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금강경

제 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_법륜스님

Buddhastudy 2013. 2. 17. 04:55

출처: 정토회

     

안녕하세요. 55페이지 펴주세요. 금강경 8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9 일상무상분입니다.

一相無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을 우리는 삼라만상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만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 개체, 개별적 존재다. 그 개별적 존재는 서로 다 다르다 이거요. 그런 만 가지 모양을 갖고 이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계다.

 

그런데 사실은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각각 다 다른 모양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만상이 곧 일상이다. 만법귀일 이런 말 들어보셨죠? 깨달은 눈으로 보면 곧 하나로 되어있다. 그래서 만상이 곧 일상이다. 만법귀일이다. 하나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 하나의 모양이 세계의 참 모습이냐? 하나의 모양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모습이라고 모양 지으면 그것은 참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모양이라는 것은 곧 모양 없음을 말하는 거다. 하나를 세우게 되면 다른 하나가 저절로 선다. 그래서 하나마저도 세우지 않아야 그것이 참모습이다. 그래서 일상은 무상이다. 그래서 일상무상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도 세워서는 안 된다.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에요. 그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저 뜻이 어떠하냐?

須陀洹能作是念我得須陀洹果不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느냐? 마느냐?

須菩提言不也世尊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須陀洹名爲入流而無所入是 수다원이 이름이 유에 든다. 입유라 하지만은 사실은 들은 바가 없기에 들어간 바가 없기에 그 이름이 수다원이다. 여기서 이무소입, 들어간 바가 없다 하는 것을 다른 말로

不入色聲香味觸法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간 바가 없을 새. 그 이름이 수다원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須菩提於意云何 똑같 논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보리야 저 뜻이 어떠하냐,

斯陀含能作是念我得 斯陀含果不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須菩提言不也世尊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斯陀含名一往來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 번 오고 간다라는 이름이로되

而實無往來 실로는 오고 감이 없을 새

是名斯陀含 그 이름이 사다함이니이다. 사다함이라고 이름하나이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아나함이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왜냐하면 아나함이 아나함이라는 것은 온 바가 없다라는 말이로되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실로는 온 바가 없다고 할 것도 없을새. 이런 까닭으로 아나함이라 이름하나이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고 이렇게 생각을 짓느냐?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어찌한 까닭인가 하면 사실은 무유정법.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한 것이 없을새 아라한이라 이름 하나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4가지를 똑같은 표현 방법으로 써 놓았거든요. 여기서 우선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수다원, 그 다음에 사다함, 그 다음에 아나함, 그 다음에 아라한. 4가지에 대해서 우선 이해를 하고 그 다음에 문장을 살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소승불교에서는 어리석게 살아가는 우리 중생을 뭐라고 하냐 하면 범부중생이라 이렇게 말해요. 범부중생. 범부중생은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이 행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가는데 결과는 불행하게 된다. 살려고 하는데 결과는 죽게 된다. 이런 것을 범부중생이다 그래요.

 

이것은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의 법칙을 알지 못하고, 그저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살아가는 중생을 말한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고, 짓지도 않고 받으려고만 하고 이런 게 범부 중생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움직인다. 그것이 무슨 법칙이냐? 인연의 법칙이다. 심은 게 있어야 거둘게 있고, 준 게 있어야 받을 게 있고. 이렇다 이 말이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고,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먼저 해야 되고, 남 도움을 받으려면 남 어려울 때 먼저 도와야 된다.

 

이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이런 법칙에 의해서 그러한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뭐라 하냐? 이것을 현인이다. 이렇게 말해요. 현인이라 하지만은 이것이 바로 보통 인간이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다. 이게 사람이다 이거요. 그럼 범부중생을 뭐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뭐냐? 지옥아귀축생 같은 사람이다. 이것은 현생에 살아있어도 지옥아귀축생과 같이 살아가고 있고. 죽으면 지옥아귀축생도에 떨어질 거다.

 

그러면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냐? 그 사람의 양심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즉 이 생에도 사람같이 살아가고, 죽어도 사람이나 천상에 나게 된다. 이게 사람다운 사람. 하도 어리석은 사람이 많으니까. 이런 사람을 우리가 슬기로운 사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발 더 벗어나게 되며 어떠냐? 이게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게 된다. 이렇게 말해요. 여기까진 어떠냐? 하면 삼악도에 떨어지거나 삼선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윤회의 사슬에 묶어있다. 윤회의 바퀴 속에서 늘 돌고 돈다. 이것이 육도윤회의 세계다.

 

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삶. 그 벗어나는 것부터 뭐라 하냐? 성인의 길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인의 길에서 첫 번째가 뭐냐? 성문이다. 그 다음에 연각, 그 다음에 보살, 그래서 불, 이렇게 나아간다. 지옥아귀축생인간수라천상이 육도죠. 그 육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그 다음에 일곱 번째가 성문, 여덟 번째가 연각, 아홉 번째가 보살, 열 번째가 불. 이래서 우리가 이것을 십법계다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오. 여기서는 십법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육도에서 벗어나는 삶. 이것을 우리가 성인의 길이다. 이렇게 말한다.

 

~ 이 성인의 길에 제일 첫 번째 사람을 성인의 길에는 4가지가 있다. 그래요. 성문성인의 길에 성문사과라 이래요. 성문성인의 길. 성문승들이 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데는 4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첫째가 수다원이요 둘째가 사다함이오 셋째가 아나함이요 넷째가 아라한이라고 말한다. 이 세속의 길, 육도윤회의 길은 어떠냐? 그것은 마치 탁유가 흘러가는 그런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다.

 

자신에 의해서 살아가자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물결에 흘러간다. 떠내려간다. 이거야. 이 세상에 올 때도 왜 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던져진 존재고, 살아가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이렇게 가면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저 따라간다. 남 따라 가.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장에 가듯이.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주위사람이 가는 데로. 무조건 따라가는 거요. 이것이 바로 이 사바세계의 모습니다.

 

바로 이 사바세계의 이 따라가는 삶으로부터 이 탁류로부터 강가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 벗어나는 길부터를 우리가 성인의 길이다.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오. 벗어나려면 첫째 어떻게 해야 되냐? 구명의 밧줄을 잡아야 된다. 떠내려가는 사람보고 바깥에서 밧줄을 던져 준단 말이오. 잡았다. 이 말이오. 그 구명의 밧줄을 잡으면 어떻게 되느냐? 쉬워지느냐? 아니다. 어려워진다.

 

? 거센 물결에 거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해탈 열반의 길은 이 세상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가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역류가 이래. 역류. 거꾸로 흐른다. 이 말이오. 사실은 이 깨달음의 길이 거꾸로 흐르는 게 아니고, 세상의 물결이 거꾸로 흐르기 때문에. 마치 깨달음의 길이 그걸 거스르니까. 깨달음의 길이 바로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거야. 우리가 지금 나아가는 이 길을 정상적인 흐름이라고 본다면 깨달음의 길은 여기를 거스른다. 이런 얘기요.

 

본래는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가 뺑뺑 도는데. 우리가 지구 속에 갇혀 있으면 태양이 지구를 뺑뺑 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고. 차를 타고 가면 땅은 가만있고 버드나무는 가만있고 차가 움직이는 건데. 자기를 중심에 놓고 보면 버드나무가 뒤로 쌩쌩 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세속의 물결이 진리와 거슬러 흘러가기 때문에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 마치 이것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속을 거슬러야 되니까. 그래서 해탈의 길은 역류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거슬러야 돼.

 

거스르려면 힘이 들죠. 밧줄을 탁 놔버리는 게 훨씬 편한 거 같죠. 그러나 그 길은 죽는 길이다. 그러니까 밧줄을 단단히 잡아야 되요. 이 밧줄을 단단히 잡고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서 강가로 나와야 된다. 이 거슬러서 강가로 나오는데 바로 소승에서는 4가지 단계를 둔다. 4가지가 뭐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4가지를 두고 있다.

 

~ 첫째 수다원이라는 게 뭐냐? 수다원이라는 것은 견해가 열리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뭐가 덮어씌여서 또는 어떤 업식에 가려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이런 얘기요. 쥐약이면 쥐약인줄, 이렇게 탁 알아야 되는데. 그게 쥐약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거요. 전도몽상, 거꾸로 안다. 뭘 모른다. 무명. 무지. 또는 안다 해도 나중에 알고 보면 거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전도몽상. 렇게 말하죠. 여기서 깨어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먼저 봐야 돼. 사실대로 알아야 된다. 이 말이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조견, 육바라밀에서는 정견.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안목이 열린다. 이것을 도에서는 뭐라 하냐? 견도를 증득했다. 이렇게 말해요. 견도가 열렸다. 견도. 보는 길이 열렸다. 사물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모든 이치를 알아 차렸다. 이런 얘기요. 이 견도를 얻게 되면 곧 수다원이 된다. 이런 얘기요. 성인의 유에 들었다 이런 얘기요.

