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심이 작으면 깨달음도 작아.
근데 의심이 많으면 깨달음도 커요.
그래서 자기가 정말 궁금했던 사람은 한 번 깨달을 때 다시는 안 까먹어.
근데 궁금한 게 별로 미적미적한 사람은 알아도 또 금방 까먹어버려.
그래서 옛날 분들은 공부시킬 때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키우는 게 중요했어요.
안 까먹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3년 동안 물 떠오기 했어.
‘도가 뭡니까?’ 물으면
‘가서 물 떠와’ 그랬어요.
그런데 이것이 또 답이기도 해요.
‘물 떠와’ 지금 이해되세요?
‘물 떠와’ 하는 게 자기의 의식을 보여준 거고
그 사람이 가서 물 떠오는 그게 뭐예요?
답이야 답.
그런데 상대방은 못 알아들어
그러니까 계속 ‘물도 와’, ‘나무 해’ 하고
이렇게 답은 알려줘도 본인이 못 알아듣는다, 이거야.
근데 쉽게 안 알려 준다.
이거라고 안 알려 준다.
지금은 바겐세일 시대라서 그냥 막 풀어줘, 그냥 공짜로 막 줘.
근데 시대가 변해서, 시대가 변했어요.
변해서 빨리 깨닫는 게 중요해.
그 뒤가 또 오래 걸리기 때문에 빨리 깨달아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물 떠오고 나무하는 것이
이거지요?
근데 3년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다시 물어도 ‘나무 해와’ ‘물 떠와’ 이러면
3년간 복월이 차겠어요, 안 차겠어요?
그러면 이 의문이 꽉 차오른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끝까지 차오를 때 톡 건드리면 터져요.
그렇게 깨닫게 하면
그 깨달음이 아주 골수에 사무쳐서 다시는 잊지 않는다.
돈오점수 돈오돈수, 혜안 법안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이 의식을 깨닫는 거
자기 의식을 깨닫는 거
견성
자기 본질인 이 의식을
‘아, 이거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견성
이게 혜안이에요.
그러면 혜안을 떠서 이제부터 수행이 시작이 돼.
그다음 수행은 뭐냐?
중요해요.
공부가 두 단계가 있어요.
-하나는 하루빨리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의 본질을 확인하는 작업
견성
‘아, 내가 의식이 나구나.’
지금까지는 이 몸을 나라고 했는데.
몸을 나라고 하면
나의 키는 얼마예요?
1한 70쯤 돼요.
의식이 나일 때는 나의 키가 얼마예요?
끝이 없죠.
이렇게 내가 확장되는 것
이게 돈오, 혹은 견성이라면
이렇게 해서 공부가 시작이 된다.
어떻게 시작되는가?
여러분, 의식을 한 번 확인해도
아직도 나는 옛날에 나야.
몸을 나라고 하던 그 습관이 여전히 있어서
나는 나고, 의식은 의식이에요.
아직 따로 놀아.
그러면 몸을 나라고 하던 데서
의식이 나인 것으로 옮겨가야 하잖아요.
그래야 공부가 완성이 되잖아요.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이것이.
그러니까 이렇게 옮겨가는
옮겨가는 데 방해하는 게 뭐냐?
예전의 나를 나라고 하는 것.
예전의 나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께서 제가 첫 시간에
이 깜깜한 방에 여러분 가둬버리면
다 사라지는데, 자기는 남아.
자기 존재라는 것이 남아.
자기가 있다는 사실은 남아요.
이해되나요?
다 사라져도 깜깜하니까
자기 손도 안 보여, 자기 몸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안 보이지만 자기는 있어.
자기가 의식이죠.
그래서 이렇게 의식을 발견을 하는데
문제는 옛날 습관이 여전히 강하다.
옛날 습관의 핵심은 이거예요.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집착]이에요.
현상에 대한 집착.
