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눈에는 모두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두 돼지로 보이는 법이다.
선지식 눈에는 모두 선지식으로 보인다.
불성을 깨달은 사람 눈에는
모든 이가 불성을 가지고 쓰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모양은 따라서 불성을 쓰고 있는 사람이
모양은 비록 중생이더라도 본질은 엄연히 부처다./
여러분, 이 말도
‘모양은 중생이더라도 본질은 부처다’
이러면 공부를 크게 하자 이거예요.
우리가 육조 혜능을 공부하니까.
처음 시작은 의식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의식이 “아, 이렇게 있구나” 하는 느낌.
이것부터 시작하지만 ‘공부를 크게 한다’ 이 말은
이게 점점점점 이게 커져서, 마음이 더 열려서
마치 그런 느낌이에요.
산에 올라갈 때는
앞사람 뒤꿈치만 보죠, 처음엔 그렇잖아요.
근데 올라가서 ‘야호’하면 다 보이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처음에는 앞사람 뒤꿈치처럼 의식이 느껴지는데
좀 좁게 느껴져요.
근데 갈수록 이게 커져서
나중에 산에 다 올라가면
전부 다 내 발아래에 있죠.
북한산 저쪽으로 가보면
그 도봉동 쪽에 아파트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는데
성냥갑 같죠.
성냥갑 세워놓은 것 같아, 아파트 건물들이.
그것처럼 내 마음이 넓어지면
통으로 전체가 다 한 개 의식이 됩니다, 전체가 다.
그래서 공부를 크게 한다, 이 말은
아직까지 내가 느껴지는
의식을 아예 못 느끼는 사람은 의식을 확인해야 되고
의식이 확인된 사람은
점점점점 의식이 커져서
쩨쩨하게 ‘여기까지’
이런 게 없어진다 이거예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만 의식이 다가 아니고
커지면 모든 물결 자체가 물이다.
가면 갈수록.
지금 우리가 보이는 사물들은
그 사물이 객관적으로 그냥 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의식이 파악한 것들이에요.
나의 의식이 파악한 것이라서
그 자체가, 전체가 다 한 개의 의식이
또 나의 의식이 파악해서
이 삼라만상의 모양으로 다양하게 지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거를 못 알아채니까
할 수 없이 꿈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알아듣게 하려면.
꿈 전체가 꿈꾸는 사람의 의식이에요.
근데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은 모르죠.
또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있는 그 침대는 모를 거 아니에요.
꿈속에서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의식의 꿈속에 있어요.
그래서 이 꿈을 꾸고 있는 의식에 대해서는
미처 못 알아채고 살아가는데
그러나 꿈은 좋은 공부 소재다.
그래서 꿈을 잘 생각해 보면 이거랑 똑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이
한계의 의식이 구는 꿈인데
꿈꾸는 사람의 꿈속에는
꿈꾸는 사람의 모양도 나오죠.
그리고 다른 환경도 나오잖아요.
지금 같다 이거예요.
꿈꾸는 사람의 모양이 지금 이거예요.
그리고 그 환경이 나오는데
전체가 통틀어 그 사람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거를 아직까지 낯설은 이유는 딱 하나예요.
우리가 너무나 분별하는 분별심에 익숙해서
분별하기 때문에 자꾸 꿈속에 등장한,
요 이미테이션을 ‘나’라고 분별하면서부터
이 전체 통일성이 깨지는 거다.
그래서 이게 하나의 습관이에요.
그 습관을 이기기 위해서는
낯설어 있는 의식이 익어가면서
분별이 생각이거든요. 생각
지금 두 가지 차이점.
우리가 눈매가 날카로워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의 눈은 ‘호랑이 눈이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호랑이 눈을 가져야 한다.
이 호랑이의 눈의 핵심은 뭐냐 하면
[생각하고 의식을 구분]하는 거예요.
[생각하고 의식]
하나의 숙제예요. 여러분
이번 학기 내내, 생각하고 의식을 구분하는
그 눈매를, 날카로운 눈매를 갖춰야 합니다.
생각은 생겼다가 사라지죠.