 

우리가 살다 보면 말이에요. 짜증나고 화나고 이런 일이 많죠. 그 짜증나고 화날 때 늘 생각해 보면 어때요? 왜 짜증나고 화납니까? 다 바깥이 나를 짜증나고 화나게 만들죠. 그죠? 더운 날씨가 나를 뭐하게 만든다? 짜증나게 만들고. 바람이 한 점 안부는 게 나를 짜증나게 만들고, 더워죽겠는데 자꾸 앞에서 알짱거려서 짜증이 나고, 말하기 싫은데 자꾸 말을 걸어서 신경질이 나고. 이렇게 내가 화나고 짜증나는 것이. 즉 나의 괴로움이 다 너희들 때문이다. 저것들 때문이다. 즉 나 밖에 어떤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화를 안내고 짜증을 안 내려고 그래도 참는데도 한도가 있다. 어떻게 안 낼 수가 있느냐? 내가 신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고 어떻게 화를 안 낼 수가 있냐. 이런 모든 표현들은 뭐냐 하면 다 바깥이 나를 못살게 군다. 이런 생각이란 말이오. 이게 바로 잘못 알고 있는 거란 말이오. 이게 바로 전도 몽상이다 이런 얘기요. 그런 것 같은데 그것은 마치 지구에 갇혀있는 사람이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과 똑같다. 이거요.

 

그러니까 같이 착각을 하는 사람은 대화를 하면 서로 통한다. 그러니까 옆에서 보면 어때요? 그래 화날만하다. 이렇게 서로 동조를 해 주면서 서로 위안을 삼고 산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하는 말이 다수의 의견을 들어서 자신의 견해가 바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우리는 늘 애를 쓰게 된다. 자기 얘기하다가 안 믿어주면 옆에 사람한테 묻는다 이 말이오. 내 말 맞지? 이렇게 묻거나, 저 동네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오.

 

그러나 그것은 다소의 지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전도몽상이다, 이거야. ? 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의 얘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렇게 남의 지지를 얻어서 문제를 보려고 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왜 그런가 하고 살펴봐라 이거야. 정신을 좀 차려라 이 말이오. 정신을 차려서 왜 짜증이 나느냐? ? 짜증이 나느냐? 이렇게 살펴봐라. 그가 나를 짜증나게 했느냐? 그가 나를 짜증나게 했느냐? 그가 나를 어떻게 짜증나게 하드나?

 

그가 나를 짜증나게 했다고 하기 때문에 나의 인생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 세상이 나를 짜증나게 하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굴림을 받고 살아 갈 수밖에 없고. 나는 늘 나에게는 아무런 주체도 없다 이 말이야. ? 세상이 나를 짜증 안 나도록 해 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려야 된다. 그렇게 해 주지 못하면 이것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통하냐 이거야. 이런 데서 정말 그런가? 여지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고 다시 봐라 이거야. 그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짜증이 나느냐 이거야. 그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날씨가 덥기 때문에 짜증이 나느냐? ~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할 때는 날씨가 춥다고 짜증을 내지 아느냐? 날씨가 쨍쨍 내리쬐면 해수욕하기 좋다고 햇빛 나면 바다에 뛰어 나가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거 자체가 짜증 날 요인이냐? 아니다 이거요. 다만 그것은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런데 왜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짜증을 내느냐? 어떤 때는 안내고 또 어떤 때는 내느냐 이거야. 거기에 바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안 된다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그렇다 이 말이야.

 

그러면 네가 바라는 게 되야 되느냐? 네가 생각하는 게 옳으냐? 이 말이오. 어떻게 해서 옳으냐? 이거야. 이렇게 또 우리가 하나하나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해 들어가 본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은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게 아니구나.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기준을 잡느냐에 따라서 옳으니 그르니 하지. 사실은 어떠냐? 옳다 할 것도 없고 그르다 할 것도 없다. 다만 서로 생각이 다르다. 왜 다르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입력된 정보가 다르다 보니까 그렇게 다르게 느껴진다. 맨날 다르냐? 아니다.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그런데 왜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해서 상대편 생각도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거야. 그 말은 내 생각이 옳다 할 근거가 어디 있냐 이거야. 내 입장에 볼 때 옳지. 그냥 딱~ 보면. 옳다 할 게 뭐가 있느냐? 다만 다를 뿐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고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한 사람은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지 않느냐?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러면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없지 않느냐? 그렇다. 그러면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없다면 뭣 때문에 화가 나느냐? 이거야. 아 그럼 화 날 일이 없네. 당신 말대로라면 화날 일이 없네.

 

그러면 당신 말대로 하는데 내 말이 맞아? 틀려? 이렇게 다시 확인해 보면 아~ 화 낼 일이 없구나. 하나의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구나. 거 왜 화를 냈냐? 그 현상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고 한 생각을 일으켜서 내가 옳다고 모양을 짓고 옳은 거에 대해서 집착을 하니까. 바로 화가 났다 이거야. 그러니 본래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없다면 화날 일이 없다 이거야. 화가 나는데 낼 거냐? 말 거냐의 문제가 아니라 화가 나는 이유가 뭐냐 이거야.

 

이렇게 해서 점점 점점 살펴 들어가 보면 드러난 현상에 그 내면에 실제의 모습, 근본 뿌리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내가 짜증을 내든, 내가 짜증을 안내든, 참든, 또는 마음속에 짜증이 나든, 짜증이 안 나든 관계없이. 내가 그렇게 할 거냐 안 할 거냐는 놔두고. 그 자체는 어떠냐? 자체는 짜증날 일은 없다 이거야.

 

폭풍이 몰아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몰아치는 거고, 비가와도, 기온이 떨어져도, 기온이 높아도, 그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가도,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현상이 나타날 뿐이지 그것은 짜증이 나야 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꾸자꾸자꾸자꾸 문제의 근원을 자꾸 추적하고 추적하고 추적해 들어갔을 때 우리는 아~ 사실은 이렇구나. 사실은 이렇구나. 이렇게 확연하게 볼 수가 있게 된다. 이걸 뭐라 그러냐? 견도다. 이렇게 말해요.

 

사실이 그렇구나 하고 알면 단박에 딱! 그렇게 행동이 되는 사람이 있고, 사실은 그렇구나 하고 알게 되고 동의가 되도 실제 행동은 그렇게 안 될 수도 있고, 되고 안 되고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이 어떠냐? 이 얘기요. 그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거. 그것을 견도다 이렇게 말해. 그러니까 앞으로 공부를 할 때는 최소한도 어디까지는 돼야 된다? 견도는 열려야 돼. 견도가 여리면 어떠냐? 하고 못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 못하면 못하는 줄을 자기가 알고 있고, 지옥에 떨어져도 자기가 지옥에 떨어질 줄을 알고 있고, 죽을 때도 죽을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책을 세울 수가 있다. 억울해 하고 분해하고 이런 일은 없다 이 말이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갈지 오리무중이다. 내가 예측한대로 결과가 날지 안 날지 전혀 모른다. 최고로 좋은 결과를 예측해서, 보통은 실패를 해서 괴롭고. 그런데 만에 하나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그 성공이 도리어 가장 큰 고통의 씨앗이 될 때가 있다 이거야.

 

제가 알던 사람 중에 이런 분이 계세요. 아이가 대학 시험에 걸렸다고 좋아했어요. 떨어진 것보다 걸리는 게 좋죠. 그런데 대학에 가서 아이가 데모를 했어. 그래 감옥을 갔어. 대학에 떨어졌으면 그런 일이 생겼어 안 생겼어? 안 생겼죠. 걸린 게 좋아했지마는 걸린 게 화근이 됐다. 그래서 일심에서 징역 3년을 받았어. 그러니까 부모가 얼마나 걱정이야. 아이고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고 온 천지를 다니면서 석방운동을 했단 말이오. 빌고 빌었단 말이오. 그런데 이심에서 형량이 2년으로 떨어지면서 집행유예 3년이 떨어졌단 말이오. 그래 바로 석방이 됐어.