여러분 현상에 대한 집착이 지금 여러분한테 있어요. 없어요?
아무리 ‘의식이 나구나’ 하는 걸 깨달아도
이 현상에 대한 집착.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가족, 자기 몸뚱이,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들
여러분 치렁치렁하죠.
거기에 대한 집착이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그 집착 때문에 의식으로 쉽게 이렇게 바라밀이 쉽게 안 돼, 오케이?
그래서 의식이 자기인 것을 먼저 깨닫고 난 뒤에는
자기 집착을 봐야 돼요.
그래서 집착을 풀어야 돼.
집착한다는 것이 묶여 있다는 사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자유롭지를 못해.
이걸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
이게 수행이에요.
다 풀리면 어떻겠어요?
훌훌 날겠지.
근데 그때까지는 집착이 남아 있다? 없다?
그 집착을 보고 푸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다.
해야 돼요. 그냥은 안 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옛날 습관대로 그냥 있어.
집착 있죠?
이거 솔직히 ‘나는 이런 집착 없다’ 말하기가 참 어려워.
그러니까 참 이 공부는 꾸준하게 해야 되는 공부다.
상황 이해되죠?
그래서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빨리 의식을 깨달아야 돼요.
‘아, 이거구나. 의식이라는 것이 이거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본질을 깨달았어.
그러니까 의식 자체는
아무리 상태는 변해도 의식 자체는 변함이 없더라는 거예요.
의식 자체.
의식의 상태를 깨달은 게 아니라
의식 자체를 깨달았어요.
그러면 천안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 맑은 상태를 보는 눈
그거는 의식 자체를 본 거예요? 의식의 상태를 본 거예요?
요거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하면 안 돼.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하시면 안 돼요.
어떤 카테고리가 있느냐?
의식의 상태가 있고 의식 자체가 있어.
비유하면 의식의 상태는 파도와 같아.
의식 자체는 모든 파도가 바닷물이에요.
맞아요?
그러면 지금 나의 목표가
좋은 파도가 되는 게 목표냐?
아니면 바닷물이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게 목표냐?
바닷물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서
어떤 파도도 나의 분신들이다.
그래서 파도로부터 집착하지 않게 되는가?
이게 지금 우리 공부예요.
부처님도 이렇게 해서 깨달았어요.
근데 데이비드 호킨스라는
유명한 그 정신과 의사이면서 깨달은 사람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의식혁명>이라는 책을 쓴 분인데
그분이 자기가 보니까
의식의 에너지 상태가 20부터 1000까지 다양하더라.
의식의 에너지 상태가.
기분 좋을 때는 의식이 막 팔팔 뛰고
우울하면 의식이 힘이 빠지고.
상황 이해돼요?
20부터 1000까지 있더라.
그러면 깨달으면 20이 1000이 되는 거냐, 이거예요.
20이었던 사람이 1000이 되는 게 깨달음이냐, 이거예요.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건 의식 상태다 이거예요.
1000이 돼도 또 내려와
20되도 또 상황 따라 올라가 내려와
육도윤회 안에
지옥과 천상 안에서 왔다 갔다하는 것이 이 상태다 이거예요.
근데 깨달음은 뭐냐 하면
20이든 1000이든 의식이다. 의식
부처님의 의식이나 갓난아기의 의식이나
의식 자체는 같다, 상태는 다르지.
그러니까 요 의식 자체하고
의식의 상태를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하면 안 된다.
의식 자체가 본질이고
의식의 상태는 현상이에요.
그러면 본질을 깨닫는 거예요? 현상을 깨닫는 거예요?
다시, 본질을 깨닫는 거예요? 현상을 깨닫는 거예요?
본질이잖아요.
그러면 본질을 깨닫는 것이
의식이 좋은 상태를 깨닫는 거냐? 이거예요.
아니죠.
그럼 9차 제정을 아무리 해도
부처님이 해보니까
그거는 현상이더라, 깨지더라, 생멸이더라.
