부모가 해주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그거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물론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다 할 수 있는데, 어릴 때 부모님이 해주셨으면 가장 좋았겠죠.

 

하지만, 그 시대의 부모님들이 거의 다 그러셨듯이

저희 부모님도 그런 문제엔 좀 둔감하셨어요.

그 시대 분들은 먹고사는 것에 가장 중요성을 크게 뒀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감정적인

아니면 내면에 관련된 이런 것들을 신경 쓰고 사실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제 세대, 제 세대에 아이를 갖고 있는 부모들이 가진 생각과는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신 거죠.

게다가 저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저희 외할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할머님도 너무 힘드시니까

가정교사분이나 아니면은 가정부 아주머니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저한테는 약간 엄마의 대신? 역할 같은 거였죠.

 

물론 너무너무 다 좋은 분들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그립고 감사하지만

혈육이 주는 안정감은 혈육한테 밖에 얻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만약에 입양이 된 사람이라면

나를 길러준 엄마, 그 엄마라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가 진짜 진짜 크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에 저의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도 없었고

지금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딱히 뭐 이렇다 할 상담 센터나 이런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혼자 그렇게 끙끙대는 버릇을 안고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게 됐죠.

 

, 집에서는 그냥 제가 좀 예민한 아이

아니면 사춘기가 좀 빨리 와서 많이 까칠한 아이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하신 거예요.

제가 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노랠 부르고 사는 거는 전혀 모르셨죠.

 

끌어당김의 법칙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 그렇게 계속 낮은 주파수로 불행을 끌어당기며

안 좋은 일들을 자처하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사람들한테 뒤통수도 많이 맞았고, 친구들한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근데 또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했는지 계속 사람을 믿고 계속 사람들을 따랐어요.

그리고 또 상처받고,

하지만 또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닫지 않았던 게 지금 돌이켜보면은 잘한 일인 것 같기는 한데,

또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죠.

 

저야말로 또 자존감이 부족해서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고

그러면서 굉장히 소중한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고,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사실.

근데,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그 죄책감으로 몇 배 더 힘들었죠.

이것도 악순환이에요.

 

그러다가 성년이 되는 해에 제 불안장애가 극도로 심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보통 우리, 고등학교 졸업해서 성인이 될 때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겪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 180도의 변화와 함께 땅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경험을

그때 하게 된 거죠.

 

요즘에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신조어가 있잖아요.

그만큼 너무 흔해졌기 때문에 그런 단어도 만들어졌겠죠.

되게 슬픈 일인데,

어떻게 보면 저처럼 바쁜 가족 안에 사는 사람에겐

가족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자주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 인생을 정말 거의 뿌리를 뽑아놓을 지경으로 흔들어놨어요.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어리석었죠.

그냥 딱 결심하고 벗어났으면 됐을 텐데.

그때 마침, 저희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그걸 이겨내려고 굉장히 열심히 노력하시는 부모님을 뵈었고

또 거기에서 굉장한 나름의 자부심도 얻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끼어들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쓸모없는 스무 살이구나.' 이 생각과 더불어서

'난 세상에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짜 나약한 존재구나.'

뭐 이런 생각들로 또 되게 복잡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 그래도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않던 가족이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의 가장 큰 안정이자 (무의식적으로요.)

안정이자 지지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게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그 안정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죠.

 

그게 아마도 그때 만나고 있던 친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친구에게도

내가 가정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길 하지 못했고

끊임없는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심하게 겪은 건 아니었지만

언어폭력이 제 주파수를 죽기 직전까지 끌어내렸어요.

 

솔직히 이건 좀 창피하고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경제적인 것에 대해서 아주 어릴 때, 책임감을 느껴본 적도 없고

책임감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산 거죠.

진짜 편하게 산 거예요.

 

근데 이제, 그게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진짜 한 번 더 죽고 싶은 거예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진짜 철부지죠. 진짜 철부지인데

진짜, 내가 하던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닌데

집이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그냥 세상이 통째로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거기에 데이트 폭력까지 들어온 거죠.

간단히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론

부모님의 안위 자체로 굉장한 심리적 위안을 얻고 산 건데

그 위로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상대지만 끊어내지 못했던 거예요.

그 위안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

 

결국 나에게 기둥은 나 스스로가 되어 줬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까지는 깊이 못하는 어리석은 스무 살이었던 거죠.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간 상태였고

저는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어요.

 

그리고 왜, 우리 처음 대학 가면

막 새로운 친구들이랑 사귀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여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많은 어른들의 것을 접하면서 되게 바쁘잖아요.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다 연락도 못 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더욱 혼자였어요.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갔고, 재수를 하는 친구도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떠날 준비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힘들고 또 나의 학대자 때문에 힘들고...

하지만, 이걸 털어놓을 곳이 마땅히 없었던 거죠.