 

~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좋겠지. 그런데 나와서 2개월 만에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뭐라 그럴까? 나를 붙들고. 감옥에 놔 놨으면 안 죽었는데. 인생이 이런 거란 말이오. 그러니 그렇게 된 결과가 잘된 경우도 원하는 데로 안돼서 인생이 괴롭지만은. 그렇게 됐을 때도 그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지난번에 여기 제가 4분에서 얘기 할 때 미국에 아들이 가서 성공한 보살 얘기가 미국가면 모든 게 다 고는 끝나고 즐거움만 있을 거라고 생각 했지마는 진짜 괴로움은 언제부터 시작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때 가서 보면 앞에 괴로운 거는 괴로움 축에도 안 들어간다 이거야. 부모님에게 여러 가지 속박 받고 있던 처녀가 아이고 빨리 결혼을 해서 아버지 손에서 벗어 나와야 되겠다. 이래서 결혼을 한단 말이오. 이제 살았다 하지만은 남편 그늘에 살기가 더 어렵다 이거야. 아버지하고 관계는 그건 괴로움도 아니야. 아 정말 못살겠어. 그래서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참고참고참고 살았단 말이야. 그러다 애도 놓고 몇 년 살다가 도저히 못살겠다고 죽었으면 죽었지. 이래서 이혼을 했다 이 말이야. 살았다. 해서 살지만은. 애기하나 있는데 소송을 하고 난리를 피워 애기를 뺏어 자기가 키운다고. 애기 없으면 나는 못산다고. 그렇게 했는데. 애가 사춘기가 넘어가서 애 먹일 때보면 남편 애, 그건 애도 아니란 말이오.

 

고개 끄덕이는 사람 몇 사람 있네. 이 왜 지금 고개를 안 끄덕거리냐?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라서 그런 거요. 낮에 같으면 끄떡 끄덕 하는 사람이 천지란 말이오. 우리가 어떤 하나의 과정을 넘은 거 같지만. 그게 못돼서 괴롭기도 하지만은 잘돼도 그것이 큰 화의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모른다 이거야. 앞으로 어이 될지. 이렇게 사는 게 제일 사실은 불쌍한 거요. 지장보살처럼 아예 지옥에 가서 맨 날 살아도 그냥 지옥에 가는 줄도 알고, 지가 선택해서 지 할 일 있어 가서 앉아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야. 자전거를 자기가 좋아서 타라고 운동장에 내 보내 놓으면 자빠져서 무릎을 깨고도 그만 타라고 그래도 죽어 라고 또 기어 올라간단 말이오. 그러니 그건 왜 그러냐? 넘어질 줄 알고, 깨 질 줄 알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

 

그런데 다 좋을 줄 알고 생각을 하면 어떠냐? 그게 안 되도 괴롭지만은. 된 뒤에 좋아할 때도 그 다음이 바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거야. 이게 문제야. 한치 앞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다 지 뜻대로 잘 될 때는 제가 이런 얘기하면요, 멍하니 그럴까 이러죠. 직장이 영원할 줄 아는데 어느 날 아침에 턱 나가면 그만둬라 이래. 어느 날 아침에 마누라가 이혼하자 이래 나온단 말이오. 어느 날 아침에 자기 남편은 늘 착하기만 한 거 같은데 어느 날 아침에 연락 왔는데 보니, 살림 딴 데 차려놨단 말이오.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죠. 자기애는 학교 가서 늘 공부 잘하는데 알고 봤더니 살인사건을 저질러서 난리고 이렇단 말이오.

 

건강한 줄 알고. 턱 자신 있게 이러지만은 어는 날 아침에 병원에 가면 암이다 이래. 우리 안성의 거사님 어제 그저께 돌아가셨는데 두 달 전까지 멀쩡했어요. 군인출신이라서 떡 건강했다 이 말이오. 약간 무릎이 아프다 이랬지마는 그러다가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암 말기요. 수술이 불가능해. 전신이 다 퍼져있어. 병원에 가서 암이란 진단 받고 딱 두 달 만에 돌아가셨어. 암이라는 진단 받고 집에도 한 번 못 가보고, 암이란 진단받고 거기서 입원해서, 병원에서 그냥 죽었단 말이오.

 

그런데 뭐 큰소리칠게 있겠어요? 그렇게 탁 드러누워 있을 때도 옳은 게 있고 그런 게 있을까? 그래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오백만 원 시주를 했어. 우리 신도님 한 분한테. 자기는 평생 살아도 남한테 해는 안 끼쳤다고 자기가 자부하고 살았지마는. 자기가 한 번도 남에게 좋은 일을 안 해 봤다는 거요. 다 악착같이 내 살기 바빴지. 남 피해 끼치고 그렇게 살지는 않았어. 정직하게 살았지마는 그렇다고 내가 남한테 선뜻 다만 얼마라도 남을 위해 산다 이렇게 해 본적이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하니까. 부인한테 거사님 마지막 소원이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부인이 흔쾌히 인도 jets에다가 시주를 하라고 오백만 원을 줬어. 그러니 우리들의 생각은 믿을 게 못 되요. 아무리 결심을 하고 이럴 거라고 해도 상황이 딱 바뀌면 금방 바꿔버린다.

 

9-2.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우리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죠. 그런데 잘되든지 못되든지, 엎어지든 자빠지든지. 어떻게 될 줄은 알아야 된다. 어디로 갈지는 알고 가야 된다. 이짓하면 내 지옥갈 줄 알고 지옥을 가면 지옥가도 덜 억울하겠죠. 자긴 천당 가는 줄 알고 철척같이 믿고 떡 가보니까 지옥에 도착해 있으면 그것참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러니 최소한도 뭐는 열려야 된다고? 견도는 열려야 돼. 그러니까 해탈 완전히 무악도 까지는 못 이루더라도 목표가 견도는 열려야 된다 이 말이오.

 

관념에 휩싸여가지고 자기 생각에 빠져서 믿을 수 없는 그런 생각을 옳다고 고집하고 떵떵거리고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하루아침에 건강이 나빠지든지, 사업이 망하든지 인간관계 생각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든지. 뭔가 탁탁 생기면 다 이제까지 살아온 전체가 후회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제가 옛날에 어떤 학생이 내가 공부를 가르친 학생이 일반대학에 들어갔다가 휴학을 하고 다시 신부된데. 신학교간다고. 신부되는 건 좋은데 내가 두 가지 물어보겠다고. 첫째, 정말로 신이 있다고 갈려고 그러냐? 신이 있다고 갈려고 그러냐? 둘째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창조하느냐?

 

뭐 아무튼 어이되든지 딴 사람보다는 신부가 좋아 보이니까 하려고 그러냐? 그런 것 좀 분명히 해라. 신이 있다. 그러니까 갈려고 그런다하면 나중에 살다 신이 없다면 니 인생 어떻게 되겠냐? 그러니까 그런 조건은 그런 조건은 붙이지 마라. 위험하다 이 말이야. 별로 근거 없는 걸 무턱대고 조건 달고 가는 게 아니다 이거야. 그랬더니 카톨릭 집안 학생인데 자기가 이렇게 나이든 사람을 만나보니까 나이 든 사람들이 어지간한 사람들이 나이 든 뒤에 후회를 하더라는 거요.

 

돈 번 사람도, 또 뭐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도 뭐한 사람도 대부분 다 젊을 때는 자기 가는 길이 좋다 했지만, 나이 들어 가 인생이 죽을 때 다 되 가서 돌아볼 때. ~ 뭐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 인생이 이 길이 꼭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없는. 이거 말고 내가 다른 것 좀 하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갖는데. 자기가 신부님을 만나보니까 젊은 신부님들은 대게 헷갈려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데 늙은 신부님을 만나보니 나이 들어 어떻게 생각하냐. ‘내가 참 이 길을 잘 왔다.’ 이렇게 생각 하더라 이거야. 자기가 보기에.

 

그래서 내가 딴 거보다는 그게 늙어 후회를 덜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거요. 그래서 간다면 그건 괜찮겠다. 그러니까 뭘 엉터리를 알고 뭘 결정을 해서 하면 그게 나중에 바뀌어 버리면 큰일이란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조건을 달고 인생을 사는 건 위험해요.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너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러는데 내일 아침에 안하면 어떻게 할 거요?

 

견도가 열려야 되는데 견도는 스스로 보는 눈입니다. 눈을 감고 남 따라가지고 보는 게 아니고. 아는 게 아니고. 남에게 듣고 아는 게 아니라. 자기 눈이 탁 열려가지고 누가 뭐라 그래도 어떤 상황이 되든 이치는 제대로 안다 이거야. 사태 파악은 제대로 한다 이거야. 여기서 실천까지 다 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아는 게 곧 행으로, 지행이 합일이 될 수도 있고, 지행이 합일이 못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안목은 열려야 된다. 이게 견도다. 견도가 열리면 뭐가 되냐? 수다원이라 그래.

 

화날 일이 없다는 거를 확연히 자기가 알았다 이거야. 비록 금방 화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이야. 그럼 왜 그러냐? 화를 벌컥 내더라도 이것이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가 아니라. 내가 어리석어서 내가 미망에 가려서 내가 어쨌든 자기가 일으킨거다는 걸 알면 안 괴로우면 그냥 계속 화를 내고 살아도 되는데. 자기가 아니고 쓸데없는 짓이구나. 한다면 금방 그만 둬 버릴 수가 있다 이 말이야. 저 사람이 했다 이러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수다원은 이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난다.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길, 즉 이 흐르는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역류, 거슬러 올라가는 물결에 참여를 했다. 그래서 이름하기를 뭐라고 하냐? 입류. 성인의 흐름에, 성인의 길에, 해탈의 길에 나도 한 발 들여놨다. 예류. 거기에 참여했다 이거야. 예비자로 참여 했다 이거야. 그래서 입류 또는 예류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뭐라 고한다? 수다원 이렇게 말해. 이것이 성인의 첫 입문단계다. 입문했다. 해탈의 길에 입문을 했다. 이런 얘기요.