입정할 때는 고요하지만
출정하면 도루묵이더라, 이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도 한 분이 저한테 와서
자기 공부에 대해서 의논했어요.
그러면 제가 들을 때 기준이 뭐냐 하면
이분이 와서 지금 의식의 상태를 말하는가?
의식 자체를 말하는가?
이게 나의 저의 기준이에요.
본인이 ‘의식 자체를 발견했습니다’ 이럴 때는 오케이죠.
근데 의식 상태를 ‘저는 기가 막힌 의식 상태를 체험했습니다’ 하면
땡이야.
그러면 ‘좀 더 기다려 봅시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식 자체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한 달 뒤에 다시 점검을 해봐도 그걸 거고
24시간 그걸 거고, 365일 그걸 거고
그렇지 않나요?
애기가 잼잼 하는 것이 그때만 잼잼 하냐? 이거예요.
항상 잼잼한다, 이거예요.
우리는 지금 컸으니까 잼잼 안 하지만
애기가 점점 하는 거나
지금 우리가 이렇게 보고 듣고
지금 시간을 함께하는 거나 같다 이거예요.
뭐가 하느냐?
같은 게 한다, 이거예요.
부처님의 의식이나 아기의 의식이나 같다.
이걸 깨달아야 된다. 이거예요.
본질을 깨닫는 거다.
카테고리가 다르다.
본질 자체하고 상태하고.
상태는 현상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본질과 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호리유차의 천지현격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진다).
다르다.
이게 안목이다. 안목.
이걸 왜 강조하는가?
진짜 많은 사람이 어떤 상태를 가지고 와서
깨달음이라고 착각한다, 이거예요.
평상심이 도지 특별심은 도가 아니다.
이거 지금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경지를 추구하고 있어.
그런데 보세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육조단경에 ‘특별한 경지가 도다’했으면 나는 그걸 따를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특별한 경지가 도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어.
그래서 오직 견성이다라는 거예요.
육조스님에게 누가 물어요?
인종법사라는 강사 스님이 육조스님한테 물어요.
“오조 스님한테서 어떤 법을 받았습니까?”
육조의 답변은
“오직 견성이지 선정 해탈을 논하지 않습니다.”
선정을 논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육조스님 말씀이.
그러면 조계종지에 의하면
선정은 논하지 않고 견성만 논한다. 이거예요.
그리고 인종법사가 물어요.
‘왜 그렇습니까?’
선정은 이분법입니다.
그 상태하고
입정하면 고요한 상태인데
출정하면, 정에서 나오면, 시장통에 나가면 다시 옛날 그대로야.
입정과 출정이 달라서 이법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근데 견성은, 성품은
시장에 있든지, 고요한 산사에서 고요한 선정이 들어가 있든지
다 이것 속에서 하고 있다 이거예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공통된 거
이게 본질이다, 이거예요.
변하지 않는 거, 보편적인 거.
그래서 기준이
평상심이냐 특별심의냐를 가지고 구분하면 딱 맞아요.
특별한 건 아니에요. 여러분 죄송하지만.
가장 최근에 한 분이 이걸 알아채고
표시하는 게
갓난아기가 잼잼하는 거네요. 이러는 거예요.
여러분 아기 지금 해보세요. 잼잼
갓난아기처럼 잼잼
이거다 이거예요.
이거 뭐가 하는 거예요?
이거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빨리 알아차리셔야 돼요.
알아차려서 의식이 깨어나는 힘으로
현상에 집착하는 그 버릇을 잡아나가는 것.
여기에 진짜 공부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고
자나 깨나, 언제나, 누구나
모든 사람한테 공통된 것이 자성이다, 그게 부처다, 그래야 진리다.
그렇지 않나요?
어떤 사람만 특별하게 가지고 있으면 그게 진리일까요?
아니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24시간 일거수일투족
이거 아닌 적이 있나요?
