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依法出生分 의법출생분. 모든 과거의 부처님과 보살이 불보살이 이 법에 의지하여. 이 법이라는 게 뭐요? 무유정법이라는 거요. 이 법에 의지하여 출생했다. 탄생했다. 이 말이오. 반야심경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과거의 모든 보살과 과거의 모든 부처가 반야바라밀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뭐다? 모든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나오죠? 그 반야, 깨달음이라는 게 뭐요? 훤하게 비춰보는 그 깨달음은 곧 제법이 공한 것을 깨닫는 거죠. 그러니까 이 게 같은 말이라는 거요. 여기서는 무유정법. 이 정함이 있음이 없는 무유정법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뜻이 어떠하냐?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삼천 대천 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이용보시. 보시하게 되면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이 사람이 얻은바 복덕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삼천대천세계가 뭔지 알아요? 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을 세계라 그래. 제일 적은걸 뭐라고 한다. 그랬어요? 티끌, 미진이라 하고 제일 큰 거를 세계가 그래. 세계보다 더 큰 것은 경험의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경험의 세계에서 가장 큰 거를 뭐라고 하니까? 세계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경험의 밖에 더 넓은 우주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천개모여서 이루어진 세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천 개나 있다. 이 말이야. 이것을 소천세계라 그러고. 그런 천 개의 세계가 또 천 개 있고 천 개가 있다. 이것을 중천세계라 하고. 이런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가 있다. 이것을 대천세계다 이렇게 말하니. 대천세계는 세계가 한량없이 많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대천세계를 천이 세 번 반복이 됐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다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이오.
이 삼천대천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웠다 이 말은. 칠보라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거죠. 금이나 은이나 옥이나 이런 것 7가지를 칠보라 그러잖아 그죠? 그러니까 칠보는 가장 귀한 거라는 것은 적어도 값이 많이 나간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런 값진 것을 또 삼천대천세계에다 가득히 채웠으니까 질이 아주 값진 거에다가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그 전체의 값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행한다. 이걸 남을 준다 이 말이오. 그럼 공덕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얻은 복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많겠죠.
須菩提言甚多世尊 수보리 말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하오면
是福德卽非福德性是故如來說福德多 이 복덕이 곧 복덕이라 할 성품이 아닐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랬어.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을새. 복덕이 많단다. 이런 얘기요.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이거요.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이 복덕이 복덕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아닐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복덕이 많다고 한다 이거야.
若復有人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於此經中 이 경 가운데에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수지는 받아 지닌다. 받는다는 것은 법문을 딱 듣고 아~ 옳거니! 맞아! 이렇게 탁 받아들인다 이거요. 지니는 거는 그때만 옳거니 하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걸 계속 가슴속에 세기고 있는 게 지니는 거요. 이 경 가운데에 사구게 등을. 즉 이 경전을 다하면 더 좋고. 뭐를? 사구게만이라도 이 말이오. 사구게가 뭐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죠. 이 사구게 등을 받아 지녀. 위타인설. 남을 위하여 연설하여 주면.
其福勝彼 그 복은 저 복보다. 저 복은 앞에 거를 말하는 거요. 저 보다 더 성하다. 저가 뭐에요? 삼천대천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워 남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보다 더 공덕이 크다. 이 말이오.
何以故須菩提 하이고 어찌한 까닭이냐 수보리야
一切諸佛及諸佛阿뇩多羅三약三菩提法皆從此經出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 경을 따라 놔왔느니라.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최상의 법이라는 것이 다 어디를 쫒아서 나왔다고? 이 경을 쫓아서 나왔다. 그러니 이 경의 가르침은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으신 법에 어머니와 같다 이거야. 여기로부터 다 나오게 됐다 이거야. 그러니 이 경을 수지 독송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거고. 부처의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거다. 그러니 어찌 저 유루복인 칠보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과 비교를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須菩提所謂佛法者卽非佛法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불법이 아니다. 불법, 이것이 불법이다 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이것이 불법이다라고 정하면 상을 지으면 이미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상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정해진 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자 어떤 사람이요. 부모가 야단을 치는데 꾹 참고 받아들였어. 부모님의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는데도 아이고 부모님이니까 내가 어떻게. 하고 꾹 참고 받아 들였단 말이야. 그걸 보고 사람들은 뭐라 그래요? 아이고 효자다. 잘도 참는다. 잘도 참아. 잘도 참는다. 잘도 참아. 어떻게 저렇게 잘도 참을꼬. 나 같으면 못 참을 텐데. 이렇게 말한다 말이오. 이렇게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은 사실은 참으로 참는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 이것은 언젠가 터진다. 이거야.