 

두 번째 사다함이다. 이 수다원은 입문은 했지만은 깜빡깜박해. 그냥 한 번 확 꿰뚫어 버렸으면 그거로 끝나버려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다. 깜빡깜빡해. 잠 깼다가 또 잠들고, 깼다 또 잠들고 이래. 정신을 차렸다가 또 전도몽상이 되었다 깼다가 말았다 하는데. 최소한도 뭘 해야 수다원이라 하느냐? 깨기는 깼는데 도로 깜박해서 잠들어버렸다. 이건 안 돼요. 다시 말하면 잠이 들더라도 금방 뭐 할 수는 있다? 깰 수가 있다. 미망에 휩싸이다가도 금방 아차 하고 돌아올 수가 있다. 이래야 바로 수다원이라 그래.

 

그러면 이 사람은 몇 번쯤 그렇게 확연하게 봤는데도 이렇게 잠시잠시 깜박깜박 할 수 있느냐? 그건 횟수를 말하지 않아. 다섯 번 그럴지, 열 번 그럴지, 오백 번 그럴지, 오만 번 그럴지. 아무튼 그는 오뚝이처럼 어떻게 한다? 제 자리에 돌아 올 수가 있다. 이거야. 부산 갈려고 차를 몰고 일단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했어. 시간이 걸리지 기다리기만 하면 가기는 간다. 이걸 뭐라 한다? 수다원 그래. 견도가 열렸다. 그러다가 그 다음부터는 자기에 무명 업식을. 다시 말하면 그 습기를. 안목은 열렸는데 아직 습기가 남아있어. 그 습기를 하나하나 닦아 나간다. 이 말이오. 이것을 뭐라 하느냐? 수도다 이렇게 말해요. 뭐라고? 수도. 닦는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닦아 나가면 내가 한번만 더 윤회의 세상,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죽으면 저 세상에 갔다가 이 세상에 한 번 더 온다 이거야.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그 다음에는 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 이거야. 거기까지를 뭐라고 한다? 사다함이다 이렇게 말해. 그래서 사다함을 뭐라고 번역한다? 일 왕래. 한 번 더 갔다 온다. 한 번 더 갔다 온다. 일 왕래다. 그러다가 점점 더 수행을 하면 이번에 생에서 끝나면 이번에 죽으면 이걸로 끝이다 이거야. 다시 가고 오고함이 없다. 이걸 뭐라 한다? 불환.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불환이라 그래. 이것을 아나함이라 그래. 이 생이 끝나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얘기겠죠.

 

그런데 이 생 끝나기 전에 지금 바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걸 뭐라고 한다? 아라한. 이렇게 말해.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다 소멸했다. 다 죽여 버렸다. 이 말이오. 그래서 뭐라고 한다? 살적이라 그래. 말이 좀 무섭죠. 한문으로 번역하면 살은 죽여 버린다는 뜻이고, 적은 도적놈을 다 죽여 버렸다. 이 말이오. 여섯 가지 도둑놈을 다 죽여 버렸다 이 말은 육근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 이런 얘기고. 또 번뇌의 도적을 다 죽여 버렸다. 이래서 살적.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마는 조금 살벌하죠. 그러니까 번역을 어떻게 하냐? 은공. 내가 누구로부터 어떤 공양을 받아도 번뇌의 찌꺼기가 남지 않아. 업이 남지를 않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응당히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 이래서 응공. 이렇게 말해.

 

그 다음에 그는 참사람이다. 진리를 본 사람이다 해서 진인 이렇게 번역하기도 하고. 그는 마땅히 진리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해서 응진 이렇게 번역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백아라한전. 아라한을 그냥 줄여서 오백나한전. 또는 뭐라고 한다? 응진전. 이렇게 쓰는 이유가 그렇다. 이거야.

 

자 이것을 생으로 얘기할거냐? 다생겁래로 윤회하는 것이 범부중생이고, 윤회전생은 하기는 하지만은 그는 이미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접어들었다 이거야. 운동장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애들은 넘어지기는 넘어지지만은. 그건 이미 며칠 지나면 뭐다? 탈거다 이게 확실합니까? 안합니까? 확실하지. 다섯 번 만에 탈지, 열 번 만에 탈지. 오십 번 만에 탈지. 그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그는 자전거를 탈거다. 무르팍이 좀 깨지고, 발목을 접쳐가면서 탈건지. 발가락 하나 안 다치고 탈건지. 좀 긁히고 탈건지. 그렇게 보면 차이가 있는 거 같지만은 그러나 그가 곧 자전거를 탈것이다 하는 데는 아무런 변화가 없단 말이오. 그것이 바로 뭐다? 수다원이란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이것을 한 생은 윤회할거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수행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겠냐? 그거는 바로 수행차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뭐다? 한 생이에요. 나고 죽는 것은 몸뚱이가 나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것이 한 생이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화를 한 번 벌컥 냈지만은 그냥 벌컥 내고도 너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으면 이건 범부 중생이고, 덜컥 내더라도 아이고 내가 또 미쳤구나. 이래서 탁 놔 버리면 흔적이 없어진다 이거야.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참으면 어때요? 찌꺼기가 쌓인다 이거야. 탁 놔버리는 것은 찌꺼기가 흔적이 없다 이 말이오.

 

이렇게 해서 흔적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수다원인데. 한 번 그렇게 벌컥 냈다가 아~ 이치를, ~ 이게 내가 정말 미쳤구나 하고 확실히 자각을 하면 다음에 한 번 만 그런 일이 더 일어나고는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런 반복을 안 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하고는 이 사람은 안할거나 하는 게 확실해진 단계까지 갔을 때 뭐라고 한다? 사다함이라 이래. 한 번 화를 벌컥 지금 내는 걸로 이걸로 두 번 다시는 안내. 한 번 더 내는 게 아니라 이걸로 끝이야. 아니구나 하면 이걸로 딱 끝나는 게 뭐다? 아나함이다 이 말이야. 아예 안 일어나는 게 뭐다? 아라한이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욕심을 냈다가 아이고 또 쓸데없는 거. 집착을 했다가 아이고 또 집착하구나. 이래서 탁 탁 놔버리는 게 수다원이라면 수다원은 앞으로 이런 걸 반복을 얼마나 할지 모른다 이 말이야. 그러나 나는 왜 이리 반복할까? 이렇게 자기를 보면서 후회하면 이건 아직 수다원이 멀었어. 수다원은 왜냐하면 일어나더라도 탁 놔버리기 때문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이 말이오. 그러나 더 정진을 해 가면 바로 사다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걸 반복하는 게 아니라. 딱 어느 수준까지 자각을 하게 되면, 딱 하면 한 번 더 되풀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안한다 이거야. 어리석은 짓을 세 번 네 번 반복 안하고. 딱 한 번만 더하고는 끝난다. 이 말이오.

 

그 다음에 딱 이번으로 딱 이걸로 끝나지. 그걸 두 번 다시 되풀이, 한 번 더 되풀이 안하다. 이게 아나함이다. 지금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욕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뭐라고 한다? 아라한이다. 이런 입장이 지금 어디서 가르치는 거라고? 소승에서 가르치는 거다. 소승의 수행을 정검해 가는 또 수행 계위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이걸 대승에서 볼 때는 어떠냐 이거야. 지금 제법이 공하다 하는 이런 차원에서 봤을 때 이게 문제가 있다 이런 얘기요.

 

여기 부처님께서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깨달으신 법이라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 할 것도 없고, 구제중생이라 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가 사실은 그런 얘기에요. 부처부처하지만은 이것이 부처다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법을 얻었다 도를 었다 하지만은 얻었다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했다 하지만은 이게 법이다 할 것도 없고, 부처가 중생을 구제했다 하지만은 실로는 한 중생도 얻은바가, 구제된 중생이 없다 이거야. 지금까지 온 얘기가 그런 거란 말이오.