 

그렇게 매일 혼자 밤을 지새우며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익혔고.

친구들은 저한테 항상 그랬어요.

"넌 진짜 강해."

"너는 정말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멘탈이 세."

 

근데 저는 강한 게 아니라 그냥 독해지기만 했던 것 같아요.

뭔가 버텨내는 그 오기는 엄청나게 강했는데,

진짜 강한 사람은 마음이 굉장히 평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잖아요.

저는 단 한 번도 그렇지 못했던 거죠.

 

매일 밤을 혼자 지새우며, 잠 한숨 못 자고 걱정들을 하기 시작했고

7살이나 차이 나서 말은 안 통하겠지만

그 어렸던 동생은 이미 해외에 가 있었고.

그래서 집에는 저랑 저희 가정부 아주머니 이렇게 둘밖에 없었어요.

 

근데 이제 아주머니께서도 제가 성인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저를 돌봐주러 오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아주머니도 그만두시고.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있게 됐던 거죠.

하얀 벽을 바라보며.

 

그 텅 빈 집에서 정말 미치광이가 되어갔어요.

잠을 못 잘 때는 2주일 동안 단 1시간도 못 잔 적도 있어요.

그리고 그 정도 못 자면 사람이 정말 정신이 아예 나가요.

친구도, 부모님도, 아무도 없이

그 괴로운 마음을 혼자 끙끙대면서 견디고 있는

그 괴로운 날마다 저의 정신적 학대자는 어떻게 알고 꼭 나타나서

저를 더 배로 괴롭힙니다.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말들을 퍼붓고

저를 괴롭게 할 수 있는 건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참, 말이라는 게 가진 힘이 엄청나서요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주입받다 보면 그렇게 믿게 돼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정말 단 하루라도 더 살 가치가 없는 인간,

더럽고 추접한 존재,

정말 쓰레기만도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되게 굳게 믿게 됐어요.

 

사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험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으니까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해에 중독되기 시작했습니다.

날카로운 거, 유리든 칼이든 뭔가 보면 일단 내 살을 그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너무너무 살아있을 가치도 없고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에 아파야 돼! 다쳐야 돼!'

이게 잠재의식에 깔려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해를 가하고 내가 내 살을 찢고 피를 흘리면,

그때 안정감을 찾는 거죠.

 

그리고 자해도 중독이에요.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진 상태, 그게 자해고요.

그게 바닥을 치면 자살을 하는 거죠.

그렇게 늘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면 안심이 되었고

붕대나 반창고를 항상 달고 살았어요.

 

지금 자식을 낳고 생각해 보면, 정말 정말 불효를 했죠.

그렇게 한참 자해에 중독되어 있었는데

먹는 건 뭐든지 토하는 증상이 생긴 거예요.

나중에는 물도 못 마셨어요.

뭔가 삼키면 바로 게워 냈어요.

 

이 정신적 고통- 이 심각한 불안장애,

공황장애가 시작되기 전에는 체중이 46kg에서 48kg을 왔다 갔다 했는데

토하는 증상이 굉장히 심해지고 몇 개월이 지난 후에는

체중이 38kg까지 빠졌었어요.

정말 해골 같았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굉장히 장기간을 보내고 나니

내 몸이 죽을 준비를 시작한 거죠.

 

당연한 거예요.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정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너무 토를 하니까

식도가 거의 염산 부어놓은 것처럼 하루 종일 타들어가는 느낌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몸이 아파지니까 더 죽고 싶은 거죠.

이거 진짜 악순환이에요.

죽고 싶다고 생각해서 몸이 죽을 준비를 해서 너무 아파진 거예요.

근데 아프니까 더 죽고 싶은 거예요.

근데 죽지는 못하고.

이거 진짜 악순환이죠.

진짜 끊을 수 없는 악순환.

 

그리고 정말 어떻게 보면 되게 슬픈 건

제가 38kg를 찍고 나서야

그러니까 정말 몸의 마디마디가 다 튀어나오는 그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저희 어머니가 저를 보고

'어머, 너 왜 이러니!'라고 깨달으신 거예요.

그만큼 바쁘셨던 거죠.

 

그렇게 깜짝 놀란 엄마의 손에 이끌려서 처음으로 병원에 갔어요.

그렇게 별의별 검사 다 했는데

당연히 아무 질병도 진단할 수가 없었어요.

당연하죠. 마음의 병이니까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몸이 죽고 싶으니까

병원에 가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식도염은 좀 어떻게 해결을 해야겠으니까

위내시경으로 한 번 보자 이래서 내시경을 하게 됐어요.

근데 수면 마취를 안 했으니까

제 위의 상황을 의사선생님이랑 같이 화면으로 보는데

위가 안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선생님이

'? 위가 죽은 사람의 위처럼 전혀 움직이질 않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으니 그냥 약을 좀 줄 테니까

미음을 조금씩 먹으면서 약을 함께 먹어 봐라.'

