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76. 윤홍식의 유식학강의 3강 - 진공묘유(眞空妙有)

Buddhastudy 2013. 11. 3. 21:03

출처 : 홍익학당

 

어제 요가 잘 들으셨죠? . 요가인지 불교인지. 알 수 없는. 그걸 제가 외워서 하겠습니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데로 하는 거죠.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어제 한 강의가 말도 안 되는데, 일반인 상대로 그런 얘기하면 사실은. 그래서 제가 알아낸 데까지는 누구나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으려고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나중에 이런 요가나 이런 거 공부하시다보면 분명히 헷갈리실 수밖에 없거든요. 왜 그러냐하면 지금까지 예전에 연구사를 보면 한 2천 년간 그거가지고 끝없이 논쟁이 일어나지만, 답이 안 나와요. 티베트불교가 유식학에 대한 논쟁을 한 5, 6, 7세기 때 일어났던 그 논쟁을요, 그대로 외워가지고 지금 반복하고 있어요. 저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지금 우리 눈으로 얘기를 해야지, 왜 그때 그 유식학가지고 논쟁했던 그 파들의 논리를요, 그대로 지금 그걸 학습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서 나이들 때까지 1020년을 그거 다 외워요. 그래가지고 그걸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 이게 우리나라가 지금 당나라 때 선문답만 외워서 지금 선문답하고 있는 거랑 똑같은 이치에요. 저쪽은 유식학 교리를 외워가지고 지금도 똑같이 제현하면서 이렇게 티베트식 있잖아요. 치면서 뭐뭐 뭐뭐 하는데 중간에 도리냐? 이게 중이냐? 뭐냐? 몇 식이냐? 이런 거 던지면 뭐라고 하고, 이러고 놀고 있거든요. 저는 그럴 때가 아니고, 유불선 기독교 이런 거 다 회통시켜 가지고 지금 우리 마음에서 곧 답을 찾아가지고 우리 마음은 이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난 이렇게 살면서 우주를 이런 식으로 창조해야 겠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와야지, 만날 전통만 유지하면서 만날 옛날 묵은 이론에 전문가로서 목에 힘주고 앉아서 하는거는 제 비위에 도저히 안 맞고 저는 그런 걸 잘 못 보겠어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얘기를 듣고 직장에서 더 창조적이고 더 양심적이고 창조적인 분이 될 수 있는 그런 답이 아니라면요, 도움이 안 돼요. 그냥 지식, 지식 자랑하는 거 밖에. 제 강의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지식 자랑하는 강의는 안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용어, 못써서 안 쓰는 게 아니고, 전 되도록 안 써요. 풀어서 하지 절대로 어려운 용어를 가지고 죽~ 얘기해버리면 다 죽자는 얘기죠. 그래서 난 이렇게 많이 알고 있어.” 이런 거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어렵다는 것들이 사실은 별거 아닙니다. 근원에서 보면 별개 아니고, 실제로 체험해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제 강의의 포인트구요, 그런데 왜 제가 워낙 많은 정보를 다루다 보니까 쟤는 지식으로만 많이 갖고 있는 거 같다는 악플들 한 번씩 달립니다만, 칭찬으로 듣고요,

 

이런 제 마음을 잘 이해해 주시고, 좀 어려운 강의들이 있으시면 이해되는 데까지만 들이시고 또 묵혀뒀다가 마음공부 잘 될 때 한번 또 보시고 하면요, 필요한 정보를 미리 교재를 만들어 놓은 기분으로 하나씩 강의를 하거든요. 교재를 미리 만들어 놓는 거니까 나중에 적절할 때, 고게 나한테 대게 와 닿을 때 한 번씩 꺼내서 그 교재를 보시면 동영상을 보시면 재미있으실 겁니다. 나중에 공부하다가 분명히 의문이 나요. 예전에 제가 아뢰야식 얘기를 잘 안한 이유가 참나 빨리 알으시라고. 고요한 나라는 존재감이 참나다. 이렇게 했는데, 요즘에 유식학이 이론까지도 사람들이 또 궁금해 하실텐데. 접목을 시키면 나라는 존재감은 아뢰야식이에요. 그냥 순수 존재감은 참나인데, 순수 존재감이 참나가 이게 한 번 부풀어진 게 아뢰야식인데, 작용을 일으키는 게.