 

그러니 수보리가 그 얘기를 듣고 동의를 하면서도 마지막에 여기 8분이 지나면서 어떤 의심이 들었냐? 그러면 자기와 자기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뭐였어요? 성문사과 중에 하나씩은 다 얻은 사람들 아니오. 그죠? 대부분이 아라한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아나함이든지, 사다함이든지, 수다원은 되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러면 이건 뭐냐 이거야. 얻을 도가 없는 거라면 여기서 다 깨달음을 얻어서 이렇게 다 앉아 있는데.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도대체 이건 뭐냐 이거야. 얻을 바가 없다면, 얻을 바가 없다면, 그럼 이건 뭐냐 이거야.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때 수보리가 얻을 바가 없다면서 이 사람들은 뭐냐 이거야. 이 사람들은 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데 이 사람들은 뭐냐?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런 의심을 딱 내니까. 부처님이 이런 의심을 내서. 수보리가 부처님 그러면 이거 깨달음을 얻었다 얻었다 하는데. 그럼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얻었습니까? 요렇게 물으면 부처님이 대답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금강경은 늘. 그 부처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쪽은 깨닫고, 그 깨달음에 기초해서 또 망상을 또 일으킨다 이 말이오. 그렇다면 늘 조건이 붙는 거요. 수보리 사고방식에. 그냥 탁 버리지를 못하고. 그래 소승이라 그러지. 그렇다면 요건 왜 이렇습니까? 요렇게 또 의심을 일으킨단 말이오.

 

그래 이 부처님이 그 의심을 일으켜서 수보리가 질문하기 전에 그 의심을 내자마자 부처님이 질문을 수보리한테 바로 해 버린단 말이오. 그럼 질문을 딱 받는 순간 자기가 또 뭐에요? 아이고 또 망념을 피웠구나. 이렇게 퍼뜩 돌아간다 이 말이오. 질문을 받는 순간에. 그거는 기다 아니다 이래 들어서. 아 그렇습니까하고 믿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질문을 탁 하는 순간에 자기가 아차 잘못 생각했구나. 이런 케이스란 말이오. 납득이 잘 안가요?

 

그러면 지난번에 내가 제 얘기를 하나 했죠. 제가 큰 스님이 ~ 니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서 활동을 해라.” 이렇게 말할 때, 제 생각은 이거죠. 머리털에 도가 있어? 없어? 없지. 머리털에 도가 없는데 뭘 새삼스럽게 머리를 깎고 기르고 뭘 그걸 갖고 머리를 깎아라 마라 할 게 뭐가 있으며. 또 안팎이 둘이 없는데 뭘 또 안에 들어오라. 밖에서 이제 그만 했으니 안에 들어오라 그럴게 뭐가 있느냐? 이거야. 다 형편 따라 되는대로 살면 되지. 내가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질문을 했단 말이오. 질문을 한 게 아니라 대답을 했단 말이오.

 

밖에서 활동하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활동해라. 도가 어디 안팎이 있습니까? 안팎이 없지. 안팎이 없는데 뭣 때문에 또 새삼스럽게 들어올 건 뭐가 있습니까? 그럼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나에게 뭐가 지금 어떤 상이 있어요? 머리 깎을 필요가 없다. 승단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는 고집이 있단 말이오. 그런데 나는 그걸 고집이라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죠. 나는 오히려 승단에 들어와야 된다는 그런 고집을 뭐한다? 뛰어 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나는. 지금 스님이 뭐라고 생각한다? 뭘 중이라는 거에 집착을 해서 또 깎아야 된다. 또 승단에 집착을 해서 들어와야 된다. 그건 도가 아니지 않냐 이 말이오.

 

그러니 하시는 말씀이 도가 본래 안팎이 없지. 네가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지 않느냐? 그럴 때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다는 걸 그때 자각을 했단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구나. 안팎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구나. 내가 밖을 고집하니까 그걸 버리라고 무슨 말이 나온다? 안에 들어오라 이런 말이 생긴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고 하기 전에 그 문답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이오. 자기의 무지를 발견한다. 이거야. 화를 벌컥 내면서 자기를 돌아본다 이거야. 저 새끼 죽여 버려야지 하다가 자기 속에 있는 악심을 자기가 보게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러니까 이래라. 이해는 안 되지만 뭐 시키니까 해야지 뭐. 죽으나 사나. 이걸 여러분들이 믿는다. 이렇게 생각해. 그렇지가 않다 이거야. 늘 자기 속에서 자각이 돼야 되. 자기 상태를 자기가 자각이 돼야 된단 말이오. “너 어리석잖나?” 이랬을 때, “아 내가 어리석구나.”를 자각하든지. 너 똑똑다 하는데 자기가 똑똑다 하는데 좋아서 입이 해 벌어지다가. 아이고 내가 놀아나구나를 자각을 하든지. 자기가 자기상태에 대해서 자각이 돼야. 그걸 뭐라고 한다? 적어도 깨달음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알든지. 자기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인 줄을 알든지. 자기가 어떤 상태인줄, 현재 있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줄을 보지 못하다가. 아이고 이렇게 자각이 돼야 된단 말이야.

 

그러니 수보리가 부처님의 애기를 듣고. 그러면 우리가 다 깨달았다고 그러잖아요. 부처님께서 부처님 말씀 듣고 공부해서 우리 다 깨달아서 뭐라고 이름을 얻었어요? 아라한이라고 이름을 얻었잖아 그죠? 그런데 얻을 것이 없다니? 그러니까 부처님이 물었단 말이오. 수보리 어이운하. 수보리야 뜻이 어떠냐? 네 생각이 어떠냐 이 말이죠? 수다원능작시면 아득수다원과부. 수다원이 난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 이런 생각을 나느냐? 이 말이오. 그러자 수보리가 정신이 번쩍 들었단 말이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함은 내가 얻었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 건 뭐요? 상이란 말이오. . 아시겠어요?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라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이미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거란 말이오. 그건 수다원을 얻은 거요? 못 얻은 거요? 아직 못 얻었다 이 말이오.

 

노예가 노예의 상태에 있을 때, 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 그게 원이다 이 말이오. 그러나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서 괴롭다 이거야. 그래서 그 상태를 벗어나면 너무 기쁘다 이거야. 그래서 길거리 다니면서 아~ 나는 오늘부터 노예에서 해방됐다. 나는 오늘부터 노예에서 해방됐다하고 외치고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 그래요? ~ 저놈 노예였구나. 다 안단 말이에요. 자유인은 내가 자유인이다. 이런 생각 안한단 말이오. 그런 생각 안하고 있단 말이오. 여기 법문 잘 듣고, 깨 있는 사람은 졸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 아무도 안한단 말이오. 졸지 말아야지 하는 거는 굉장히 열심히 잘 하는 거 같지만은 지금 뭐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 졸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 여성 불자들이 여성의 해방을 얘기할 때 과거에는 이러한 제도와 여러 가지 관습에 베어서 여러분들이 속박을 받았다 이거야. 그게 지난 20세기, 지난 100년 동안에 그 모든 관습이 외부적인 모든 죄악에서 이제 벗어났다 이거야. 거의. 그러나 여러분들의 내면에 있는 소위 의지심, 노예근성. 이거는 안 없어졌다 이 말이오. 그게 남아 있다 이 말이오. 그게 남아 있는 한은 그건 완전한 아직도 자유로이 길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거야. 그게 뭐냐? 여자라고 하는 거. 나는 여자다. 여자다 하는 것이 남아있는 한은 대등하게 될 수가 없어요. 여자다. 여자다 하는 게 뭐요? 의지심이란 말이오. 여자여자여자가 여자할 때 그게 대표적인 게 나는 여자다 하는 게 의지심이다 이 말이오. 나는 여자니까 남자가 나를 뭐해줘야 된다? 보호해줘야 된다.

 

그런데 여자가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은. 이 여자다 하는 이 의지심하고, 몸뚱이에 대한 여러분들에 집착하고 두 가지가 벗어나지 않으면, 부처될 생각은 아예 말아야 되. 아시겠어요? 몸뚱이 손만 탁 건드려서 어어~ 이러잖아. 그래서 어떻게 해탈을 하겠어. 이게 내 몸을 청정히 지키는 거다 하지만은. 이미 내 몸은 더러워질 수가 있다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이 몸이 더러워 질 수도 있고, 깨끗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망념이란 말이오. 이 몸은 더러워 질 수도 없고 깨끗해 질 수도 없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 여기로부터 여러분들이 엄마로서의 아이에 대한 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자는 여자인데. 육체는 여자인데. 여러분들이 남자에 대비한 여자가 아니고, 아이에 대비한 엄마 할 때 엄마는 아이에 대한 의지심이 있어요? 없어요? 없단 말이오. 두 번째 엄마로서 아이를 대할 때 아이에게 젓꼭지 물려놓고 다니잖아 그죠? 그건 성추행이오 그게? 아니죠.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여자라는 건 여자 육신을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몸뚱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여자라고 하는 그 마음, 그 생각이 문제란 말이오. 그것은 곧 종속성을 상징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엄마 같은 마음이 되면 여러분들은 해탈의 길이 열리지만은. 여자의 속성으로는 해탈의 길이 안 돼. 그래서 여자 불성불론이 나온단 말이오. 여자는 뭐 할 수가 없다? 성불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죽어서 뭐 돼야 성불한다? 남자 돼야 성불한다. 이 말을 나중에 법화경에서는 변성성불, 남자 몸으로 변해서 성불을 한다. 이것은 꼭 죽어서가 아니라. 몸이 이 세상에서 바뀐다 할 때. 육체가 바뀐다는 얘기가, 성형수술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여자의 의지심, 이 집착을 놓이고 남자와 같은. 이때는 남자는 육체의 어떤 남자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장부로서의 전환해야 된다. 장부로 전환해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유마경에 가면 어때요? 아예 변성성불도 아니고 그냥 즉신성불이요. 그냥 그대로.

