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하루] 무시받는 느낌이 들 때 화가 올라옵니다. (2024.02.24.)

Buddhastudy 2024. 3. 7. 19:58

 

지난 1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저 스스로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기쁘고

반대로 무시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순간적으로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늘 존중받으면서 살아왔다 보니까

무시받는 느낌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시받는 느낌이 화로 옮겨지는 것을 계속 관찰하다 보니까

화가 폭력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정진을 꾸준히 해야겠지만

어떻게 하면 화를 표출하지 않고 내면에서 소화할 수 있을지

좀 더 분명하게 관점을 잡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순간 화가 올라올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말이나 행동이 폭력적으로 나올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하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화를 하다가 자기가 무시받는다고 느껴서 화를 내며 말을 험하게 내뱉으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무시받는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시 상대방에게 강하게 전달이 되면

상대방 또한 굉장히 무시받았다고 느껴서

결국 오해가 증폭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다른 사람과 부딪힐 때 상대방과 소통이 안 되고

오히려 충돌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외국이나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을 하게 되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 처할 때는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수행적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진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무를 맡을 때 가능하면

그런 환경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조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업식이나 성격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자극이 강하게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정도로 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위험에 대해서 우선 본인이 자각을 해야 하고

앞으로도 항상 주의를 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오해가 생기면 그걸 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이야기해서 안 풀린다고 꽁해서 지내기보다는

3자를 통해서 푼다든지 해서

오해를 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해를 푸는 과정이 없이 꽁한 상태로 계속 지내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됩니다.

결국 자신의 상처로 남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다시 격렬하게 반응을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위험을 감지하고 있으면 충돌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타인을 무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그 사람의 버릇이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의 태도가 그렇게 습관으로 형성된 겁니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모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무시받은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으로부터 한 번도 하대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시받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시받는 느낌이 들 때는

지금 내 까르마가 반응하는 것이지 상대가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내 업식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상대를 탓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감정이 올라올 때

이건 내 까르마가 반응하는 것이다하고 자각하는 것이

감정을 진정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닙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 일어나는 것은 상대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낄 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감정이 일어날 때

상대는 그냥 자기 습관대로 말하고 행동할 뿐인데,

내 까르마가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이렇게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설령 반응을 하더라도 폭력적으로 나가는 걸 막아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나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는

실제 상대방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상대가 나를 인정한다고 내가 느끼면 좋은 감정이 일어나고

상대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내가 느끼면

나쁜 감정이 일어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칭찬보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대부분 무엇을 더 챙겨야 한다고 지적을 하기가 쉽지

칭찬하는 말은 잘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여기에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무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칭찬이나 지적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일을 같이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칭찬이나 지적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칭찬이나 지적에 본인이 구애를 받지 않으면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구애를 받으면 늘 상대에게 매여서 살아야 합니다.

상대가 칭찬을 해주면 입이 벌어지고, 지적을 해주면 입이 비뚤어진다면

늘 상대만 바라보고 사는 종속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업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칭찬에 구애받는 건

사실 스스로 자유인이 되는 데 있어서는 장애 요인입니다.

그렇다고 칭찬을 받을 때 기분이 나빠야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기분이 좋아지더라도 그 맛에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분 좋음에 취하게 되면

내 존재가 상대방의 칭찬에 종속되는 존재가 됩니다.

그건 상대방에게 내 목줄을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내 삶의 희로애락을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늘 자각을 해야 하고

상대방의 비난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늘 자각을 해야 합니다.

까르마가 있기 때문에 칭찬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거기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수고했다는 말을 안 해줘서

섭섭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상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살펴서 칭찬을 해주면 좋지만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심리가 불안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심리가 불안하기 때문에 좋은 말을 바라는 거거든요.

 

저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이유는 심리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을 내고

칭찬을 안 해주면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겁니다.

심리가 불안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게 됩니다.

 

질문자도 우선 내가 그런 까르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감하게 반응을 할 때마다

, 이건 내 까르마의 문제다이렇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 까르마의 문제로 자각을 하면

상대방에게 차츰 덜 얽매이게 됩니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은

곧 상대방에게 묶여서 살아가는 겁니다.

꾸준히 자각하면

미워하거나 화가 나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나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내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

수행자인 내가 가져야 할 관점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위해서는

그 사람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고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고생한 걸 아무도 안 알아줄 때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고생하는 걸 누군가가 알아주면

힘든 감정이 아주 많이 해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해외 오지에 파견을 가서 근무하거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에는

자기가 고생을 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서울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활동을 할 때는

옆에 있는 도반들이라도 서로 알아주니까 괜찮은데

오지에 나가서 활동할 때는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법사님이나 도반들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알아주면

그 사람에게는 굉장한 힘이 되고 용기가 됩니다.

특히 법사가 된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을 살펴서 노고를 알아주는 게 매우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면서도

내가 남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입니다.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걸 살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법사가 되면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이 활동을 하면서 갖는 불만들은

대부분 업무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알아주지 않아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감정이 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잘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법사님들은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줘서 갈등을 풀 때

훨씬 빠르고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알아준다는 게 꼭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느라 수고한 분의 노고를 알아주라는 거예요.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직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아내한테

오늘 설거지도 하고, 깨끗하게 집 청소도 했네.

오늘 하루 종일 수고가 많았어

이렇게 알아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천지 차이입니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겉으로는 표가 안 납니다.

그래도 아내가 수고한 것을 알아주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들어오면

내가 집에 있는 동안 혼자 밖에 나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이렇게 알아주는 게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상대를 알아주는 게 세상살이에서는 중요합니다.

 

수행공동체가 이런 부분에서는 조금 건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공동체에서는 늘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칭찬에 구애받지 말라,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기 마음을 다스려라하는 가르침을 늘 듣다 보니까

남에게도 칭찬을 안 하게 되는 거죠.

이런 가르침은 모두 자기한테만 적용해야지 남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자꾸 남에게 적용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누가 힘들어해도

수행자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특히 몸이 아프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는

수행공동체의 이런 분위기 때문에 실제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