 

그러면 우주만물의 모든 본질을 갖고 있어요. 참나일 때는 우주를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우주랑 관여를 안 하고 있어요.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존재하는데, 이걸 무극이라고 합니다. 동양에서. 이 놈이 우리 마음속에서 부풀어지면. 그런데 이제 이론상 이렇다는 거지 늘 부풀어져 있어요. 원래. 이 참나가 한 번 부풀어진게 우리가 아는 아뢰야식이라는 거고, 이 놈이 우리 업을 늘 갖고 다니면서 우주를 경영하는 핵심이죠. 참나는 무극은 우주에 관여를 안 하거든요. 우주의 근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이 무극이 우주를 관여할 때는 한번 부풀어져서 태극으로 돌아가는데 우리 마음 안에서, 이게 부풀어질 때 뭔 짓이 달라지냐 하면, 미묘한 정신, 미묘한 우주의 본질을 그 안에 다 무극 안에 있는 거를 끌어내가지고 더 선명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진리라든가 나라든가 우주에서 어떤 순수한 어떤 정보들이 공덕들, 우리 그 불교로 치면 참나 안에 있는 공덕들이 이제 확장 되가지고 이게 돌아가기 시작해요. 작동을 시작해요.

 

텅 빈 공에선 아무것도 없겠죠. 이게 진공이라면 진공묘유 그러면 묘유는 아뢰야식을 말해요. 진공이 무극이면 묘유는 태극이에요. 그러니까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 뭔가가 있어요. 있으면서 그게 작용을 일으키면 우주를 나라고 여기기도 하고, 신성을 느끼기도 하고 이렇게 아주 청정한 후천세계에 돌아가는 것들이랑 차원이 다릅니다. 이게 미묘한 마음이라고 해도 인간의 마음이 아니에요. 여기까진 다 신의 세계에요. 지금. 신의 세계에서 굳이 나누자면 이런 본질들이 있더라는 것까지. 어려운 얘기잖아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이 해 놨어요. .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안할 도리가 없는 게 옛날 사람들 책을 보려면 이걸 알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옛날사람들이 선구적으로 2천 년 전에 벌써 여기까지 다 연구를 했는데 이제 와서 좀 참나 하나 찾는 거로 거들먹거려서 안 된다는 경고이고도 하고요. 저는. 옛날 분들의 발끝도 못 미쳐요. 그런 식으로 연구해서. 아인슈타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다 우주의 진리를 꽤 밝혀놨는데 이제 와서 달이 실제로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러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프리카 예전에 거기 도인이죠? 마을에서 제일 현명하다는 사람 찾아가서 다큐에서요. 물어보니까, 달나라에 사람이 갔다니까 안 믿더라고요. 이 분도 꽤 철학적이에요. 보면. 아프리카에도 아~ 도인들이 있구나. 정도로요, 이 인간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갖고 있는데, 달나라 갔다 왔다니까 달은 저건 그냥 하나의 에너지적 덩어리로 보더라고요. 달에 사람이 갈 수 없다. 안 믿더라고요. 이런 일이 가능해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또 새로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거긴?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좀 뭐 좀 아는 거 같아도요, 뭔가 하나의 큰 구멍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2천 년 전 책을 보면 이 사람들이 영적인 탐험을 어마어마하게 깊게 했구나. 우리 마음의 저 깊은데 까지. 이걸 안 다면요,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좀 알아두시라. 그래서 어려운 얘기지만 제가 조금씩 하는 게 익숙해지실 거예요. 제 얘기를 조금씩 듣다보면요, 이 다음 제가 좀 더 어려운 얘기 하더라도 소화를 하실 거예요. 제가 단계적으로 해요. 아뢰야식 얘기 예전엔 안했잖아요. 몰라서 안한 게 아니고, 제 책에 보면 간간히 나와요. 그 책 내용들하고 같이 맞춰서 참고해 보세요. 수심결에도 얘기가 나오고요, 한국 큰스님 책에도 아뢰야식 얘기가 잠깐씩 나와요.

