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정목스님_나무아래 앉아서 6회

Buddhastudy 2014. 8. 17. 18:30

"> 출처: 불교TV

 

 

눈에는 티끌모래

귀는 흙투성이

그런 꼴 상관 않고

유연히 사는 그는

천봉 만봉 속에도

살지 않으리.

 

꽃은 지고 물은 흘러

그저 아득하다.

 

눈꼬리 치켜들고

찾아보건만

, 이미 그림자도

볼 수 없어라.

 

안녕하세요. 나무아래 앉아서 정목입니다. 눈에는 티끌과 모래가 묻어있고 귀에는 흙투성이가 묻어있지만 그 모습에 개의치 않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수행자, 벽암록에 책장을 넘기다가 한 암자에 사는 스님을 묘사한 대목이 있어서 잠시 읽어봤습니다. 요즘 같이 아름다운 가을날에는 매인 곳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운수의 삶을 살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나무아래 앉아서

 

..

 

나 홀로 길을 가네.

안개 속을 지나 자갈길을 걸어가네.

도대체 나는 이토록 아프고 괴로운 것인가?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 삶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지나간 날의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네.

 

나는 자유와 평온을 구하고 싶네.

이제 내 자신을 찾기 위해

다 잊고 편히 잠들고 싶을 뿐이다.

 

시의 전부는 아니고 일부분만 읽어드려 봤습니다만, 삶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가슴 좀 시리게 다가오죠? 누구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길,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건,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하느라고 삶을 낭비하지는 말아야 되겠습니다.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좍~ 올라가서 평양까지, 평양에서 다시 러시아까지 쭉~ 뻗어갈 수 있다면, 아마 그런 열차를 우리가 탈 수 있는 날, 그때는 이런 음악들을 기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날도 오겠죠?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되어서 이북에 가족이 있는 분들, 정말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혈육을 만나는 일이 정치적 거래가 된다는 거, 사실 너무나 참담하고 슬픈 일이죠. 하루빨리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여러분도 혹시 기억나시나요? 몇 년 전에 아흔이 되신 아버지를 지게를 만들어 업고, 금강산 관광을 시켜드린 효자 이야기입니다. 부모님 은혜에 보답을 하는 것. 그건 승속을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왕자로 태어나셨던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전법을 펴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다니실 때, 그 와중에도 아버지 수도 다나왕이 병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이시고는 부왕을 찾아가서 법을 설해주십니다.

 

생을 마치고 죽음에 길 떠나 준비를 하시는 그 부친에게 이 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수도다나왕은 그 길로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되고, 입적하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해탈의 기쁨 속에 그렇게 있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연세가 드신 부모님께 부처님의 법에 바른 길을 일러드릴 수 있는 그런 자식이 된다면 그 이상 가는 참된 효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야 젊음의 왕성함 때문에 낙엽이 지는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흙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한바탕 꿈같았던 인생을 돌아보면서 새롭게 펼쳐질 다음 생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기도 하죠.

 

아들인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삶의 무상함을 깨달아 무명으로부터 벗어났던 수도다나왕처럼, 진리의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눈 밝은 자식을 둔 그런 부모님이라면 아마 그분들은 참으로 복 받은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미롭고 아주 명상적인 곡입니다. 루아의 목소리로 들어보시죠. 어 젠틀터치.

 

..

 

루아의 목소리는 참 사람이 어떻게 생기면 이런 목소리를 가질 수 있을까? 들을 때 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사람의 음성은 그 사람의 목소리, 칼라톤이 다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좀 금속성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처럼 고음이 나거나 혹은 첼로처럼 좀 더 저음, 베스바리톤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는데, 많은 분들이 제 목소리 들을 때는 비올라톤이라 그래요. 체로나 비올라의 중간쯤 된다고 그럴까요? 여러분이 들으실 때는 어떠신지요? 사실 저는 방송할 수 있을 때는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톤의 소리일까? 감이 잡히지 않아요.

 

..

 

이런 음악 듣고 있으면 가을에는 혼자서 어디 숲길을 걸어가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또 숲길을 걸어가도 좋고, 강이나 호수,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죠? 가을은 사람을 한곳에 붙들어두지를 않습니다. 자꾸 어디론가 가게 만들어요. 낙엽들도 다 떨어지듯이. 우리도 어디론가 자꾸 가고 싶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가 동행하면 좋겠는데 사람동행보다 책 한권 동행하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들고 다니는 배낭, 메고 다니는 배낭 속에 시집 한 권. 또는 읽을 만한 좋은 책 한권 넣어가서 편안한 나무아래 앉아 책을 읽어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바랑속의 책 한권, 지난 번 시청자 분께서 제 책을 좀 읽어 달라 하셔서 오늘 준비했습니다.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에서 한 부분 읽어드릴게요.

 

옛날 멕시코시티 외곽에 있던 인디언 부족 출신이

돈미겔루이스의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목소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고

다양한 비판과 거짓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식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마음속에 소리는

우리가 지식을 쌓으면서부터 들려온 것이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참 감탄했습니다.