그냥 그 정도로 마무리가 됐어요.

 

그때는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근데 또 아픈 건 너무 괴로워서

어머니가 '이런 이런 병원이 좋대, 저 병원이 좋대.' 하면 열심히 따라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뭔가 엄마의 관심을 드디어 100% 받는다는 그런 느낌도 들기도 했고요.

거기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는 지도 모르죠.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 간단한 걸 몰랐는지 몰라요.

살기가 싫으니까 몸도 '죽자!' 모드로 들어갔다는 거.

내가 그때 마음만 바꿨으면

내 몸도 다시 살기 위한 모드로 열심히 힘을 내서 들어갔을 텐데.

내가 의식을 갖추면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주치의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어요.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정말 해골처럼 지내다가

스물한 살 처자가 6학년 때 입었던 청바지를 입었는데

헐렁할 정도로 살이 빠지고 나서야 거의 떠밀리듯이 유학길에 나섰어요.

그땐 정말 살고 싶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죠 당연히.

유학이고 뭐고 내가 아무리 가고 싶었던 거고

내가 아무리 공부하고 싶었던 거여도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요.

 

근데 엄마가 글쎄요, 엄마의 직감으로 알았을까요?

저를 보내야 된다는걸?

그래서 거의 떠밀리듯이 갔어요.

너무너무 불안한 경제적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라!'고 하셔서 억지로 갔죠.

 

그리고, 그 덕분에 저의 학대자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외국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불안정하잖아요.

 

근데, 나의 뿌리가 불안정하다는 걸 알면서 해외 생활을 하니까

불안에, 불안에, 불안에, 불안을 낳죠.

그래서 정말 또 불안한 상태로 계속 그렇게 생활을 했어요.

 

제게 온 세상 같았던 저희 부모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건

저한테는 거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과 같았고,

되게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요.

 

그리고 부모님에게 제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뿐,

존경하는 마음은 항상 한결같았기 때문에

정말 온 우주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죠.

그래도 눈앞에서 안 보이고 몸이 멀어지니까 조금은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그렇게 괴롭혔던 학대자와 멀어지니까 살 것 같았죠.

하지만 우울함이 닥치거나 극단적으로 화가 날 때,

나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충동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가 않더라고요.

 

화가 나면 일단 유리컵이라도 하나 깨고 싶고

그 파편을 보면 나를 긋고 싶고.

이 충동은 정말 너무너무 중독적인 거고

내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 이상은 없어지지 않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때는 그 해결책조차 모르고 계속 그렇게 아픈 나날들을 보냈죠.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불안장애에

또 매일같이 겪었던 언어폭력으로 극단적으로 낮아진 자존감.

그런 것들이 겹겹이 쌓여서 정말 회복되기가 힘든 상태였어요.

게다가 전문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내 문제가 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죠.

 

워낙 어릴 때부터 좀 비실대고 아팠기 때문에

그리고 병원에 가서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컸고

그래서 또 정신과에 가볼 생각은 한 번도 못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족 지인인 정신과 의사선생님께서

'네가 극복할 수 있는 만큼까지 극복을 해보고

그래도 정말 안 되겠다, 그럼 그때 찾아와라.'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죠.

 

그래서, 스스로 극복하기에 나섰습니다.

저는 정말 오랜 시간을 제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굉장히 많은 분들, 저와 같은 상황이실 거예요.

내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계속 괴로움만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에 대한 의욕은 점점 없어지고요.

 

하지만 혼자 버틴 덕분에

내 내면과 직접적으로 내가 접촉할 수 있는 명상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연적 치료 방법으로 제 스스로를 치유하게 된 거죠.

 

언어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아니면 성폭력이든

그 크기가 작든 크든 어디서, 어떻게,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해도

폭력은 폭력이고, 트라우마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언어폭력,

예를 들어서 서너 살짜리 꼬마한테요

'너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멍청해? 너는 진짜 진짜 멍청한 거 같아.'

단순한 이런 표현이어도요

그게 가슴에 비수로 꽂히면 그 사람의 트라우마가 되고요.

그 트라우마가 먼 훗날에 공황장애로 커져요.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는

결국 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돼요.

 

, 저는 그때 그 먼 곳에 가서 살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곳을 혼자 걷는 게 극도로 무서웠어요.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거 같고, 날 덮쳐서 해할 거 같고

아니면 정말 뒤에서 누군가가 나한테 칼을 꽂는 그런 장면도 여러 번 그려졌어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심장이 철렁하고요.

발신번호 표시제한' 이런 전화를 받으면

정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을 나한테 퍼부을 것 같았죠.

 

그리고 이러한 증상들은 사실 명상에 입문하고 나서도 종종 찾아왔어요.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연애 기간에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아무 일도 없이 편안하게 거실 한복판에 앉아있다가도

공황장애 발작은 왔어요.