 

그런데 요즘은 좀 더 해보자. 하는 것, 유식학 강의도 해야 되고, 강의를 앞두고 예고편격으로 조금씩 익숙해지기. 그게 이해가 되세요? 참나가 그런 아뢰야식과 참나의 미묘한 얘기들? 그런데 간단하게요,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항상 존재감으로 있는 거 같아도 그 때 미묘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걸 아실 거예요. 그런데 에고성은 없어요. 그럼 그걸 뭐라고 부를 거냐는 거죠. 움직임이 있다는 건 이미 공이 아닌데. 그런데 에고성은 없어요. 그럼 이건 참나 거든요. 그걸 아뢰야식 그러는 거예요. 거기까지. 이렇게. 참나가 더 부풀어져서 작용을 해요. 그래서 아뢰야식 황당한 거는 인도는 아뢰야식을 버리자는 걸 목표로 하거든요. 그런데 아뢰야식을 버리면요, 그냥 공일뿐이지 무로 돌아가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도 다 아뢰야식에 저장되는데, 여러분이 깨달았다는 그 사실도. 그렇죠? 여러분이 이렇게 거칠게 이해하시면요, 순수 참나가 있고, 여러분이 복원해 낸 참나가 있어요. 그게 아뢰야식이에요. 여러분이 복원해 낸 참나가 기록됐는데도 아뢰야식이겠죠. 여러분이 공부하신만큼 참나를 드러내서 쓰세요. 개인차가 있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참나의 모습은 개인차가 있다. 그게 영성지능의 핵심이구요. 그 영성지능의 차가 나는 이유도 참나는 다 똑같다는데 왜 차이가 날까요? 이런 걸 못 받아들이거든요. 아뢰야식이 아니곤 설명을 못해요. 아뢰야식은 우리가 지은 업장의 습기로 인해서 업장으로 인해서 제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하는 거에 따라서 우리의 본성을 더 많이 보고 많이 느껴요.

 

그래서 화엄경에도 나오고 유식에 다 나오지만, 1지 보살은 1지에 견성을 해요. 2지 보살은 2지의 견성이고, 10지 보살은 10지의 견성이 있어요. 참나를 이해하는 강도가 틀려요.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도 아뢰야식의 복원,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아시면요 미묘한 데까지 설명할 수가 있어요. 그전에는 참나면 다 된다 했는데 왜 또 가르느냐? 참나가 드러나는 정도가 다르다. 그럼 드러나는 정도가 어디 새겨져 있는 거냐? 참나 자체에 새겨져 있는데 참나가 제한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 학당 식으로만 얘기하죠. 먼 얘기 하지 말고. 1급 보살은 참나를 우리가 느낄 때요, 순수하게 참나만 존재하고 있는 거 같아도 가려져 있어요. 미묘하게. 아뢰야식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려져 있어요.

 

그래서 이 순수 참나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참나 차원에서는요, 뭐가 드러나냐 하면은 1급에서는 참나는 고요하다는 상, 참나는 고요하다는 정보랑 참나는 자명하다는 정보, 2가지 정보를 얻게 되요. 참나에 대해서. 그래서 깊은 명상에서 참나로만 존재해도 그 2가지 정보만 드러나요. 일반적으로. 나머지는 아직 드러났다고 말을 못해요. 2가지가 드러나니까요, 고요한 걸 알기 때문에 선정 바라밀을 마음대로 써요. 뭔 일이 생기면 선정으로 들어가 버려요. 마음을 금방 선정으로 눌러버려요. 그다음에 자기가 아는 선에서는 대게 이 상황을 통찰해요. 이건 참나고, 이건 에고고, 참나는 에고에 물들지 않고, 에고는 참나에 작용이다. 이 진실을 늘 알 정도가 되요. 지혜바라밀을 쓰기 때문에. 자명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런데 1단이 되시려면 그 정도 참나를 복원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면. 그러면 뭘 해야 되느냐? 그 고요함과 그 자명함을 가지고 일상을 살면서 사람들한테 써보는 거예요. 뭔 일 생겼을 때, 고요하게 마음을 만든 다음에. 이 우주는 내 마음의 작용이고, 내 참나는 이 작용의 주인공인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가장 이 우주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고, 이로워질 수 있느냐? 하고 이렇게 보고, 큰 시야에서 사물을 보니까요, 보시가 가능해져요. 베풀 수가 있게 되고, 유혹이 올 때 지계, 끊을 수가 있게 되고, 내가 아무리 에고가 싫어하더라도 이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면 받아들이는 힘이 생기고, 아무리 에고가 게으르고 싶어도 다시 한걸음 더 정진하는 힘이 생겨요.