자, 진리 보여드릴게요.
이거
큰스님들 이러잖아.
이거 모자랄까 봐 또
*!
이렇게 한번 쳐주시잖아요.
노파심에서, 못 알아들을까 봐.
이게 다다 이거예요.
이게 다다 이게 다다, 다다.
그러면 왜 자꾸 의심해요?
여러분, 이것이 지금 이 한 물건이
깨닫기 전에도 있었을까요? 깨달음 이후에만 있나요? 어때요?
전에도 있죠.
그래서 선심은 항상 초심이 돼야 돼.
상황 이해되세요?
‘나만 깨달았다’ 이러면 그거는 미안하지만 깨달음이 아니네. 그죠?
다 깨달아 있죠.
이거 없는 사람 있어요?
강아지한테도 있다는 거예요.
중동합력은 다 가지고 있다.
꿈틀대는 것은 다 가지고 있다.
이게 부처님 말씀이잖아요.
금강경에 나오잖아요.
중동합력.... 꿈틀대는 곤충까지도 이걸 다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어야 이게 진리다. 맞아요?
그러니까 지금 수없이 지금 못 깨닫는 이유는
특별한 걸 추구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다.
이런 말을 한두 번 들었나요?
그런데 왜 못 깨닫는가?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걸 추구한다.
왜냐, 특별한 걸 추구하는 것이 집착이기 때문에 그래요.
집착,
그러니까 자기 집착을 보는 게 진짜 공부
진짜 공부는 자기 집착을 보는 거.
저는 옛날에 이 말 들었는데 지금도 기억을
참 신선했어요.
‘물은 무엇과도 섞이는데 섞여도 물은 물’인 거예요.
상황 이해돼요?
‘본질은 무엇과도 섞여도 본질은 본질’이야.
그래서 내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그것이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지
어떤 특별한 의식의 상태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큰 잘못이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다 본래 부처예요.
왜냐, 누구나 의식을 가지고 지금 쓰고 있으니까.
쓰고 있죠?
여러분이 여기 오신 게 뭘 가지고 오신 거예요?
의식으로 온 거잖아요.
갓난아기도 이걸 가지고 있어서, 갓난아기도 본래 부처다 이거예요.
강아지도 본래 부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넓어져야 돼요.
공부를 넓게 해야 된다.
지금 상황 이해되죠?
그다음에
육안 천안 다음에 /혜안은 견성하여 본질을 보는 눈이다./
견성한다. 이 말이 본질을 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혜안은 본질을 발견하는 눈.
여러분 혜안은, 빨리 뜨세요.
주저주저하지 마세요.
뭐가 본질이에요?
지금 저 보여요?
보는 그거예요.
제 소리 들려요?
듣는 그거예요.
숨 쉬세요?
숨 쉬는 그거예요.
조금 전에 화장실 갔다 오셨죠?
그거예요.
매 발자국 발자국 옮기는 그거예요.
그게 본질이에요.
딴 거 아니라 저 깜깜한 데 처넣으면
눈을 떠도 다 사라지는데
깜깜한데 자기가 있다, 이거예요.
다 사라져도 자기가 있다.
그 자기, 이때 자기는 뭐예요?
자기 몸도 안 보인다고.
근데 안 보인다는 걸 자각하고 있잖아요.
그거
그걸 의식이라고 안 하고 뭐라고 하지?
요즘 좋은시대에요.
서양인들이 깨닫고 과감하게 [의식]이라고 해버려. 그냥
서양인들이 깨닫고 과감하게 그냥 어려운 말 쓰지 말자.
이거 [의식]이다.
깨달은 사람들이.
지금 의식이 있죠?
의식이라고 하든, 정신이라고 하건, 자기 뭐 본심이라고 하건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지금 살아있는 거, 이거예요.
이걸 발견한 것이 혜안이다.