그런데 부모님 말씀을 들으면, 무슨 얘기를 해도 부모님 말씀을 들으면 내 마음이 어떠냐? 아이고 옳거니, 옳거니. 그래야 되겠네. 그러는 게 좋겠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 말씀이 틀렸다 이런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떨까? 참을 것이 있어요? 없어요? 참을 것이 없지. 그럼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있는 사람이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잘 참아요. 진짜 참는다라고 하려면 참을 것이 없어야 되요.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은 그건 진짜 참는다고 할게 못 되요.
그러니 복덕이라 할 것이 있어서 그것을 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다 적다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야. 복이라고 할 것이 없어. 왜 복이라고 할 것이 없을까? 본질로 돌아가면요 이 세상에 천하 만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도 아닙니까? 누구의 것도 아니지. 무소유란 말이오. 누구의 것도 아니야.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주더라도 그게 공덕이 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깨달음의 세계에서 그건 공덕이 안 돼. 그러니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라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준다 하더라도 본래 이 물건이 누구의 것도 아닌 줄을 알면 아무런 공덕을 지은 바가 없어. 그러니 이것이 복이다 할 성품은 없는 거요. 본래는. 다만 이름하여 뭐라 한다? 복덕이 있다. 복덕이 많다. 이렇게 이름 할 뿐이다.
어찌한 까닭이냐? 이 복덕이 곧 복덕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없을 새.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복덕이 많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이 사구게를 수지독송위타인설한다는 건 이 사구게를 받아들인다는 건 뭘 말해요? 이 세상, 일체의 존재에 성품이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그걸 깨쳐버린 사람이오. 즉 제법이 공함을 깨달은 거다. 사구게를 받아 지녔다 이 말 자체가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뭐했다? 깨달았다 이 말이오. 내가 그걸 깨닫고 또 남에게 연설했다는 말은 뭐요? 남도 깨닫게 했다 이 거야.
그 공덕은 바로 어떤 모양 지어지고 형상 지어진 그런 복하고는 비교가 될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유루복은 많다고 하지만은 무루 복하고는 비교가 될 수가 없고. 그 무루복은 중생의 소견으로 볼 때는 뭐다? 복이라 할 것이 있는 것 같지만은 사실은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는 복이라 할 것이 없어. 그러나 다만 부처님께서 뭐 한다? 이름하여 복이라고 한다. 이거야.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있어요? 없어요?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옳고 그른 게 없죠. 다만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상황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잠시 잠시 번갯불처럼 나타나요? 안 나타나요? 나타나지. 그러니까 옳고 그르다 할 본래의 성품이 본래 없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옳고 그른 것이 나타나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때그때 이름 하여 옳다. 그르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으신 그 법이 다 이 도리로부터 나왔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이 불법이다 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이 말이오.
우리 흥부 놀부 얘기 한 번 보세요. 자~ 제비 다리가 딱 부러졌죠. 불쌍하죠. 그래서 치료를 해 줬어. 그랬더니 박씨를 하나 물어다 줬단 말이오. 그래 심었더니 박 바가지에서 온갖 보물이 나왔어. 놀부가 그걸 딱 보고 아 고거 괜찮다 싶었어. 그래 자기 따라 했죠. 했어요? 안 했어요? 고대로 따라 했어. 그런데 제비 다리가 부러진 게 없어서 하나를 부러뜨렸어. 그래 자기도 똑같이 매어서 날려 보내고, 씨 하나 받아서 심었는데. 박이 똑같이 열렸는데 깨보니까 엉뚱하게 나왔단 말이오.
그러니 여기에 핵심이 뭐요? 흥부는 바라는 마음이 없었지. 다만 제비다리 부러진 거를 보고 자비심을 냈죠. 아무런 바라는 게 없었단 말이오. 그러니 한량없는 공덕이 돌아왔고. 놀부는 바라는 마음을 내서 바라는 마음을 냈죠. 돈에 집착을 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바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흥부를 본받았다 이거야. 이름 안 쓰고 무기명으로 복 지으면 뭐에요? 아무 복 더 받는다 하니까. 자기도 고대로 따라 했단 말이오. 왜? 많이 받으려고. 아시겠어요? 제비 살려주면 뭐 한다고? 복 받는다 이래서 자기도 살려 줬단 말이오. 기어이 부러뜨렸단 말이오. 그러니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이렇게 되는 거요.
