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5)

[법륜스님 즉문즉설 1106회] 이름을 바꾸고 싶은데,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 있는지요.

Buddhastudy 2015. 6. 18. 22:01

 

 

써서는 안 되는 이름도 있을 수 있겠죠. 예를 든다면 이름이 죽일 놈이다. 이런 건 써서는 안 되잖아. 그죠? 안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들었을 때, 사람들이 욕으로 느끼거나, 헤치는 이름이라든지, 발음이나 이런 게. 그런 거는 이름으로서는 좋지는 않죠.

 

이름만 바꾸면 병이 낫는가? 그러면 의사가 왜 필요해? 작명소만 있으면 되지. 이름 바꾼다고 사업이 잘 되면 사업은 뭣 때문에 해? 작명소만 있으면 되지.

 

그러니까 요즘 자기 뭐가 안 됐나 봐. 몸이 아프고 하는 일이 안되면 그게 자꾸 귀에 거슬리지. 잘되면 그런 거에 신경 안 쓰는데. 그러면 뭐, 바꿔 봐도 괜찮지. 이름 바꾸는 거는 간단해. 절에 다녀요? 절에 다니면 불명 받아 불명으로 부르면 되지.

 

아들이 뭐가 안 되나? 몸이 아프나? 자기가 마음에서 그게 걸리면 바꿔보면 되지. 뭐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호적은 놔놓고 바깥에 쓰는 것만 바꾸면 되지.

 

문제는 호적에 들어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불리는 듣는 게 중요해서. 문제는 이름 때문에 오는 건 아니고, 자기가 걸린다하기 때문에 내가 얘기하는 거요. 자기가 걸리는 게 문제지 이름이 문제는 아니오. 여러분들 이름, 우편번호책 뒤져보면 웃기는 이름 많이 있죠? 그래도 잘만 살던데. 이름 그렇게 작명소에 가서 좋게 지어도 3살에 죽고, 7살에 죽고, 10살에 죽고,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게 어떻게 이름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거는 이해하셔야 되요. 작명소라는 거는 이름을 지어주는 곳 아니오? 그죠? 이름 없는 사람 이름 지어주고, 첫째. 그다음에 이름 바꾸는 것도 같이 겸하는데, 없는 사람만 지어주면, 옛날에 애들이 많이 태어서 그것만 해도 먹고 살았는데, 요즘은 애들이 별로 안 태어나니까, 하루 새로 짓는 이름이 옛날에 10개였다면 요즘은 2개도 안된단 말이오. 그러면 그다음 뭐해야 되요? 이름을 좀 바꾸어 줘야 되잖아. 그지? 그러니까 작명소가서 이름을 물으면 십중팔구 나쁘게 나올까? 좋게 나올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속인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서 지은 이름 갖고 다른 작명소에 가면 좋게 나올까? 나쁘게 나올까? 작명소 사람이 나쁘다는 뜻으로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일에, 예를 들면 내가 건강이 안 좋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이 운동 좀 하세요.” 이랬어. 그래서 무슨 운동 할까요?” 이래서 농구선수한테 물어보면 축구하라 그럴까? 농구하라 그럴까? 축구선수한테 물어보면? 그래. 그럴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해서 모르겠다.

 

만약에 아이고, 믿음이 하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는 데 당신 믿음이 있어야 되지, 믿음이 부족해서 신앙을 하나 가지세요.” 의사가 이렇게 처방을 내렸어. 목사한테 가서 제가 신앙을 하나 가지라는 데 뭘 가지면 좋겠습니까?” 하면, 불교 믿어라 그럴까? 기독교 믿어라 그럴까? 스님한테 가서 물으면? 불교 믿어라 그러겠지. 그런데 가끔 그래요. 북한에서 오신 분, 저한테 스님, 종교를 하나 가져야 되겠는데 뭘 가질까요?” 저한테 이렇게 물어 봐. 그러니까 내가 스님인 줄 모르나 봐.