다음에 /법안은 본질과 계합하여 법계를 보는 눈이다/
법안은 법계를 보는 눈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혜안을 떠도 과거의 에고가 의식을 본 거예요.
상황 이해돼요?
십우도에서 동자가 소를 보잖아요. 발견하잖아요.
그거는 혜안이다 이거예요, 따로따로다 이거예요.
상황 이해되나요?
근데 법안은 뭐냐 하면
그것이 된 거
소도 사라지고 동자도 사라지고
동그라미 하나 남는 거
그게 법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하나가 된 것
나누어지지 않은 것.
다시 말하면 나의 내가 집착이 사라지는 것
여러분, 집착 사라졌다는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함부로 말 못하죠.
이게 법안이다. 이거예요.
그럼, 집착이 사라지면 어떻게 돼요?
내가 의식이 돼버리죠.
의식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계가 뭘까요?
법신불의 입장에서 보면
삼라만상은 전부 화신불이야, 자기의 분신이야.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보면 다 자기 나툼이에요.
그러면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법이다 이거예요.
이 세계는 법계다 이거예요.
의식의 입장에서 봐야지 이 세계가 법계야, 이해되나요?
그게 법안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에고가 본질 보는 거 하고
본질이 되어서 이 세계를 보는 거하고 다르죠.
조산이 수없이 반복합니다. 또 합시다.
조산 본적 스님한테서 그 밑에 덕이라고 하는 수자가
열심히 해서 한번 이 자리를 봤다.
그래서 찾아와서
“어리석은 당나귀가 드디어 우물을 봤습니다”.
이 자리를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자기를 어리석은 당나귀라고 표현한 거예요.
“어리석은 당나귀가 우물을 봤습니다. 제 수행이 이제 된 거죠?” 하니까
“이제 시작이다” 이런 거예요.
그러면 이 덕수자가 조산 스님한테
”그러면 저는 당나귀가 오물을 봤는데 스님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이렇게 질문을 잘해야 돼.
그러니까 조산이 하는 소리가
”우물이 당나귀를 본다.“
지금 상황되세요?
당나귀가 우물 보는 것은 혜안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것은 법안
상황 이해돼요?
덕수자가 한 번 견성했지만 초견성이고
아직도 당나귀다.
당나귀로서 우물을 본 거다.
그다음 수행은
우물이 되어서 당나귀를 보면 당나귀가 법이 돼버린다.
그러면 번뇌가 보리다. 이거예요.
번뇌즉 보리란 말은 법안을 말하는 거예요.
법안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자기의 분신이라서
좋은 것도 이 한 계 법이 드러난 거고
나쁜 것도 이 한 계의 본질이 드러난 거라서
모양은 달라도 그 질료, 재료
검은 구름이든 흰구름이든 다 재료는 같다 이거예요.
파도 중에서 큰 파도든 작은 파도든 다 파도다.
바다 입장에서는 모든 파도가 법계다.
그래서 번뇌즉 보리고 중생즉 부처다. 이거예요.
이거는 법안을 말하는 거다.
상황은 이해되죠?
공부 과정이 그렇게 익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불안은 중도를 통달하는 눈이다./
중도는 이제는 더 이상 현상이니 본질이니 하는 구분이 없다. 이거예요.
그냥 눈앞에, 적나라 눈앞에 있는 이거
있는 이대로 이거 하나밖에 없다.
따로 본질도 없고, 따로 현상도 없고, 완전히 중도로 통달한 눈이다.
중도로 통달한 눈은 뭐냐 하면
특히 이걸 쓰는 거예요.
불행을 하는 거예요.
부처의 행, 이걸 쓰는 거
본질과 현상을 자유자재로 쓰는 거.
/중도에 통달한 눈이다.
대승불교에서는
혜안을 뜨면 아라한, 법안을 뜨면 보살, 불안을 뜨면 부처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런 선악적인 내용도 알아둬야
내가 지금 어느 분상에서 공부하고 있는가
이 공부의 일정표를 알아야
내가 지금 혜안을 떠도
이제부터는 나의 집착을 내가 봐서 내려놓는가?