 

고요함으로 참나랑 만나고 자명함으로 참나를 조금씩 이해하다보니까 이런 이상함 힘들이 나와요. 그래서 이렇게 한참 닦아 가다보면 나중에요, 여러분이 고요한 명상 중에 뭘 알게 되냐하면 어느 날 알게 되요. 이렇게 수없이 닦다가 참나가 더 드러났겠죠. 그럼 아뢰야식이 조정됐겠죠. 그날 수행을 딱 한다고 치면 이게 일단 승단하는 날입니다. 유식학에 다 써 있어요. 가행에 의해서 이걸 하는데요, 가행정진 그런 것처럼, 힘을 써서 앞판에 견성을 탁 열 때 이 상황을 4단계로 써 놓았는데 그 4단계가 다른 게 아니라 이걸 충분히 닦은 사람이 어느 날 앉아서요. 가만히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요, 아뢰야식과 딱 하나가 됐을 때 뭐가 알아지겠습니까?

 

옛날에는 참나가 고요하고 자명한 줄만 알았는데, 거기서 느끼는 미묘한 느낌이 참나는 자비롭고요, 계율을 지키고요, 인욕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요. 주변과 조화를 이를 줄 알고, 정진 절대로 나태하지 않고, 성실하다는 걸 알고, 그러면서 또 고요하고 본래 자명하구나하는 게 질이 훨씬 더 깊게 이해가 되요. 그래서 참나 안에 이런 공덕들이 있구나하는 거를 말 이전에 그냥 알아요. 이게 아뢰야식 상태에선 정보가 공유되고 있고 까발려져있기 때문에 알아요. 공에서는 이렇게 압축 파일이라면요, 아뢰야식 상태에선 좀 더 풀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뢰야식 상태로 순수 참나 상태로 존재하시다 보면, 뭔가 알아져요. 우리 내면에. 계속 해서 알아져요. 그리고 그 미묘하게 알아지는 걸 많이 밝혀놔야 되요. 이거 이상한 애긴데.

 

여러분 생각을 많이 하셔야 되요. 생각을 하고 실천해 보고 해야 우리 저 깊은 의식, 차원에서 아뢰야식 차원에서 그쪽 정보가 밝아져요. 이거 이해되세요?^^ 이상한 얘기들인데. 이게 실질적으로 업장을 바꾸는 비결인데요. 그러니까 해야 되요. 우리가 아뢰야식을 바로 조절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깨어서 열심히 하고 이해하고 하다 보면요, 자명하게 알고 자명하게 할 수 있을 때 업장이 바뀌겠죠. 그때 아뢰야식에서 원래 있던 우주적인 정보가 우리 안에서 드러나게 되요. 하나씩 드러나면서 우리는 참나를 훨씬 깊게 이해해요. 그래서 참나를 육바라밀을 가지고 다 이해할 정도가 되면 1지 보살 그러는 겁니다. 이 사람이 늘 잘해서 1지 보살이 아니에요. 그 정도의 영성을 갖추었다는 거예요. 늘 잘하지 않고서는 업장이 또 안 바뀌겠죠.

 

그러니까 늘 잘해서 바뀌게 했지만, 이 사람 실수 안하느냐? 아니에요. 그 정도 지능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실수는 계속 할 수 있지만, 아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실수확률이 줄겠죠. 성인도요, 부처님도 실수할 수 있어요. 인간의 뇌는요, 얼마든지 실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누구는 성인이고 누구는 중생일까요? 지능의 차이에요. 7지 보살 정도면요, 우주에 대해서요, 엄청나게 많은 걸 그냥 알고 있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도 실수 할 수 있겠죠. 제가 피겨를 처음 타도 자빠질 수 있고요, 김연아도 자빠질 수 있어요. 같나요? 레벨이? 그러니까 남의 실수한 거 보고 아이, 별거 아니네.” 이러지 마시라고요. 지능이 틀려요. 공자님이 실수한 거랑, 우리가 실수 한 거랑은 좀 차원이 틀려요. 기본 평균 레벨이 다르니까요. 평균 레벨이 중요한 거니까요. 이해되십니까?

 

그걸 끌어 올리는 게 목표에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 실수 했다고 그 실수로 지능이 까먹어지지 않아요. 여러분의 평균치기 때문에. 지능은. 작은 실수에 연연해하지 마시고, 나는 경전에서 말하고 제가 얘기하는 그 내용 있죠? 그걸 이해하고 있는가? 그 정도 되는 가를 스스로 자꾸 점검해 보시면, 본인의 영성이 성장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아실 수 있어요. 참나에 대해서 그 정도. 내가 보십시오. 내가 명상을 할 때 참나 안에 그 여섯 가지 정보가 진리가 들어있다는 진리와 능력이 들어있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는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요, 평소에 내가 살아갈 때도 명상할 때만 아뢰야식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린 명상할 때 아뢰야식을 잘 느끼는 것뿐이지. 여러분이 평소 살아가실 때도 아뢰야식이 그 정도는 알고 지금 여러분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뭔 말인지 아시겠죠? 여러분 안에서 작동하는 참나의 그 능력치가요, 점점 늘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자수용보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만 느끼는 내거의 참나.