 

하기야 종교가 없는 사회에서는 스님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있었어요. 제가 거의 20년 전이니까, 수교하고 바로 우리가 92년도 수교했는가? 중국하고? 내가 93년도에 중국 갔나? 그런데, 자꾸 안내하는 사람이 저보고 선생님, 선생님해서, 그때는 중국에 스님이 동북지방에는 몰랐어요. 그래서 딴 분이 아니 스님을 보고 왜 선생님이라고 그래? 스님이라고 불러. 스님이라고 불러. 이분은 스님이야.” 이렇게 가르쳐줬어. 그러니까 그 분이 스님, 스님하고 불렀는데, 어느 때 이렇게 또 묻는 거요. “스님은 종교가 뭐야요?” 이렇게.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웃었는지.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오. “스님은 종교가 뭐야요?”이래. 그러니까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스님 종교를 모르나 봐. 그래서 나한테 종교를 뭘 믿으면 좋겠냐?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북한에 있을 때는 누구를 믿었소?” “수령님이오.” “누구 수령님이오?” “어버이수령님이오.” “그거 믿으니 좋더나?” “좋다.” “그러면 어버이하나님 믿으세요.” 그래요. ? 이름만 바꾸면 되잖아. 가볍잖아. 좋잖아. “어버이 수령님 믿는 게 안 좋아요?” 그러면 다른 거 믿어봐라.” 이래요. 그냥 내가 그 사람한테 맞게.

 

그러니까 하나를 그냥 안 따지고 믿는 게 좋다. 가끔 그런 질문 있어요. 어제도 내가 어디 가서 질문을 그렇게 합디다. 교회가면 하나님은 믿으면 된다. 간단하게 얘기하는데, “절에는 왜 이렇게 여러 가지가 많아요? 복잡해요.” 그래서 너는 교회가라.”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이게 그 사람 자기 취향대로 하라는 뜻이에요. 원래 이게 그래요. 다신교하고, 불교의 전통은 인도에서 왔기 때문에 이게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도 이렇게 좀 다양한 쪽이고, 인도에 가면 신을 믿는데, 힌두교는 신을 믿는데 무슨 교라 그래? 다신교라 그러죠.

 

그다음에 저쪽 중동지역은 뭐요? 알라든, 야훼든 다 유일신교요. 문화가 서로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음식에 대해서든, 이런 약에 대해서든, 신앙에 대해서든, 뭐든, 취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게 좋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걸 복잡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면 된다하는데 가면 되고, 그거 좀 단순하다 생각하면 다양한 거를 하는 데 가면 되고. 그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지는 뭐에요? 작명소에 가면 이름 좋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할 확률이 높아요? 고치라고 할 확률이 높아요? 고치라고 할 확률이 높은데, 여기에 또 중요한 거는 찾아가는 사람이 뭐가 안 되는 사람이 찾아가요? 잘되는 사람이 찾아가요?

 

그러니까 찾아가는 사람, 뭐가 안 되는 사람이 찾아가고, 그 당사자는 뭔가 고치는 걸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이 두 개의 요구가 맞으면 어떻게 하라 그런다? 이름을 고치면 해결이 된다.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 분은 정말 이름은 좋은 이름이 있나? 없나? 지금 이걸 묻는데, 핵심은 그게 아니오. 이게 마음에 걸리면 어떻게 하라? 얼마 안 드니까, 고치면 되고. 그러니까 이름 갖고 그게 무슨 운명이 바뀌고 그러겠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이름은 쓰고,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서 체크를 하면 되고, 아시겠어요? 사업이 안 되면 조금 사업을 연구를 좀 더 하면 되고. 그런데 이름이 남한테 놀림감이 되거나 여러 가지 이런 문제가 있을 때는 애들한테 고쳐주는 것도 괜찮죠? .