태어난 뒤로부터 부모로부터 또 사회로부터

주입된 신념이 없었을 때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가 배운 말과 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닐까요?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또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관점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형성된 고정된 관점을

옳은 것이라고 집착하며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다른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는 그때가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립니다.

 

그리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들려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게 되지요.

 

그러니 어찌 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본래 내 것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진실한

내 목소리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알고 보면 상대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며 싸우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 하는

과점의 차이에서 오는 싸움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생각,

다양한 관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나무라기보다는

그와 나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사람의 생긴 모습이 다른 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한복을 즐겨 입고, 또 한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 미샤마이스키, 턱수염도 있고 머리도 곱슬곱슬하면서 참 멋있는 연주가이죠? 우리 가곡 연주해서 음반도 몇 개 나와 있습니다만 그의 연주로 해변의 노래, 나리타의 곡 들어보셨습니다.

 

..

 

 

제가 여러분들의 댓글 소감이 읽다가 그런 생각 해 놨어요. 여러분이 계시는 공간과 장소가 각처잖아요. 전 세계일수도 있고요. 그런데 TV라고 하는 하나의 화면 속으로 다 같이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미디어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메일을 보다보니까 저도 깨닫는 게 있네요. 불교공부를 통해 여러 가지 참선도 할 수 있고, 기도수행정진 다 할 수 있지만, 보시만큼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게 없다. 사실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 아니겠습니까? 보시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어요. 보시하는 행위가 깨달음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수행의 공덕을 증장시켜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보시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가 왔다는 것. 작은 것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초연해질 수 있다는 것. 이건 벌써 한 경지를 터득하신 것입니다. 대단하세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런 편지를 받고 제가 그냥 있을 수 없죠. 아름다운 음악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비바보체가 노래합니다. 보리밭.

 

..

 

박화목 작사 윤영화 곡 보리밭. 원래 박화목 선생님께서 처음에 이 시를 썼을 때, 가사를 썼을 때는 제목이 보리밭이 아니라 옛 생각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불려지다보니까 나중에 제목이 보리밭으로 바뀐 거죠. 윤영화를 이 곡을 처음 지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데요. 그런데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에 이 곡이 불려졌다 그럽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사람이 살아있을 때 유명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갑자기 그림이 확~ 높아진다든지 해서 그림 값이 등천한다든지 또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이 갑자기 세상에 인기를 끈다든지, 어쩌면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아쉬움이 안타까움이 사후에 더 작품들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가면서 저는 이 노랫말에서 이 대목이 굉장히 좋아요.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확 돌아봤는데 아무도 안보여요. 그런데 저녁노을이 쫘악~ 지는 거죠. 빈 하늘이 텅~~ 비어있는데 그 빈 하늘이 눈에 가득 차. , 한편의 시. 한편의 음악. 음악 속에는 시도 있고 그림도 있고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음악 한 곡은 종합예술과도 같은 거죠?

 

 

내 마음의 성소 벌써 발원문을 올릴 시간이군요. 1200년 전 산티데바가 올린 발원문을 우리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 가지겠습니다. 오늘은 보리심. 깨달음의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야 하는 지 발원문 올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향한 보리심으로

무수한 중생들을 해탈시키는 일로부터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원아불퇴 보리심을 다짐하면

그가 잠들거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어도

허공처럼 많은 공덕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남의 두통을 덜어주겠다는 생각만 해도

이것은 좋은 의도가 되어 무량한 공덕을 얻게 되는데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그들 모두를 최고의 행복으로 인도하길 원한다면

그 공덕은 가히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생멸들의 행복의 원천이요,

모든 생명들의 불행의 치료제인

이 보배로운 마음의 공덕을

어찌 말로 표현하고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남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만 일으켜도

부처님들께 공양 올리는 것보다

더 많은 공덕을 올리는데

모든 생명들을 이해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큰 공덕을 가져오겠습니까?

 

보리심은 한번 일으키기만 해도

행복을 잃어버리고

여러 가지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고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원인이 됩니다.

 

보리심은 어두운 무명

어리석은 무지를 일깨워주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이요,

가장 좋은 친구요,

가장 좋은 공덕입니다.

 

남들에게 받은 작은 도움도

감사하며 은혜를 갚으면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아무 대가 없이

오직 남들을 돕고 구원하는 보살의 마음은

얼마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거만하고 잘난척하는 태도로

남들에게 변변치 않는 음식을 제공하여

어떤 이들을 배부르게 하면

사람들은 그런 것도 선행이라며 칭찬을 하는데

허공처럼 한량없는 생명들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보살들의 마음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원을 가진 보살들은 큰 어려움에 직명해도

악업은 일어나지 않고

선업만 늘어날 뿐이니

이 귀하고 성스러운 보리심을 일으킨

모든 보살들께 예경 드리며 귀의합니다.

 

오늘 올린 이 발원문, 참으로 아름답죠? 다른 사람의 두통하나만 해결해주어도 무량한 공덕이 되는데 하물며 모든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주겠다는 그 서원은 더없는 공덕이 되지 않겠는가? 그 말씀 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우리도 이번 주는 그런 큰 발원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