이게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거야. 거기에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흉내 내잖아. 끊임없이 그 바라는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돈 벌려고 하다가, 권력 잡으려고 하다가, 명예 얻으려고 하다가, 그게 안 채워지니까 에라 모르겠다. 도 닦자. 이렇게 자꾸 얻으려는 마음이 이동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공하다 해도 어때요? 또 공한 상을 탁 만들고 상을 늘 짓기 때문에. 그래서 우린 지금 마음가짐이 심보가 뭐 같다? 놀부 같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리 흥부 흉내를 내도 결과는 내 안 돼. 마음을 흥부같이 써야 된단 말이오. 흥부같이 쓴다는 게 뭐냐? 바라는 마음이 없는 거다. 이런 얘기요.
//1800
부설거사 들어봤어요? 예. 부설거사 하면 역시 마찬가지인데. 부설거사 수행을 보면 말이오. 이 분은 원래 수행자였어요. 출가한 스님이었어요. 그래 세 사람이 이 수행자 세 사람이 열심히 도반끼리 공부를 하다가 정말 우리 용맹정진 한 번 하자. 이래서 깊은 산속으로 인적이 없는 데로 들어갔단 말이오. 들어가다가 마지막 마을. 그 이상은 가면 뭐가 없다? 사람이 없어요.
그 마지막 마을에 도착을 했어. 그래서 거기 그 촌장 집에 잤는데. 마침 그 거사가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 이었어요. 그래서 밤에 와서 법을 묻고 스님들이 대답을 하고 너무너무 기뻐서 갈려는 스님들을 잡고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해서 자기 불법에 대한 공부를 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집 딸이 있었는데 딸도 어때요? 공부를 같이 곁에서 들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중에서 이 부설거사의 법문은 너무나 조리가 있고 깊이가 있고 좋아서 그 딸이 반해버렸어.
이제 이렇게 며칠을 잡혀 있다 보니까 이래서는 안 되죠. 그래서 잡는 걸 놔두고 간다 하고 갔단 말이오. 그런데 이 딸이 상사병이 걸린 거요. 그래서 몸져누워서 이 스님이 가면 자긴 목 메달아 죽겠다 했단 말이야. 그러니 이 거사가 제발 비는 거요. 외동딸인데 죽이면 안 된다고. 제발 좀 살려 달라 라고. 그러나 출가한 스님들이 뭐 부모도 버리고 온 사람들이 그런 거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 그죠? 간다.
그런데 그때 이 스님이 생각했단 말이야. 옛날에 부처님은 전생에 호랑이 새끼들 죽어가는 거 살리려고 어떻게 했다? 자기 몸을 새끼 밥을 줬다. 이런 거 나오죠. 또 비둘기가 쫓겨 가니까 매에게 자디 허벅지 살을 베어 줬다. 이런 얘기 나오잖아. 그죠?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그 몸을 양식으로 만들고 약을 만들어서 구호를 한다. 그렇게 하는데 나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을 죽게 만들고 내가 어떻게 보살행을 할 수 있겠느냐? 보살행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대승의 큰 깨달음을 얻겠느냐? 그래서 우선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 되겠다. 이래서 거기에 남았단 말이야.
그래서 두 친구들이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여기까지 와서 여자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렇게 해서 밀고 당기다가 에이고 너 타락해서 안 되겠다고. 그래 둘 이는 갔단 말이오. 그래 두 분 스님은 산속에 가서 오랫동안 정진을 하고 이 부설거사는 이 처녀하고 결혼을 해서 서당선생을 하면서 애 낳고 거기서 농사짓고 살았단 말이오. 낮에 가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밥 먹고 자려면 부인이 그래요. 여보, 당신은 목숨을 걸고 수행한다. 그래 놓고 자면 어떡하냐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는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을 만남으로 해서 자기는 뭐했다 생각한다? 수행을 포기했죠. 에이고 뭐 끝나 버렸다. 이게 우리 중생 마음이란 말이오. 한 번 결심을 딱 했으면 엎어지든 자빠지든 지속을 해야 되는데 이게 경계 따라 틀어진 거죠. 그러니까 여인을 만난 건 만난 거고, 공부는 공부고. 이렇게 나가야 되는데. 여인을 만남으로 해서 공부는 끝나 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걸 누가 깨우쳐 주느냐? 여인이 깨우쳐 준단 말이오.
