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에고로부터의 깨어남을 위해 참된 명상이 필요하다. [낭독47회]

Buddhastudy 2023. 11. 8. 20:11

 

 

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 함께 하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아디야샨티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태어났구요.

14년 동안 선()을 공부했습니다.

영적 깨달음 이후에는 스승의 요청에 따라

1996년부터 구도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요.

그의 가르침의 특징은

어떤 전통이나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완전한 깨달음],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춤추는 공()] 등이 있습니다.

내용 읽어 보겠습니다.

 

--

나는 선불교 출신인데, 선 전통에는 명상을 기본적인 수행으로 하는 오랜 역사가 있다.

선에서는 하루에 몇 시간씩 미리 정해진 시간 동안 좌선하는 자세로 명상을 한다.

이런 명상을 오랫동안 하면서 알게 된 점은

내가 이런 명상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역시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는 명상이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은 분주하고, 몸은 들썩거리고 싶어 하며, 차분하고 고요해지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명상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느꼈다.

 

나는 여러 수련회에 참석하여 좌선을 했고 집에서도 좌선을 했다.

집에서는 하루에 30분이나 한 시간, 때로는 더 오래 좌선을 했다.

수련회에 가서는 훨씬 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한 명상은 실제로는 전혀 명상이 아닐 때가 아주 많았다.

그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통제하고, 고요해지기 위해 벌이는

수없는 투쟁과 노력이었다.

명상이 저절로 이루어진 듯한 몇 번의 마법 같은 순간을 제외하면

그 모든 노력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난 뒤에는 내게 다른 명상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쓰고 있던 방법은 분명히 효과가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 참된 명상이라 부르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음과 전쟁을 벌이면서 이기려고 애쓰면 영원히 전쟁 상태에 있게 될 겁니다.”

 

그 말은 내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그 순간, 이제까지 내가 명상을 마음과 싸우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영원히 그런 상태에 있을 거라니, 끔찍하군.

명상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겠어.”

 

이런 식의 명상을 아무리 계속해 봐도

마음과의 전쟁이 한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

마음과 전쟁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나는 내 마음, 내 느낌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가 인간으로 겪는 모든 경험과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 명상이 무엇일지

조용히 그리고 아주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명상하기 시작했다.

명상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견해도 놓아 버렸다.

내 마음은 명상에 대해 수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명상은 평화로워야 한다고 믿었고,

명상을 하면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한다고, 주로 평온함을 느껴야 한다고 믿었다.

명상을 하면 존재의 어떤 깊은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지도받고 있던 명상의 기법에 통달할 수 없었으므로

다른 명상법을 발견해야만 했고

그것은 어느 하나의 기법에 매이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나의 경험이 그저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내면 깊이 그렇게 했다.

경험을 통제하려는 노력도 놓아 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참된 명상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 전환-어떤 기법이나 수행에 통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기법과 수행을 실제로 놓아 버림으로의 전환-이 내게 명상에 참여하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명상에 관한 우리의 견해들은 대개 과거에 학습한 것들로 물들어 있다.

명상에 관해 배운 것들, 명상이란 어떤 것이라는 생각, 명상을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 등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명상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수없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또는 몸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차크라라고 하는

몸 안의 미묘한 에너지 통로들을 열기 위해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자비심을 계발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변형된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싯디라고 부르는 어떤 영적 혹은 정신적 능력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한다.

그리고 영적인 깨어남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명상이 있다.

 

내게 정말로 흥미가 느껴지는 것은 이런 명상

즉 영적인 깨어남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명상이다.

참된 명상은 이런 명상이다.

 

어떤 사람이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지, 아니면 오랫동안 명상을 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명상 경력 자체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명상에 참여하는 태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태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태도로 명상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나 대중매체, 다양한 영적·종교적 전통을 통해서

명상에 대해 들은 지식들로, 그런 과거의 것들로 물들지 않은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새롭고 때 묻지 않은 방식으로 명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적 교사로서 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명상해 온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흔히 들은 얘기 중 하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명상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명상은 내면을 깊이 변화시키고 영적인 진실을 드러내지만

많은 사람은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심지어 오랜 세월 명상을 해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내가 행했던 명상을 비롯한 일부 수행들이

이러한 변화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데는 분명히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놓치기 쉬운데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태도로 명상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제하고 조작하는 태도로 명상을 한다.

명상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존재의 깨어난 상태, 존재의 깨달은 상태는 존재의 자연스러운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통제와 조작이 우리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이란 결국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복잡한 용어들을 모두 벗겨 내고 보면

깨달음이란 그저 우리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란

당연히 꾸미지 않은 상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나 훈련이 필요 없는 상태

몸이나 마음을 어떤 식으로 조작한다 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는 존재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자연스럽고 완전히 자발적인 상태이다.

 

명상을 하다가 자주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명상 기법들은 일종의 통제를 위한 수단이다.

마음이 우리의 경험을 통제하고 좌우하는 한

마음은 우리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란 마음에게 통제당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음은 통제와 조작을 통해 다양한 의식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심령 능력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기법 위주이거나 조작 위주인 명상법을 통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자신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존재 방식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내면의 통제와 조작을 통해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자발적인 존재 방식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도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법이 깊은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명상의 방식이나 기법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명상에 참여하는 태도에 있다.

만약 우리가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태도를 취한다면

또 어떤 수련법에 통달하려는 접근법을 취한다면

그런 태도가 바로 장애가 된다.

그럴 때 명상을 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 즉 에고이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이나 영적인 깨어남에 대해 얘기할 때

당연히 우리는 마음으로부터의깨어남, ‘에고로부터의깨어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참된 명상이라고 부르는 명상에서는

통제하고 조작하고 수행하려는 마음의 성향을 맨 처음부터 포기한다.

통제와 조작을 놓아 버리는 것이 참된 명상의 기반이다.

재미있게도, 통제를 포기하고 조작을 포기하는 더없이 단순한 태도가

바로 참된 명상의 시작이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채널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평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