 

이름이 앞뒤 되다보면 약감 놀림감이 되는 이름이 있거든요. 그런 거는 아이들 어릴 때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고치는 게 좋아요. 우리 어릴 때는 이름이 쇠돌이니, 남돌이니, 쇠똥이니, 이런 이름 많았습니다. 그런 이름을 왜 지을까? . 오래 살라고. 죽지 말라고. 하도 태어나면 죽으니까. 그런데 그걸 만약에 호적에 그대로 올린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경우는 요즘 같으면 좀 고쳐주는 게 나아요? 안 나아요? 고쳐주는 게 낫다. 비록 호적에 올라와 있더라도 개명을 해주는 게 낫다. 아이들이 자기가 좋다. “나는 발동이가 좋아. 나는 개똥이가 좋아.” 이렇게 본인이 좋아하면 문제가 없어요. 애들이 놀려도 괜찮다하면 괜찮은데, 애들이 싫어하면 고쳐주는 게 낫다. 이런 문제는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획을 따지고 뭘 따지고 고쳐준다 할 때, 그것도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럴 듯해요? 안 해요? 해요. 생년월일도 넣어서 빼보면 그럴 듯해요? 안 해요? 해요.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보면 그럴듯해요? 안 해요? 해요. 목사님이 얘기 들어보면 그럴듯해요? 안 해요? 그러니까 운명이 없다. 하는 얘기는 없는 이유를 쭉, 들어보면 그럴 듯해요? 안 해요? 해요. 있다 하는 사람도 얘기 들어보면 또 그럴 듯해요? 안 해요? 해요. 그럴듯해야 이 세상에 남아있지, 그럴듯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다 없어졌지.

 

이 세상에 옛날 게 그냥 남아 있는 건, 다 그게 그럴듯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거다. 요즘같이 이렇게 수술하고 뭐하고 서양의학이 발달했는데도, 아직도 민간요법, 우리 민간인 속에 횡행해요? 안 해요? 하지. ? 횡행할까? 병원에 가서 다 낫지가 않으니까 민간요법이 횡행하지 병원에 가면 다 낫는다면 민간요법이 설 자리가 있나? 없나?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이것저것 안 될 때는 민간요법도 귀가 솔깃해요? 안 해요? 솔깃하고 또 해보면 효과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 ? 민간요법이라는 게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경험하면서 형성된 거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는 거요.

 

일리가 있다고 진리다. 이렇게 말하면 안돼요. 진리라는 거는 거의 100% 법칙으로 맞아야지 진리라고 하는 거고, 일리가 있는 거 모든 게 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코끼리를 만질 때 꼬리 만져보면 빗자루 같다. 일리가 있어요. 다리 만져보면 기둥 같다. 일리가 있어요. 배를 만져보면 벽 같다. 일리가 있어요. 코 만져 보면 뱀 같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일리가 있다고 그게 코끼리가 아닌 것처럼, 그게 진리는 아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전보를 파악해야 된다. 그래서 눈을 떠야 된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말은 눈을 뜬다. 불을 켠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인다. 이것을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말하는 지금 개명이나 이런 거는 사주나, 믿음이나, 기도해서 병 낫다. 민간요법으로 병 낫다. 이런 거는 다 뭐하다? 일리가 있어. 그래서 때로는 필요하다면 활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건 절대로 미신이다. 안 된다 할 것도 없고, 그게 진짜인가 할 필요도 없고, 그거는 일리가 있는, 한 측면에서 들어보면 그럴듯한 게 있다. 특히 어떨 때 더 그럴 듯하다?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는 그럴듯하게 느껴질 확률이 훨씬 높아져요. 내가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아무소리도 귀에 안 들어오고, 내가 어려우면 귀에 번쩍 뜨이고, 그렇게 되는 거요.

 

그게 다 나로부터 빚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본인이 마음에 걸리시면 어떻게 하고? 해보는 것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맞느냐? 나한테 물은 거란 말이오. 그래서 스님의 대답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그러면 사람 이름 고쳐주고 먹고 산다고 나쁜 짓이에요? 아니에요. 그거보다는 술 팔아서 먹고 사는 게 더 나쁘지. 그런데 술 팔아서 먹고 산다고 나쁜 거요? 아니에요. 그거보다 더 나쁜 거 있어요. 그러니까 그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믿음이나 신앙이나 어떤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남에게 굉장한 피해를 끼친다. 할 때는 나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사주보는 건 나쁘다. 이렇게 단정할 필요가 없어.

