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13강 삼귀의 4

Buddhastudy 2017. 7. 21. 22:50


  

수행방법이 조금 틀립니다. , 남자 분들이 많으니까 오늘 남자를 중심으로 한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거사님이 여기 유명한 재벌회사에 상무인데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10몇 년 전 얘기에요.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깜짝 놀라서 받으니까 당신 부인이 지금 경찰서에 있으니까 데려가라.”는 거요. 그래서 무슨 얘기냐? 그러니까 낮에 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 가서 놀다가 경찰에 붙들려서 경찰에 지금 잡혀와 있다. 데려가라는 거요.

 

, 이렇게 전화를 받으면 남자들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나겠죠. 나는 새벽부터 나와서 참, 샛빠지게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서 돈 벌어서 먹여 살리는데, 아이들 돌보고 살림은 안 살고, 춤바람이 나서 카바레나 돌아다니고 이 생각하면, 뭐 화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죠.

 

거기다가 또 회사일이 바쁘고 이렇게 해서 집안을 돌보지 않는 여가에 또 바람이 나서 춤바람만 난 게 아니라 다른 바람까지 났을지도 모르죠. 또 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면 되는데 경찰서까지 잡혀갈 것은 뭐요? 옛날엔 다 남자가 다시는 이런 거 안 하겠고 책임지겠다고 사인하고 그러면 내보내줬거든요. 요즘은 그런 일 없죠. 옛날에는 정부가 참 희한한 일까지 관여를 했습니다. 사생활에.

 

, 이럴 때 화가 엄청나게 났을 때 /연각승의 수행방법/은 뭐겠어요? 화가 딱 났다. 그럼 왜 화가 났느냐? 이렇게 화를 살피겠죠. 그죠? 살피면 어떻겠어요? 마누라 잘못했고 내가 잘해서 화가 났겠죠. 그럼 마누라가 왜 잘못했냐.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잘 살펴서 화에 휩싸였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깊이 그 화나는 마음을 하나하나하나하나 관조해 들어가 보면 그 아래쪽에 가면 화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빈자리를 보게 되면 화가 싹~ 없어지겠죠. 이렇게 수행하면 무슨 수행이다? 연각수행이다.

 

그럼 화가 났을 때는 이것을 어떻게 해줄까, 가서 때려줄까 이렇게 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때 평상심을 가지고 경찰서 가서 부인을 데려올 수도 있겠죠. 즉 먼저 깨닫고 남을 도울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갔을 때는 부인을 돕기는 커녕 가자마자 싸우고 두드려 패고 이럴 확률이 높죠. 그러니까 자기를 먼저 정화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남을 구제한다. 이게 성문 연각의 수행법이란 말이오.

 

그런데 /보살수행법/은 어떠냐? 그 전화를 딱 받는 순간 부인의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부인도 대학 나와서 나름대로 직장 다니고 취직도 하고 자기도 한번 해보려고 이런 걸 내가 "내가 돈 벌테니까 자넨 집에 있어라." 이래서 집에 놔놓으니까 애 키우고 이런다고 정신없이 10몇 년 살다가 보니까 세상물정도 잘 모르게 되고, 자기는 바보같이 되어 있고, 그런데 그 동안에는 애 키운다고 잘 몰랐는데, 아이들도 커서 고등학교가고 대학교가고 남편은 회사가고, 자기는 어차피 이집에 앉아서 있으니 공허하겠죠.

 