자, 다른 말로, 집착을 쉬는 거
이게 혜안에서 법안을 뜨는 공부 과정이에요.
여러분 쉬워요. 어려워요?
만만치 않아요.
자기 집착 있죠?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되기 때문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도 죽여라.
깨달음을 만나면 깨달음을 버려라.
그러니까 부처를 만나면 빨리 피해라 이 말이에요.
왜냐, 그것도 집착이니까.
그러니까 이거 집착 내려놓기는 안 쉬워요.
그래서 반야도 버려야 되고.
초보자가 반야를 버린다, 이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야.
초보자는 반야를 구해야지.
얻은 것이 있어야 버리지.
그렇지만 얻은 사람은 빨리 버려야 돼.
그러니까 좋은 선생님은
“제가 깨달았습니까?” 할 때, 끝까지 깨달았다고 하면 안 돼.
그럼 그 사람은 그걸 집착하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이해되죠?
집착 안 하는 게 핵심이에요.
본질이 깨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착을 보는 게
이게 진짜 공부, 이거다 이거예요.
상황은 이해되죠?
/알고 보면 오안는 하나다./
왜냐하면 여러분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오늘 외워버리세요.
이게 이 공부의 일정표야.
난 지금 육안 떴죠. 그죠?
그리고 마음이 고요할 때 가끔
‘아, 이게 천안이라고 하는 느낌이 와요.
고요한 거구나’ 이거, 그런 느낌이 와.
그런데 혜안은
‘아, 이거구나’ 하면 해야 돼요.
그래서 점심이라고 불러
점심_ 마음에 점 찍는다.
이때 마음은 의식이에요.
옛날 분들이 쓰던 마음은
지금 우리가 번역할 때는 의식이라고.
여러분 한자어는 외국어예요.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서양어예요.
그러니까 의식이라고
“아,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게 점심이야, 점심.
홍콩 바라보는 딤섬
딤섬, 만두 먹을 때마다 마음이 캥겨
‘나는 지금 점심을 하고 점심하는가?’
그러니까 딤섬, 점심, 마음에 점 찍는다.
“이거구나, 아 이거구나”
‘이거구나’ 하면 어떻게 돼요?
‘아, 이거구나’
혜안이에요.
혜안을 뜨면 어떻게 되냐 이거예요.
혜안을 뜨면 자기 업이 잘 보이기 시작해.
그래서 수행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가 어디에 집착하는가’ 하는 것을.
다시 말하면 ‘내가 어디에 마음을 뺏기는가’ 거예요.
자기를 보면 남은 모르는데 나는 뺏기는 데가 있어.
약점이 있죠.
마음 뺏기는 거, 이게 나의 집착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어딘가에 마음을 뺏기면, 자기를 보면
자기 집착이 보인다.
그럼 자꾸 뺏기면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부자유스러우면 결심하게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놓여나는 것, 자꾸 놓여나는 것,
쉬는 거, 쉬려면 봐야 쉬어요.
왜냐하면 결단이거든.
계속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살 건가?
내 공부가 진전이 나갈 건가?
자유를 향한 내 공부가 진도를 나갈 건가?
그거는 이제 자기 결단이에요.
결단은 자기 스스로 하는 거죠.
그게 이제 정말 정말 수행이다.
혜안에서 법안 뜨는 게 수행이다.
/알고 보면 오안은 하나다.
왜냐하면 육안이든, 천안이든, 혜안이든, 법안이든, 불안이든
결국 그것이 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보는 주체는 불성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말 들어옵니까?
아무리 좋은 눈깔도 눈깔은 눈깔이다 이거야.
그러면 이걸 지금 보는 게 눈깔이 보느냐?
아니면 눈깔을 통해서 의식이 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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