 

여러분들이 진짜 그걸 믿고 그런 줄 알고, 애를 낳을 때 생년 월이 뽑아서 거기 맞춰서 배를 째서 낳는다. 이러면 어리석다고 할 수 있지만, 그냥 신수 보듯이 재미로 그냥 보고, 그거 뭐, 만원주고 술 사먹으나, 만원주고 그거 한번 빼보나, 만원주고 어디 가서 몸에 나쁜 것도 하는데, 그거 한다고 뭐 나쁘다. 이렇게까지 말 할 거는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종교도 일상적인 건 괜찮지만 지나쳐서, 예를 들면 천도재 지내는 것도 돌아가신 분 어머니를 위해서 몇 백만 원 이렇게 천도재 지내고 하는 거는 하나의 종교행위로는 괜찮지만, 당신 집안에 천도 안 되면 집안에 우환이 있다 해서 10억을 요구해서 지냈다. 이러면 이거는 종교라고 하더라도 뭐다? 이거는 큰 피해를 끼치는 거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뭐든지 과하면 나쁜 거요. 밥도 많이 먹으면 나쁘죠. 보약도 많이 먹으면 나빠요. 그런데 독약도 쬐끔 먹으면 어때요? 좋아요. 제가 시골 절에 갔는데, 겨울에 파란 감을 저에게 주는 거예요. 감을 물에 담군다는 말 아시죠? 땡감을 물에 담가 오래 놔놓으면 단감처럼 삭아서 맛있어요. 그런데 보통 보면 옛날에 한 4~5일 지나면 먹고, 좀 더 지나면 허물어져요. 우리 어릴 때 보면. 그런데 이거는 석 달씩 담궈놓은거요. 여름에 따서 담궈놓았는데, 겨울에 파란 거요. 아니 이게 무슨 비결이 있어요? 하니까 대답을 안 해. 좀 가르쳐 달라고. 아이 먹으면 되지 자꾸 물어. 그래도 내가 꼬치꼬치 물었더니, 일본말로 사이나, 비상 있죠? 그걸 물에 조금, 단지 안에 집어넣으면 이렇게 된데요.

 

그런데 나는 원리를 금방 알았죠? 그게 독약이지. 그러면 물 안에 있는 세균, 부패세균이 다 죽어요? 안 죽어요? 죽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세균을 다 죽인 속독상태에서 감을 담가놓으니까, 이게 석 달이 지나도 고대로 원형이 보존되는 거죠. 그러니까 독약도 미량일 때는 좋은 작용을 하는 거요. 그럼 그게 몸에 그 정도 미량으로 먹었는데 몸에 나쁘다하면 의사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봐야 되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 정도 먹었으면, 안에서 감이 맛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엄격하게는 약독이 따로 없습니다. 독도 아주 적은 양이면 특효약이 될 수도 있고, 약도 많이 먹으면 뭐가 될 수 있다? 독약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적절함이라는 거, 여러분들은 늘 선-, -, 이런 것만 나누는데, 적절함. 적절함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단정적으로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고 이러지 말고, 그게 적절하냐? 적절함이 뭐요? 중도라 그래. 중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함. 그래서 우리가 적절해야 되요. 아이에 대해서 과하게 보호해도 나쁘고, 너무 외면해도 나쁘고. 적절함. 고 적절함이라는 게 아이의 크기 따라서 달라지는 거요. 갓난아기 때는 100% 보살펴야 되고, 크면서 조금조검 손을 떼어줘야 되요. 사춘기가 되면 지켜봐야 되고, 성년이 되면 딱 끊어서 보살핌을 제로로 만들어야 되요.