 

그래서 노사나불이라는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순수한 참나는 비로자나불인데요, 누구나 똑같은 참나는. 우리 각자가 느끼고 있는 참나는 노사나불이라고 틀려요. 여러분의 노사나불과 제 노사나불은 서로 역량이 틀려요. 자수용보신. 즉 보신이기 때문에 공부한 결과 과보로 인해서 수준이 틀려져요. 그래서 각자 자기가 진리의 비로자나불의 능력을 끝없이 끝없이 자기 안에서 계발해가지고 갖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한동안 또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능이 떨어져요. 이거 이해되세요? 한동안 제가 공부를 안 하고 막살면 어떻게 될까요? 업보에 다시 무지랑 아집의 때가 다시 조금씩 끼겠죠. 조금씩의 처음에 말랑말랑하겠지만 조금씩 끼다가 어느 시점 되면 원래 알던 걸 다시 가려 놓겠죠. 그래서 다시 퇴보해요.

 

견성 좀 했다고 까불다간 다시 퇴보해서 일반인만도 못해져요. 견성했다는 기억만 있어요.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해요. 이런 마음의 전문가가 되셔야 되요. 제 얘기는요, 이렇게 수많은 임상에서 실험해 본 얘깁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치료하시면요, 치료가 다 되실 거예요. 아뢰야식에 뭐가 저장되어가지고 아뢰야식이 탁 막혔건, 깨어서 사단 분석, 육바라밀 분석만 계속 하시면 어떤 기질, 어떤 업장도 상관없어요. 무조건 정화 되게 되어있어요. 참나의 힘이 조금씩 드러나고 참나가 가진 정보가 조금씩 나한테 드러나기 때문에 지혜로워지고 자비로워지게 되어 있어요. 능력이 높아지고. 그래서 그거를 얼마나 많이 갖고 계시냐는. 제가 강의를 이렇게 해도 제 머릿속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서 자명하다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아뢰야식을 전 조정해 놨기 때문에 강의를 편하게 드리는 거고, 경전을 봐도 그냥 이해를 해요. 전 머리 많이 안 써도. 왜냐하면 그 경전 쓴 사람도 그 정도 알고 쓴 거고, 저도 제가 제 정신을 밝혀 놓은 게 있기 때문에 뭔 얘기 하는지 그냥 알아서 그냥 하는 거지. 제가 지능이 안됐는데, 저쪽이 자명한 의식으로 써 놓은 거를 시커먼 아뢰야식으로 제가 이해하려면 억측을 할 수 밖에 없죠. 억측을 하다보면 반드시 삑사리가 납니다. 뭐가 안 맞아요. 제 추측이라. 좀 그대로 적용하고 말하다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 탁 나오게 되요. 그리고 그 말한 걸 전혀 내가 소화 못한다는 자괴감이 생길 거예요. 그런 영향 없이 하려면 최소한 강의할 수 있는 사람, 강의를 하려고 해도요, 강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뢰야식을 밝혀놔야 되요. 안 그러면 경전을 오도시켜요.

 

경전풀이에 한해서 얘기고,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엉망이 되겠죠. 아는 거, 지식으로 아는 거랑 지금 내가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랑은 갭이 차이가 크게 나니까 말은 대게 높은 얘기를 하고, 하는 거는 대게 딱 자기밖에 못하거든요. 하는 건 사기 못 쳐요. 그러니까 같이 지내보면 알잖아요. 뭔 말을 해도 저 사람이 도가 있다 없다는요, 같이 조금 지내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서 작동하는 아뢰야식의 수준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 사람 영 사람 아닌 거 같은데하면 아뢰야식이 시커멓다는 얘기잖아요. 그럼 그 사람이 아무리 멋진 얘기를 해도 그건 책에 있는 거 갖다가 이렇게 성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거죠. 빌려서 입고 꼭 자기가 자기 옷인 양 지금 굴고 있는 건데, 우리는 보면, “그건 빌려 입은 거지 네 거 아니다.” 하는 걸 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을 다 볼 수 있어요. 이런 것도 알아두시면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