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구역감이 나고, 숨이 안 쉬어지고, 앞이 안 보이고, 세상이 하얘지고, 어지럽고, 식은땀 나고.

말 그대로, 내가 신을 믿는다면

'저 좀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빌고 싶을 정도의 불안감이 오죠.

 

불안감은 지금도 가끔은 찾아와요.

그래서 저는 지속적으로 수련을 해요.

단 며칠이어도 에너지가 안 좋은 음식을 좀 지속적으로 먹거나

아니면 에너지가 안 좋은 생활을 하면 주파수가 낮아지죠.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요.

 

하지만 마음수련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 매일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다른 명상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매일 당연히 세수를 하고 이를 닦듯이

마음도 닦아내는 일을 해야 되는 거죠.

 

트라우마가 말을 거창하게 해서 그렇지

그냥 마음의 찌꺼기 같은 거예요.

상처 같은 거예요.

약을 발라주면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는 거예요.

 

다만, 보통의 상처보다 제거하기가 좀 힘들고

없어졌나 싶으면, 조금 다시 고개를 드는 그런 존재인 거죠.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지워낼 수 있는 거고요.

저는 지금 99.999999% 모두 지웠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자살기도와 자해에 중독될 정도로 괴롭게 만들었던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은 없어진 지 오래예요.

아니면은 애초에 미워하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제가 만약 그때 정말 강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면

저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그 사람을

오히려 끌어안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저도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찬가지로 약한 사람이었고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음...

그 사람은 저에게 상처를 줬고

그리고 아마 저에게 상처를 줌으로 인해서

그 사람도 굉장히 많이 상처받았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밝게, 맑은 마음으로 살고 있길 진심으로 원하고요.

정말 그렇게 기도하고요.

 

, 지금의 제가 있도록

제 인생의 일부를 그렇게 만들어줘서 정말로 고맙다고 생각해요.

 

가족에 의한 성폭력에 시달렸다거나

아니면 너무 장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렸다거나

이런 분들

저보다 훨씬 더 심한 증상 갖고 계시죠.

당연해요. 나와 너무 긴밀하고 끊어낼 수 없는 존재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 대부분이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하시고요.

, 그래서 목숨을 끊게 되는 경우도 되게 많죠.

진짜 안타까운 일이에요.

 

트라우마의 크기가 어떻든

지속적인 마음수련으로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밝고 청아한 에너지를 막 뿜어내면서 살 수 있어요.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이건 타고난 능력치, 스펙 이런 거랑 아무 상관도 없어요.

이따금 불안장애 증상을 겪는다고 지금 제가 불안할까요?

전혀 아니에요.

 

불안감이 찾아오면, 그것도 굉장히 빈도수가 낮은 일이지만요

딱 바로 눈을 감고, 30초든 1분이든 명상을 해요.

마음을 흘려보내요.

그러고 나면 다시 빛으로 차올라요.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고, 가장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고,

그리고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기운으로 차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어요.

1분을 할애하고, 평온함을 찾는 거죠.

 

제가 힘든 일을 겪고 살아오면서

늘 비슷한 힘든 일을 겪는 주변의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했고요.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진짜 어렵게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기로 결심도 했어요.

 

불특정 다수에게 이렇게 제 얼굴을 공개하고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든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인 저에게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사실.

 

어느 날 명상을 하고 있는데 머리 속에 팍! 떠올랐어요.

뭐가? 유튜브 로고가.

'! 이거는 신호다!' 그리고 당장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죠.

'유튜브를 해봐야겠어!'

근데 또, 계정 만들고 나니까 막상 쉽지가 않은 거예요.

진짜 어려운 일이잖아요 사실.

 

근데 또 결국 이렇게 하게 된 걸 보면,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떤 분들에게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저를 끌어서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채널을 운영해온 지난 한 달간,

많은 분들께서 저로 인해 크고 작은 변화를, 인생의 변화를 얻었다고

이메일로 정성스럽게 보내주셔서

진짜 진짜 너무너무 감사하고 뿌듯하고 행복하고요.

 

자꾸 이야기가 산으로 가죠?

제가 포인트를 정리를 안 해서 말을 하다 보니까 얘기가 자꾸 산으로 가는데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했던 두 가지 노력,

크게 두 가지 노력은요

 

첫 번째, 자존감 높이기

두 번째, 명상하기

이 두 가지예요.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했는지

그 디테일은 다른 영상에서 보여드릴게요.

 

지금, 제가 찍었던 영상 중에 가장 긴 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저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고

일어났던 일도 되게 간추려서 이야기한 건데도

시간이 엄청 많이 흘렀네요.

 

여기까지 주절주절 다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다음 영상에서 만나요!

 

오늘 하루도 풍요롭고 행복하게,

보스처럼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