당신 훌륭한 수행자라서 결혼을 했고, 당신한테 반했지. 수행 포기하고 범부로 사는 남자를 내가 뭣 때문에 좋아하겠느냐는 거요. 여기서 크게 깨달은 거죠. 그래서 일하고 들어와서도 탁 용맹정진을 했단 말이오. 그래 그 삼 년이 지나서 그 스님들이 내려왔단 말이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이고 이놈의 새끼 결혼해서 애나 낳고 완전히 중생 속에 물이 들었겠지. 우리 가서 좀 놀려 주고 가자. 이래. 그래 떡 내려와서 방문을 했단 말이오. 그래 얘기를 다하면 길어지니까. 도 술 내기를 해단 말이야. 그런데 누가 이겼겠어? 예. 부설거사가 이겼겠죠.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이 사로잡히면 안 돼. 한 생각을 잘 못쓰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런데 감옥에 떡 있어보면 제가 옛날에 법회하고 다닐 때는 소원이 세끼 밥 먹는 거 하고, 잠 한번 실컷 자는 거였어요. 하도 온 천지를 차를 타고 다니니까. ‘아이고 나도 언제 한 번 세끼 밥 다 찾아 먹고 잠이나 한 번 푹 자 볼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 쉬운 거 같은데 그걸 못하고 헤매고 다녔단 말이오.
그런데 어쩌다가 감옥을 가게 됐어. 그런데 여기야 말로 세끼 밥을 먹기 싫어도 꼬박꼬박 시간 마쳐 들어오고. 잠을 안 잘라 그래도 어쩔 수 없도록 10시에 불을 꺼버리고 6시에 불을 켜고. 8시간 자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일주일인가 한 열흘 지나니까요. 몸무게가 5키로 불읍시다. 얼마나 편했든지. 남은 고생이라지만 나는. 그랬는데 행복했느냐? 이거야. 그 소원성취를 했는데. 행복하지가 안았어요.
그러니 못 먹을 때는 먹으면 행복할거 같고, 못 입을 때는 입으면 행복할 거 같고, 잠 못 잘 때는 잠만 자면 소원이 없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 지는 게 아니에요. 좀 못 먹고 좀 못 입고 잠 좀 못 자고 해도 사람은 역시 자기가 세운 원을 쫓아서 인간이 움직일 때 그 때 생에 보람이 있는 거요. 그런데 제가 절에 들어와서 물론 입고 먹고 자는 거 크게 많이 걸리지는 않았지마는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많이 놔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거 아니다 이거야. 오히려 제가 입맛 같은 게 까다로운 편이에요. 그런데 인도에 가서 아무거나 잘 먹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다 나보고 그래요. 아 ~스님은 인도 체질인가 봐. 그래요. 전 사실은 빵도 한 조각 안 먹는 사람이오. 밥하고 김치밖에 안 먹는 완전 토착인데. 거기 가면 거기대로 살아야죠. 아무거나. 그러니까 그게 다른 사람이 생각하듯이 체질이 그게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주는 대로 먹는 거요.
그런데 ‘여려 개 있는 중에 골라 먹어라.’ 그러면 누가 빵 먹겠어? 밥 먹겠지. 빵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먹어야 되죠. 그런데 그런 먹는 걸 갖고 먹는 것 때문에 못 견디겠다. 어떻겠다. 저떻겠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요. 여기 우리 jts에 파견 간 어떤 보살이 한 사람 있어. 내가 가면 어렵다 그러면 저는 괜찮아요. 군대에서 훈련을 받아서 여군 출신인데. 그래 갔는데 열흘 만에 나가 버렸다는 거요. 왜?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거요? 이렇게 먹고는 못산다는 거요. 그런데 잘 먹고 살 수가 없어요. 우선 잘 먹어 봤자지만 그 가난한 거지동네에서 봉사하면서 잘 먹으면 그 동네 사람하고 융화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 돼.
학교에 수많은 가난한 애들이 오는데. 아이들까지 맛을 음식을 다 맛이게 해 주면. 게들은 학교 음식에 맛 들여 놓으면 집에 가서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면 애들은 형편없이 주고 자기만 따로 해 먹을 수가 없죠.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면 거기는 인도사람이고 나는 한국 사람이지 않느냐? 예.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동사섭이 안 되는 거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걔들은 날 때부터 그래 먹었으니 되고. 우리는 잘 먹었으니까 잘 먹어야 되지 않냐? 이게 부자 논리란 말이오. 가난한 사람의 논리를 보면 우리는 이제까지 못 먹었으니 앞으로 잘 먹어야 되고, 너는 이제까지 잘 먹었으니 좀 못 먹어도 되지 않냐? 이렇게 논리를 세우면 논리가 되요? 안 돼요? 된단 말이오.