 

그게 적절함이에요. 적절함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거요. 방안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한다. 즉 사람이 사는 데 23도를 유지한다. 이럴 때 불을 얼마나 떼어야 되느냐? 그게 계절에 따라 달라요. 겨울에는 장작 10개를 떼더라도, 봄이 되면 5개를 떼어야 되고, 여름 되면 안 떼어야 되요. 그런데 3개월 동안 10개씩 계속 떼던 습관이 붙어가지고, 봄에도 10개떼고, 여름에도 10개떼면 사람 죽이는 거요. 그게 부모가 보살핌을 갓난 애기 때 한 습관을 사춘기 때도 계속 해버리면, 그건 바로 여름에 장작 10개떼는 거 하고 똑같아요. 아이에게 엄청난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그 적절함이라는 건 늘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거요. 그러니까 N극이 북극을 향하지 않습니까? 위치에 따라서 흔들리면서 늘 적절함을 유지해주는 거와 같은 거요. 그걸 중도다. 이렇게 말해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중도를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대화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보면, 여러분들 얘기가 자꾸 한쪽으로 치우쳐져요. 그러니까 대화를 하면서 이게 이쪽으로 좀 갔다가, 이쪽으로 좀 갔다가 하면서 적절함을 유지해가는 거요.

 

보통 이러거든요. “스님, 남편 때문에 못살겠어요.” “?” 술 먹고, 어쩌고 어쩌고 해요. 이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요. 그럼 제가 탁, 저쪽 답을 줍니다. “, 그럼 이혼하면 되겠네.” 그래요. 그러면 그분이 이렇게 얘기해요. “, 이혼하면 좋지만, 애는 어떻게 하고요?” “애는 고아원에 갖다 주지.” “어떻게 애를 고아원에 갖다 줘요?” “그럼 안하고 그냥 살면 되겠네.” “술 먹는데 어떻게 살아요?” 이렇게 하면서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다가, 적절함을 스스로 찾아가는 거요. 이게 적절하다고 내가 답을 줄 수 없어요. 그 사람 형편에 적절함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저분, 부모님 집에 가는 것도, 이게 가야 된다. 안가야 된다. 이게 편견이에요. 부모니까 가야 된다. 싫으니까 안가야 된다가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쉬우면, 왜 나한테 묻겠어요? 그러니까 부모로서 가야되니까 병이 들고, 병이 든다고 안 가려고 하니까 또 부모로서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이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런데 늘 이렇게 저렇게 치우치잖아요. 그러니까 병이 심하면 어떻게 한다? 병이 더 중하니까, 안가는 쪽을 선택해야 되겠죠. 우선 응급치료는. 안가서 응급치료를 하고, 병이 조금 회복되면 계속 안가는 게 아니고 다시 한 번 가봐서 어느 정도로 이게 치료가 되었나를 점검을 해야 되겠죠.

 

또 멈추고, 또 해야 되고. 이렇게 이렇게 참회기도를 하면서 나중에 갔더니 전에 보다는 덜하다. 그러면 다음에 조금 자주가 보는 거요.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가도 되는, 이런 적절함을 유지해 가는 게 뭐다? 수행이에요. 그러면 중도는 어떤 거라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건 교리고, 지금 이렇게 그 원리를 여러분들의 지금 생활 속에서 그런 용어 한마디 안 쓰고, 자기가 경험할 수 있도록, 지금 조정해 주는 거요. 그래서 적절함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탁 거렸다. 그럼 뭐, 바꿔 봐도 되요. 바꾸어 보려니까 호적도 바꾸어야 되고, 뭐도 바꾸어야 되고. 일이 복잡하잖아요.

 

또 안하려니까 애가 나빠지니까 걱정이고, 이렇게 되니 묻는 거요. 그러니까 대화를 하면서 마음에 걸리면 해볼 수도 있는 일이고, 또 달리 생각하면 또 반드시 맞는다고는 할 수가 없고, 그러면 적절하게 지금 해볼 수는 있는 거 뭐요? 이름 하나 지어 와서 우선 집에서 불러보는 거요. 호적 바꾸는 건 놔놓고. 이렇게 불러보면서, 그러면 그것도 이름 바꾸는 것도 부담스러우면 절에 가서 뭐한다? 법명을 하나 지으면 두 개 다 불러도 되잖아. 이렇게 불러보면서 내가 ..” 그냥 안심을 하는 게 뭐다? 해결책이오. 애가 뭐가 좋아지는 게 아니고, 내가 안심하는 게, 그 말을 들은 거에 대한 무거운 짐이 내려놔지면 그게 해결책이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