 

그런데 왜 성불을 할 수 있다면 왜 몸을 그렇게 안 바꾸냐? 이러니까 천녀가 그랬죠. 몸을 바꿀 이유가 뭐가 있냐? 이거야. 몸에 무슨 죄가 있냐? 이거야. 몸이 무슨 문제가 있냐? 이거야. 깨달음의 마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에요. 남자네 하는 우월의식이나, 여자네 하는 열등의식을 다 떠나야 해탈의 길이 열린다. 내가 남자네 하는 우월의식을 갖게 되면 그건 남자도 죽어도 성불 못하죠. ? 그것은 여러분들은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잖아. 여러분들은 여자네 해서 지금 어려운 시기에 그것 때문에 괴로운 사람도 있죠.

 

남자네 이래서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같이 의논해서 야~ 나 직장 그만 뒀는데. 어떻게 살지? 좀 줄여서 살자든지, 같이 벌어먹고 살자든지 이렇게 의논하면 되는데. 그래도 불알 찼다고 남자네. 직장 그만둔 주제에 직장 그만뒀다는 소리도 안하고, 고민 있어도 고민 얘기도 안하고, 혼자서 끙끙대고,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죠. 그게 책임의식인거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거야. 남자네 해서 남자가 웃기는 사람들 많아요. 그런 것부터, 또 뭐 부부관계나 이런데도 늘 어떤 무슨 뭐라나? 강박관념을 갖고 있죠.

 

그래서 이 성 4030대 넘어가면서 발기부전증, 이런 전부 질병이 다 정신적 강박관념에서 온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서로가 손해란 말이오. 여자가 의지심 없어지고 남자가 잘난척 하는 게 없어져 버리면 친구처럼 서로 의논하고, 서로 돕고, 억압도 안 되고, 짐도 안 되고, 좋잖아요. 그런데 공연히 한쪽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공연히 한쪽은 뭐하고? 억압받고 이래서 산단 말이오. 어리석은 얘기요. 그래서 수행을 해서 억압받는 것도 버려야 돼. 의지심도 버려버려야 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태도도 놔버려야 돼. 그래야 서로가 잘살아 갈 수가 있죠.

 

9-3.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그러니까 내가 자유인이 됐다.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에는 그것은 아직도 겉으로는 벗어났는지 몰라도 아직도 내면의 상태는 완전한 자유인이 안됐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도 노예의 찌꺼기가 뭐하다? 남아있다 이런 얘기요. 누구나 다 알 수 있단 말이오. 저 노예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거를.

 

그런데 누가 묻기를 당신 노예요 자유인이요? 여러분에게 당신 노예요? 자유인이요?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한다? 자유인이오.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죠. 누가 묻는데도 아이고 나는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분별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요. 흘러가는 물은 누구 거니? 이러면 누구 것도 아닙니다 이래. 그래서 내 한 숟가락 먹어도 좋아? 이러면. 내게 아니라서 당신 먹으라 마라 소리 못하겠습니다. 이래.

 

이게 말이 안 돼는 얘기를 그래 한단 말이오. ? 아직도 누구의 것이라는 생각을 잡고 있다는 그게 흔적이거든요. 흔적. 자기는 버린 거 같지만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 말이오. 찌꺼기가. 그러니까 그건 아직도 탁 놔 버린 상태가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수다원과를 얻었다. 수다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 내가, 나는 이 정도 했으니 수다원은 됐고. 요렇게 생각 하느냐? 이 말이오. 그 이 수보리가 금방 알아듣고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그 이름이, 이름이 성인의 유에 들었다라는 이름이지. 실지는 들고 안 들고 할 게 없다. 든바가 없다 이런 얘기요.

 

이무소입시명수다원 든바가 없기에. 들어간 바가 없기에 그 이름이 수다원입니다. 이렇게 하고 끝내면 되요. 사실은 불입색성향미촉법. 이거는 괄호 쳐서 빼버려도 되는 말인데. 인제 든바가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다시 얘기하면 색성향미촉법에 든바가 없다 이 말이 뭐요?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 이 말이오. 어떤 상도 짓지 않는다. 이런 얘기죠. 다만 그 이름이 뭐다? 수다원이다.

 

수보리어의운하. 수보리야 뜻이 어떠하냐?

사다함능작시념아득사다함과부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수보리언불야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사다함명일왕래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사다함이다 하는 사다함하는 말은 한 번 갔다 온다라는 이름이로되. 그런 뜻이로되. 실로는 오고감이 없다 이거야. ? 사바세계가 있고, 저쪽 정토세계가 있고. 이렇게 두 가지 세계가 나누어져있으면 갈일도 있고, 올 일도 있겠죠. 그죠? 그러나 상이 떨어지면 이거니 저거니 하는 상이 허물어져 버리면, 둘이 아닌 세계란 말이오. 그러니까 오고갈게 없단 말이오. 깨달음의 세계는. 실로는 오고감이 없을 새 그 이름을 사다함이라고 하나이다.

 

수보리어의운하오 저 뜻이 어떠하냐?

아나함능작시념득아나함과부 아나함이 능이 이러한 생각을 하느냐?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말이야.

수보리언불야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오.

하이고아나함명위불래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이 올 바가 없다. 올 바가 없다. 다시 오지 않는다. 이런 이름이로되. 실로는 올 바가 없다라고도 할것이 없다 이런 얘기요. 오지 않는다 할 것도 없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나함이라 하나이다.

 

수보리어의운하.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 작시념아득아라한도부.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내느냐?

수보리언불야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실무유법명아라한. 왜냐하면 정자는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됩니다. 실로는 사실은 이 말이오. 사실은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해진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뭐라 한다? 아라한이라고 한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고 하니까. 아라한이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없는데 아라한이 뭘 깨닫겠어요? 뭘 얻겠어요? 그죠? 얻은바가 없어야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한다.

 

결국은 내 얘기에서 뭘 말하는 거요? 수다원이니 사다함이니 아나함이니, 아라한이니 하는 것도 다 뭐다? 깨달았다 하는 하나의 상이다 이거야. 아시겠어요? 깨달았다 하는 상이다. 그러니까 그것도 하나의 상이다 이 말이오. 하나의 상도 지으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여기서 벌써 몇 가지 상을 벌려 놨다? 4가지 상이나 벌려 놨으니 4가지 상을 벌렸다하더라도 다 요점은 상을 지었다는 거요? 안 지었다는 거요? 상을 지었다. 이거요.

 

사실은 깨달음의 상태는 어떤 상도 짓지 않는다. 이 말이오. 어떤 상도 짓지 않는다. 그러니 저들이 참으로 아라한이라면 그들은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한다. 그냥 이름하여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렇게 부른다 이거요. 그래 이제 자기 얘기를 하죠. 자기가 다 알아 들었으니까. 탁 한 질문에 딱 깨지면서 알아차렸으니까 대답이 그다음에 술술술 나오죠.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세존이시여, 만약에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말이오.

我得阿羅漢道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한 것이 됩니다. 이런 얘기요.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라고 그런 생각을 내게 되면 곧 아상인상중생수자상에 집착한 것이니 곧 뭐다? 보살이 아니다. 이 말이오. 보살이 아니다는 것은 아라한과에 도달했다는 거요 못 했다는 거요? 못했다는 걸 말하는 거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건 다 따옴표 안에 사실 한글로 치면 따옴표 안에 들어가야 되는 거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제가, 아는 수보리에요. 제가 무쟁삼매,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最爲第一 제일, 제 일 번째 사람이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거요? 부처님께서. 누구보고? 수보리보고 이 말이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하고 따움표하고 제가 내가 말이오.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가운데 제 일번이다. , 제가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 일인자다라고 누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이오.

 

무쟁삼매가 뭘까요? 무쟁삼매는 다툼이 없는 삼매. 다툼이 없는 고요한 경지다 이런 얘기에요. 비유를 들어서 말한다면 옛날에 우리 산 얘기 할 때로 돌아가 봅시다. 딴 비유들면 여러분들이 자꾸 헷갈리니까. ~ 서쪽에 사는 사람은 동산이라 그러고.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 그래요. 그러면 동산이다 하는 사람도 동산이라고 하는 상을 짓고, 서산이다 하는 사람도 서산이라고 하는 상을 짓고 있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상을 짓기 때문에 거기 집착을 해서 동산이다 서산이다하고 다툰다 이거요. 그럴 때 어떤 사람이 그건 동산이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여기서 누가 동산이다 하니 동산이 아니다 이 말은 상이 비상이다 이 말이죠. 서산이다 하니 서산이 아니라고 했단 말이오.