그런 데서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공부라는 건 꼭 책만 보고 하는 게 공부가 아니란 말이오. 어떤 자기가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으로부터 자각하는 거요. 그러니 옛 선사들이 깨달았거나 이런 분들의 얘기 속에서 쭉~ 보면 다 자기가 크게 잘못했거나, 자기가 쥐가 쥐약을 먹듯이 어리석게 군것을 돌이켜서 깨닫고 자기를 본다. 이 말이오. 그때. 원효대사도 아침에 해골바가지 물보고 구역질을 했으니 잘한 거요? 잘못한 거요? 잘못한 거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해골바가지 물 담긴 거 보고 구역질을 뭣 때문에 해? 그러나 그런 구역질을 함으로서 도리어 깨우쳤단 말이오. 아~ 어제는 그렇게 맛있더니, 똑같은 물인데. 아~ 이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구나. 이렇게.
내가 그렇게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겠다고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해 놓고. 금방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시키는 대로 안 하죠. 그렇게 계율 지키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난리를 펴놓고는, 여자가 아니라고 실망을 한단 말이오. 다 자기 식대로 생각한단 말이오. 우리는. 이것이 일체유심조라. 그런대도 늘 뭐라고 생각하느냐? 바깥이, 남이,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문제를 삼는다 이거요.
남 탓하려면 끝이 없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도 한 번 보세요. 남한 사람은 북한 탓하고, 북한 사람은 남한 탓하고 그러죠?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노동자는 정부나 기업 탓하고, 정부나 기업은 노동자 탓하고. 남자는 여자 탓하고 남자는 여자 탓하고. 젊은 애들은 어른 탓하고 어른은 애 탓하고, 선생은 학생 탓하고 학생은 선생 탓하고. 신도님들은 늘 입만 띄면 스님들 탓하고,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기독교처럼 보시도 잘 안하고, 조직도 안 되고, 봉사도 안하고, 스님들한테 물어봐라. 신도들에 대해서 불만이 얼마나 많은지. 신도들한테 물어보면 스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어요. 이게 다 뭐냐?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도리를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 하는 것은 얼마나 이 습관이 오래 배어 있나 하면요.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런 가르침을 공부 하면서도 이게 또 뭐가 된다? 분별의 잣대가 되죠. 부처님이 요렇게 살라 했는데 스님들은 왜 요렇게 삽니까? 요기 요렇게 하지 마라 그랬는데 왜 저 사람은 요렇게 합니까?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누구에게만 향해야 된다. 그랬어요? 오직 자기에게로만 향해야 된다. 자기에게로 향해서 보면 다 온갖 것들이 다 해결이 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무궁무진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건데. 이 잣대를 자기에게 적용을 안 하고 자꾸 남에게 적용을 한다 이거야. 대화를 한 번 해 봐요. 다 남에게 적용하지. 자기가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참회하고, 자기가 욕심 내는 걸 보는걸 보면서 남 욕심 내는 걸 이해하고, 남 욕심 내는 걸 보고서 욕심을 안내야 되겠다고 자기가 뉘우치고 이러면. 부닥치는 것마다 다 공부거리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자기는 욕심내면서 남 욕심 내는 거 비난하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남보고 정직하라 그러면서 자기는 정직하지 않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세상살이 속에서 배우는 게 없다 이거야. 그러니 우리가 불보살은 인연을 따라서 늘 화현하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이웃 사람 중에도 불보살이 화현해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왜? 불보살이 불보살이라는 간판 걸고 나옵니까? 아니겠죠. 그런데 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튀어야 된다 이거야.
내 눈이 맑아지면 세상이 다 불 보살로 보인다. 그러잖아요. 그 불 보살로 보일 때 내가 공부가 되는 거요. 이거도 문제고 저거도 문제고, 이것도 문제고 저거도 문제고. 이런 한은 뭐다? 공부는 멀었다. 이거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공부가 돼 있는지 안 돼 있는지 점검은 간단하다니까. 여러분하고 같이 사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지느냐? 그걸 갖고 뭘 해라? 수행을 점검해라. 스님한테 와서 제 공부가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이렇게 물을 필요가 없어.
저는 어떻게 여러분이 자꾸 물으면 대답해 줄 수 있느냐? 남편 데리고 오시오. 내가 남편한테 요새 보살 어때요? 요새 많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아~ 공부가 좀 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뭐 좀 좋아진 거 같더니 도로아미타불이에요. 으름. 그럼 또 안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할 만큼. 자신이 변해야 되는 거요. 아직도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가 병들어요? 자기가 병들어요. 이걸 확실히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여러분도 행복하고 불법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거야.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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