의식은 항상 있어요.
생각은 현상이고, 현상의 대표고
의식은 본질이에요.
현상과 본질을 구분한다, 이 말은
생각과 의식을 구분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튼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은 팽팽 돌아갑니다.
이게 지금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견성한다’ 이 말은 ‘본질을 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견성한다. 본질을 본다’ 이 말을
‘현상을 본다’ 하고 혼동하면 안 된다.
차이점이 있다.
보세요.
본질을 보는 거하고 현상을 보는 건 다르죠.
그러면 팽팽 돌아가는 생각은 본질입니까? 현상입니까?
현상이죠.
그러면 생각이 있는 거 하고
생각이 잦아드는 거 하고
둘 다 현상이다, 이거예요.
이해되세요?
생각이 있어도
이 의식 속에서 생각이 인연 따라 나타난 거다.
생각이 사라져도
생각은 사라졌지만 의식은 그대로 있다.
여러분, 이 공간에
인사동 선원이라고 하는 선원에, 이 선방에
우리들이 지금 나타나거나 안 나타나거나
이건 그대로 있죠.
근데 인연따라 지금 우리가 나타난 거예요.
우리들은 지금 생각 같은 존재들이야.
선방 자체가 의식인 거예요.
지금 상황 이해되세요?
생각이 있건 없건, 의식은 그대로 있죠.
근데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걸 추구해.
견성하기 위해서 생각이 없는 걸 추구해요.
이 말 음미해 보세요.
본질을 보기 위해서
엉뚱하게도 현상에서 놀고 있어.
생각이 없이 고요해지려고 하는 것은
현상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거예요.
이걸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라고 해요.
그러니까 의식이 없으면
간단명료하게 의식이 없으면 우주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성립할 수 없어요.
무엇이 없으면?
여러분의 의식이 없으면.
남의 의식, 부처님 의식 말고
여러분의 의식이 없으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몇십 년 살면서
여러분이 없던 적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항상 여러분이 있었잖아요.
그 말은 항상 의식이 있었다, 이 말이에요.
의식은 생겼다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선정이란 말이
눈이 매섭다. 이 말은 이런 말이에요.
선정이란 말이
현상의 선정이 있고 본질의 선정이 있어요.
선정이란 말, 삼매
현상에 삼매가 있고 본질에 삼매가 있어요.
그러면 본질은
처음부터 항상 선정삼매 속에 있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근데 현상은 삼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바탕으로 있는 이 의식은 항상 변한 적이 없다.
그래서 용과 뱀을 비유해서
현상에서의 선정삼매는 뱀이 들어가는 소정, 작은 선정
본질은 용이 들어있는 대정, 큰 선정
그래서 ‘나’가 대정이라는 말을 선에서는 많이 써요.
여러분 제가 아까 뭐라 그랬어요?
의식이 불성이라는 것은
항상 현재에 작용하는 의식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면 현재에 작용하는 의식은 항상 현재에 있겠죠.
현재가 변한 적이 있어요? 현재 자체가?
현재 자체는 안 변해요.
하여튼 이거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에요.
여러분 평생 수십 년 살았죠.
항상 현재였죠.
현재 아닌 시간을 살았던 사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손 들어요.
어떤 사람 손 들어서
“저는 미래를 상상하고 살았습니다.” 이러면
근데 그 사람이 미래를 상상한 그 시간이 현재에요? 미래예요?
현재에서 미래를 상상하잖아요.
과거도 현재에서 과거를 기억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서 자기라고 생각해요.
거의 그렇지 않아요?
자기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을 모아서 ‘나’라고 대개 생각해요.
그러면 진짜는 뭐예요?
보세요, 그 기억을 기억하는 사람이 진짜입니까?
아니면 기억의 내용이 진짜입니까?
기억하는 사람은 항상 현재에 살아요? 과거에 살아요?
지금 차이점 아시겠어요?
기억하는 사람하고, 기억의 내용하고의 차이.
여러분 어느 쪽이 자기에요?
기억하는 사람이죠.
기억하는 사람은 항상 현재에만 살아요.
근데 기억은 과거에만 있잖아요.