 

그런데 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고 하는 이것에 대해서 상을 짓는단 말이오. ~ 이 산 이름은 동산이라는 것도 정답이 아니고. 서산이라는 것도 정답이 아니고.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게 이 산의 진짜 이름이구나. 이렇게 정답을 만든다 이 말이오. 이게 상을 짓는 거에요. 이렇게 상을 지으면 어떻게 되느냐?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동산이라고 한 사람과 다툰다 이 말이오. 그 동산 아니야. 그럼 뭔데?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야.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다툰단 말이오. 뭔데?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야.

 

누가 남산이다 하면 다툰단 말이오. 그거 아니야. 뭔데?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렇게 대답한다. 이건 다툼이 생긴다. 그런데 그 상의 실체가 없음을, 공함을 깨친 사람은 누가 동산이다 해도 어때요? 그냥 그 사람이 서쪽에 사니까 그가 그렇게 부르니까 그렇게 부른다 이거야. 동산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지만은 그는 서쪽에 사니까 그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는 거요. 그렇게 이름하는 거요. ~ 그래. 동산에서 아무 다툼이 없이 넘어갔는데. 누가 서산이라 해도 넘어가고. 누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해도 그냥 다툼 없이 넘어 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상도 짓지 않아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러분들이 다 자기에게만 향해서 들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딴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돼요. 내가 상을 짓지 마라 하니까. 내가 상을 안 지어야 된다 이 말이야. 또 보고, ~ 내가 또 상을 지었구나. 이렇게 해서 자기에게 하면 이 법은 그대로 해탈의 법을 나아가는데. 여러분들이 남을 떡 쳐다보면서 짜식~ 상을 짓지 마라는데. 저 놈의 새끼 또 상을 짓네.

 

이렇게 보면 남을 보고 무슨 하는 마음이 생긴다? 시비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러면 이것은 수행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절대 수행은 남에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거요. 이것은 하나의 역할일 뿐이지. 이것은 수행은 체크를 할 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공부가 끝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잣대를. 그러니까 자기 생각으로 잣대를 갖고 남에게 요구를 하다가. 자기 잣대를 대면 시비가 일어나니까.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와서 잣대를 재서 남을 시비를 한단 말이오. 이게 법집이란 말이오.

 

그러니 법집은 훌륭한 게 아니에요. 아집이든 법집이든 집착이기는 똑같고, 아상이든 법상이든 상은 똑같은 상일뿐이다 이 말이오. 어떤 사람이 다리를 쭉 빼고 두드리면서 운단 말이오. 아이고 아이고 나이가 50이나 된 게 돈도 못 벌고 이런 사람이나, 아이고 다리를 죽 뻗고 아이고 내가 출가한지 30년이 돼서 아직도 도도 못 통하고 이러면, 돈도 못 벌고 하는 사람은 참~ 중생이고, 도도 못 통하고 이런 사람은 아따 참 수행력이 굉장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어차피 다 욕심에 사로잡혀서 뭘 얻으려고 하는 데서, 얻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고뇌일 뿐이다. 이거야.

 

그러니 그것이 무엇에 집착하든지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똑같다. 무슨 꿈을 꾸든지. 남을 도와주는 꿈을 꾸든지. 보살 꿈을 꾸든지. 부처 꿈을 꾸든지, 악몽을 꾸든지, 사람 죽이는 꿈을 꾸든지. 깨어있는 사람이 볼 때는 다 뭐다? 잠꼬대다 이 거요. ~ 무슨 꿈을 꾸니까 저건 좋은 거구나. 이런 게 없단 말이야. 다만 잠꼬대 일 뿐이란 말이오. 그냥 꿈꾸고 있을 뿐이란 말이오. 헛거다 이 말이오. 헛건데 뭐, 헛거라면서 또 좋은 거 나쁜 거를 따져요.

 

그러니까 꿈꾸고 깨가지고 꿈이구나. 이러면서 와가지고. 이거 좋은 꿈이요? 나쁜 꿈이요? 이래. 그건 나는 이해가 잘 안 돼. 이해가 잘 안되면 누구 손해다? 내 손해지. 그러니 딱 깨자마자 아이고 꿈이구나. 이러고 끝나야 된다 이거야. 아이고 꿈이구나 이렇게 하고 끝이 나야 된다. ~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가운데 제일이다.

 

是第一離欲阿羅漢 이것이 제일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세존이시여, 제가 이런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뭐라고? 내가 욕심 떠난 아라한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내가 욕심 떠난 아라한이다. 나는 욕심을 다 떠난, 욕심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아라한이다. 이런 생각을 내지 않는다. 누가 그렇다는 거요? 수보리가. 그러니 수보리보고 부처님이 뭐라 그런다고? 수보리는 욕심 떠난 제일아라한이다.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이오.

 

世尊 我若作是念 세존이시여, 만약에 제가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我得阿羅漢道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라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世尊 則不說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 세존께서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以須菩提實無所行 그런데 사실은 이 수보리가 사실은 무소행이다 이 말이야. 한 바가 없다 이 말이야. 나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라고 하는. 나는 뭔가 아란나행을 행하는 자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여기서 한바가 없다. 행을 뭐냐? 아란나행이란 말이오. 아란나 행을 행한바가 없을새.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라고 이름한다. 그렇게 불린다. 이 말이오. 여기서 아라한이라는 말이 있고, 아란나라는 말이 있어요. 혼돈하시면 안 되요. 아라한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라는 성인의 이름가운데 하나고, 아란나라는 말은 숲이라는 뜻입니다. . 아란나 행이라 그러면 숲속에서 고요히 수행하는 자를, 수행하는, 숲속에서 조용히 수행하는 것을 무슨 행이라고 한다? 아란나행이라 그렇게 부르는 거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돈도 모으고, 권력도 쥐고, 명예도 얻고, 결혼해서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고, 자식을 두고, 부모를 두고, 형제를 두고, 친척을 두고. 이렇게 살아야 편안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 이게 잘 사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다보면 그 돈 때문에 괴롭고, 그 권력 때문에 괴롭고, 그 명예 때문에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고. 남편과 아내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자식 때문에 괴롭고, 부모 때문에 괴롭고, 형제 때문에 괴롭고. 온갖 일 때문에 인생에 괴로움이 생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버려버려요. 돈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지위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부모도 다 버려버리고, 홀로 숲속에 딱 들어가서. 나무그늘에 앉아서 비록 돼지죽보다도 못한 그런 밥을 얻어먹고, 다 떨어진 옷 입고 나무 밑에서 이슬을 피하고 잠을 자도. 아무런 부러울 게 없고, 바라는 게 없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이고 마누라도 귀찮고, 자식도 싫고, 남편도 싫고, 부모도 상관없고, 돈도 재물도 다 싫다 이거야. 나는 오히려 그런 거해서 머리 아프다. 그래서 나는 딱 숲에서 앉아 고요히 명상하는 거. 이게 난 좋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이 말이야. 아라한이.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사람은 아라한이 못 된다 이 말이오. ? 이런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조건이 변해서 누군가가 국왕이 숲속에 있는 사람을 멱살을 잡고, 끄집어내서 강제로 결혼을 시키든, 저자에 갖다 버려버리든지. 강제 노동을 시키든지. 무슨 일이 탁 갑자기 일어난다 이거야. ? 생각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할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이 사람 괴롭겠어요? 안 괴롭겠어요? 그러니까 아라한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느냐? 그런 세상 사람이 다 세속에 물들어서 그렇게 살아가지만은. 그런 모든 것에서 떠나서 숲속에서 고요히 정진하기를 즐긴다는 것은 일체의 집착을 떠났다는 말이오. 다시 말하면 그는 숲속에 있어야 된다는 집착도 떠났다 이런 얘기요. 그러기 때문에 그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가 않다 이 말이오. 집에 있으면 여러 가지 편리한 시설이 있어 좋고. 저 산에 가면 맑은 공기, 별도 보고, 이래서 좋다 이거야.

 

돈이 있으면 보시 할 수 있어서 좋고, 돈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다. 사람들이 많은데 오면 포교할 수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귀찮지 않아서 좋다 이거야. 일체처 일체시에 걸림이 없어야 뭐라고 한다?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 이렇게 말한다는 거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야 그가 숲속에서 고요히 수행하기를 즐기는 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거야. 그런데 소승은 세속을 부정하고 나는 이런 건 더러운 세상이야. 나는 숲속에 가서 고요히 정진하고 살아야 돼. 이런 걸로 갖고 해탈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택도 없는 소리다. 지금 대승불교에서 그렇게 비판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런 거는 해탈한 게 아니다 이거요. 그것은 이미 승속을 나누고, 세간과 출세간을 나눠서 어느 한쪽에 갇혀 있는 수준이다. 일체의 분별을 떠나야, 어떤 상도 짓지 말아야 뭐다? 그게 진정한 해탈이다. 이렇게 지금 비판하고 있는 거요. 그것이 정말 아라한이라면 모든 상을 떠나야 된다 이거야. 그가 정말 깨달은 자라면 나는 깨달았다 하는 이런 생각이 없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또 여러분들은 또 저 사람 깨달았나? 못 깨달았나? 기준을 가서. 당신 깨달았소? 못 깨달았소? 물어보고, 깨달았다하면 에이 니는 못 깨달았구나. ~ 이런 척도로 이걸 가지고 적용을 하면 적용하는 사람이 잘못됐다. 이건 자기 마음에 그렇다는, 자기가 도를 얻었구나. 이제는 끄떡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병들이 더러 있거든요.

 

이렇게 대중에게 설법하고 대중과 같이 사는 스님 중에 예를 들어서, ~ 나는 출가해서 성불하려고 출가를 했는데 이렇게 신도들한테 포교나 하고 교화나 하고 이렇게 같이 살려고 출가를 한 게 아니고. 사실 나는 탁 해탈하려고 출가를 했다 이거야. 그런데 이렇게 묶어서 늘 대중한테 묶여서 이렇게 사니. 참 내가 한심하다. 그러니 빨리 이걸 버리고 가가지고 참선을 목숨 걸고 해서 해탈해야 되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래도 내가 내 자신공부를 위해서는 3개월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고 또 중생들을 위해서 3개월 나와서 교화도 하고 이래야지. 이렇게 말 하거나.

 

선방에서 탁 참선을 하면서도 아이고 이거 내가 만날 밥이나 축내고 이래 있어야 되겠냐? 나아가지고 나도 대중들한테 온갖 봉사를 좀 해서 보살행도 좀 닦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거나 하면 다 이건 공부가 모지란다 이 말이오. 아직도 뭘 이분법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이오. 이분법으로. 공부라는 것은 상을 지을  바로 상이 상인 줄 알고 탁 깨는 게 공부요. 그러니까 그것만 잘 지키면 어디를 가도 공부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 자빠지면 자빠지는 데로 공부가 되고, 엎어지면 엎어지는 데로 공부가 되고, 칭찬 받으면 칭찬 받는 속에서 공부가 되고, 비난 받으면 비난 받는데서 공부가 되고, 배고프면 배고픈데서 공부가 되고, 배부르면 배부른데서 공부가 되고. 그냥 공부가 다 된다 이거야.

 

그런데 어떤 것이 공부다 하고 상을 짓게 되면 이미 공부하고는 십만팔천리로 떨어져 버린다 이거야.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왜 공부가 안되느냐? 여러분들은 자기 직위나, 자기가 남자네 하거나, 자기 직장의 직위를 가지고 직업을 갖고 자기로 삼거나. 아시겠어요? 뭐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자기를 삼아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진척이 없는 거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자기가 순간순간 아이고 내가 또 이렇게 사로잡히구나. 내가 또 열등의식에 또는 우월의식에 또는 이름에 각각이 자기가 그 허깨비같은 거를 자기로 삼는 거를 자기가 지켜보고 놓아 나간다면 바로 공부는 금방금방 진척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도 금강경 읽으면서 일체의 상을 버리는 것이 상을 짓지 않는 것이. 이것이 최고의 공덕이 되는 거고, 이 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거보다 더 공덕이 크고.

 

이걸 여러분들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서 설해주라. 이러면 한량없는 공덕이 서리라. 이러니까 공덕에 딱 집착을 해서 어때요. 어떻게? 밥도 안 먹고 금강경만 읽어. 남 참선할 때도 같이 참선하고, 남 염불할 때 같이 염불하고, 남 일할 때 같이 일하라고 가르치는 내용인데. 뭐한다? 나는 그런 거 안 해. 나는 포교 같은 거, 보시 같은 거 필요 없어. ?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게 이게 최상의 공덕이라고 그러지 않았냐? 이래가지고 금강경병에 또 걸린단 말이오.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죠? 우리는 늘 내용하고 상관없는 일을 한단 말이오. 상을 지어가지고. 공부를.

 

이렇게 부처님께서 苦口丁寧고구정녕하게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수보리가 부처님 아무 말씀도 안하셨죠? 몇 번 물어본 거 밖에 없잖아 그죠? 그 이게 참 중요한 거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많은 말을 해서 듣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몇 번 물어볼 때 자기가 준비된 사람은 물어보는 말에 깨닫는 거요. 묻는 말에. 자기가 의심을 하니 부처님이 질문을 하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이럴 때 아차 아니구나. 이렇게 묻는 말에 자기가 자각하고 깨달은 바를 다시 얘기를 한단 말이오.

 

얘기를 하면 부처님께서 침묵을 하셔. 아무 대답이 없으면 뭐라고? 다 이 말이오. 됐다 이 말이고. 부처님께서 문제가 있다 싶으면 뭐라고 한다? 또 질문을 한다. 이 말이오. 엉뚱 얘기를 하면 부처님이 물어보는 거요. 그러니까 그 다음 장에도 넘어가면 똑같이 얘기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런 대화 속에서 수보리가 또 자기가 대답하면서 또 의심을 하는 거요. 그럼 그건 뭘까? 이렇게 의심을 한단 말이오. 여기에 있는 성문들은 다 얻었다 하는 생각을 하면 그게 잘못됐다. 그건 이해가 됐어. 그 수준 이하라는 걸 알게 됐어.

 

그런데 여기 있는 성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처님은 그러면 과거 연등불전에서 수기를 받았다 하는데 그건 무슨 소리인고? 이렇게 또 생각에 의심이 들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또 묻죠. 내가 과거 연등불전에서 수기를 받은 바가 있느냐? 하니까 또 수보리가 아차~ 해서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오. 하고 또 얘기를 한단 말이오. 진행과정이.

 

그러니까 여기서, 이 글에서 제 9분에서 핵심요지는? 뭐라고요?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깨달았다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되지만은 못 깨달았다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형상도 짓지 마라 이거야. 사람이 술을 먹고 헬렐레 거리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긴다. 그래서 야야~ 술을 먹지 마라. 이랬단 말이야. 야야~ 해탈하겠다는 애가 어떻게 술로 부터도 못 벗어나서 술의 노예가 돼서 네가 무슨 해탈을 하려고 그러냐? 네가 적어도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술을 먹지 마라. 이랬단 말이오.

 

그러니까 또 술을 안 먹는 상을 지었단 말이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너 왜 술 먹니? 임마. 수행자가. 술 먹으면 해탈 못 한다 그랬어. 부처님이. 이래서 또 시비하러 다닌단 말이오. 다만 자기가 듣고 그렇게 행하라. 다만 자기가 듣고 그렇게 행하면 그대로 공덕이 된다. 그걸 갖고 남에게 적용하면 또 시비가 된다. 그러면 술 안 먹는 것으로 그는 뭘 삼는다? 수행을 삼는다. 어떻게 해탈의 길이 술 안 먹는다고 해탈 할 수 있겠어? 어떻게 해탈의 길이 술고 안 먹는 거에 따로 있겠어. 이 말이야.

 

술 안 먹는 것으로 또 상을 지어서 또 집착을 한다 이거야. 그러니 술을 먹는 것으로 상을 지으면 술 없다고 시비를 하고. 술 안 먹는 것으로 상을 지으면 술 있다고 시비를 한다. 어떤 상도 짓지 않으면 어떠냐? 술이 있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다. 이런 얘기요. 그것이 무상, 상을 짓지 마라. 상을 짓지 않으면 뭐할 것도 없다? 집착할 것도 없죠. 그러니 집착하지 마라. 이렇게 주로 초점이 맞춰서 가르칠 때가 있고, 금강경에서는 아예 상 자체를 짓지 마라. 이랬어. 상을 짓지 않으면 집착 할 바 없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죠.

 

그런데 다음에 우리가 배울 육조혜능대사의 선문답에서는 상을 짓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건 뭐한다? 망념을 일으키지 마라. 망념을 일으켜서 뭘 짓는다? 상을 짓고, 상에 집착을 하니. 망념을 일으키지 마라 이거야. 한 생각도 내지 마라. 이러잖아요. 한 생각도 내지마라 그러면 아무 생각 하지 마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바로 망념인 줄 알아버려라 이거야. 상도 짓기 전에. 그 상이라는 것이 다 망념을 일으켜서 짓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가르침은 무념으로 종을 삼고. 이렇게 말하는 거요.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용을 삼는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일상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이라는 것은 뭐다? 상을 짓지 않음이다. 상 없음이다. 한 몸이다 하는 것은 한 몸이라고 하는 상도 짓지 말라. 이런 얘기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