이게 지금 사람이 그런 거 있잖아요.
“라떼는 말이야”
레파토리가 “라떼는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그 과거를 반추하면서 가오를 잡는다.
그걸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한다.
근데 진짜는 뭐예요?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그 현재 의식이
그 사람의 진면목인데
그걸 거의 몰라요, 사람들은.
그거 모르고 흘러간 옛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부여안고 산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항상 의식이, 우리들의 의식이
본질도 의식이고 생각도 의식이에요.
이 두 개가 어디서 만날까요?
본질 의식하고, 생각이라고 하는 현상 의식하고
생각, 감정도 의식이잖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여기서 만나죠, 지금 여기에서.
그래서 항상 우리의 의식이
지금 여기로 오면 통합이 돼 있어요.
근데 지금 여기로 안 오면
본질의식하고 현상의식이 분리되어서
분리된 현상의식은 그게 에고예요.
분리된 현상의식이 에고예요.
우리의 본래면목은 본질의식이잖아요.
이게 통합이 돼야 된다.
어디서 통합되느냐?
지금 여기.
그래서 항상 의식이, 우리들의 의식이, 자각하는 이것이
지금 여기에 이를 자각하면
저절로 통합이 됩니다.
여기에 많은 명상
특히 에카르트 톨레는 이걸 아주 아주 강조하는 분이죠.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생각을 쉬고 고요히 한다는 말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의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지만
선의 입장에서 보면
마하반야바라밀은 뜻이 있죠.
마하는 크다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도피안, 피안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선의 입장에서 보면
마하도 크다는 건 뭐가 크냐?
본질인 의식이 크다
본질인 의식의 형용사가 마하죠.
뜻은 달라도 같은 걸 말하고 있다.
반야도 지혜도 본질이 반야죠.
바라밀이라는 것도 피안으로 건너간다.
이것도 결국 본질을 말하는 거잖아요.
바라밀도 결국 이 순간 작용하는 우리의 의식을 나타낸다.
이 말 들어옵니까?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우리 의식이 마하예요.
커요. 이게 지혜예요.
그리고 이것이 피안이에요.
이 단락에 중요한 것은
우리 눈이 이런 개념에 쫓아다니느냐?
아니면 지금 우리 눈이 본질에 눈을 뜨고 있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럼, 본질에 눈을 뜨고 한번 봅시다.
본질이 뭐예요?
지금 이 순간에 작용하는 의식이죠.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의식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의식이 뭐로 나오고 있는가?
내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작용하는 의식이 나오는 거죠.
의식 자체는 텅 비어서
이렇게 말로 나올 수밖에 없어.
현상으로 나올 때는.
그러면 무슨 말을 해도
모양은 그 말이지만
그 재료는, 본질은 의식이 나온 거죠.
약견제상비상
말을 들을 때 말의 모양을 들으면서도
그 말의 모양
다시 말하면 그 말의 물결이 하나하나가 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의식이 그 모양으로 나온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약견_만약에 본다면
이 책을 읽으면 어떻게 되는가?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이 말이 있죠.
마하가 의식이에요.
말뜻에 안 따라간다면, 현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현상과 본질이 같이 있다는 걸 우리가 자각한다면
이 글자 하나하나가 ‘마’가 의식이죠.
‘음’ 의식이죠.
‘을’ 깨-끗-이-한-다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다 의식이죠.
그러면 마-음-을-깨-끗-이-한-다-는-것-은-생-각-을-쉬-고
말 뜻에 안 따라가면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부처가
의식이 부처니까
부처님이 지금 출연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지금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말 대신에
뜰 앞의 잣나무, 삼석은 무
오늘따라 남풍이 불어오니까 이 정각이 시원하네.
동산이 물 위로 간다.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자체가
이 순간 의식이 그것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한테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그러니까 의식 자체를 어떻게 보여줄 거예요?
의식 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식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 현상계의 한 마디 한마디 말이
전부 다 의식이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거예요.
그럼 이거를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람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말뜻은 아무 상관 없고
그 말 자체가 의식이 출연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
요 대목에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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