공허해서 뭔가 하나 해보려고 남편잡고 여보, 여보, 여보 얘기 좀 하자.” 하면 무슨 얘기요? 바쁜데. 돈 갖다 주면 됐지.” 이러고 아침에 나가버리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친구가 차 한 잔 마시자.”해서 나가서 차 한 잔 마시다가, 그 다음에 찜질방에 가자.” 해서 따라갔다가 영화가자.”해서 영화 따라갔다가 그다음에 춤이나 추자해서 따라갔다가, 그럴 때 늘 자기 이런 것에 대해서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을 남편하고 나누려고 대화를 시도해보면 바쁘다 그러고, 피곤하다 그러고. 쓸데없는 소리 한다 그러고. 집에서 할일 없으니까 괜히 번뇌만 많다고 그러고. 그렇게 외면해 왔다 이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그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했으면 내 부인이 거기까지 가게 되었을까? 이 생각을 딱 하게 되면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안 나겠죠. 그 사람의 아픈 심정이 탁! 그냥 가슴에 박혀오면 화가 하나도 안 난다. 그러니까 경찰서에도 바로 전화를 해서 가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면 보통 안가거든요. “. 고생 좀 해라.” 하루나 이틀 데리러 안 가버린다. 이 말이오.

 

그런데 즉시 쫓아가서 경찰이 마누라 이런 거 당신 알았냐?”고 이러니까, 이 사람이 도리어 경찰한데 화를 내면서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우리 부인이 우울증이 있어서 진찰을 받아서 일부러 거기 보냈는데, 당신이 왜 잡아 왔느냐?”고 고함을 지대고 싸우고 하니까, 경찰이 할 말이 하나도 없죠.

 

그렇게 해서 부인을 차에 태워서 바로 옛날에 연애할 때 갔던 호텔에 데리고 가서 식사도 하고 술 한 잔 먹으면서 남편이 부인한테 사과를 했어요. “여보, 미안해. 당신 마음이 그렇게 외롭고 허전 한 거를 나는 돈이나 많이 벌면 우리가 행복한 줄 알고, 그저 돈버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당신의 고통을 내가 몰랐소. 정말 미안하오. 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

 

이러니까 부인은 맞아죽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잘못했다 생각해도 남편이 와서 두드려 패고 난리를 피웠으면 내가 이렇게 마음이 허전할 때 내 마음 알아준 적 있냐?”고 도리어 독기가 서렸을 텐데, 이렇게 변하니까 부인은 그 섭섭한 지난 20년의 그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단 말이오. 그렇게 해서 신혼부부처럼 되어버렸어.

 

그러면 이때, 이 남편은 그런 아내를 만나서 마음이 괴로웠어요? 안 괴로웠어요? “아내가 카바레 갔다. 경찰에 잡혀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남편은 마음이 괴로웠어요? 안 괴로웠어요? 하나도 안 괴로웠죠. 화가 안 났죠. 왜 그랬을까? 그 아픈 부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버리니까, 본인에게 아무런 화가 안 일어났단 말이오.

 

이런 수행법을 뭐라고 한다? 보살수행법이라고 한다.

 

중생의 아픔을 껴안으면 누구의 괴로움이 없어진다?

자신의 괴로움이 없어져요.

내가 깨달아서 중생을 교화한다든지,

한쪽은 교화하고 한쪽은 깨닫고 이런 게 아니고,

마음을 깊이 관하고 이런 것도 아니고,

 

그 일체 중생의 고뇌를 그냥 아픔으로

그 비심으로 대비심.

그러니까 보살의 첫 마음이 비심이오.

그 아픔을 안으므로 해서

자기의 고뇌가 사라져버리는 수행이오.

 

보살수행이 뭔지 아시겠어요? , 이렇게 해서 깨달음의 길로 가는 수행을 보살수행이라 이래요. 거사님들 알았습니까? ㅎㅎㅎ

 

그러면 대승불교는 보살로 승단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이라는 말은 깨달은 자거든요. 이런 이치를 깨달은 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머리를 깎은 스님이든 그 전 불교에서 말이오. 머리 깍은 스님이든 머리 기른 재가신자든 이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그가 이런 이치를 깨달아서 정진을 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아서 승단을 구성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 보살 중에는 출가한 남자스님도 있고, 출가한 여자스님도 있고, 재가한 남자신도도 있고, 재가한 여자 신도도 있을 수가 있겠죠. 반대로 출가한 스님 중에도 보살이 못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똑같이 재가 신도중에도 보살이 못된 사람이 있겠죠. 그러니까 구성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어. 이게 대승에서는 보살의 무리로 승단을 구성한다해서 우리가 바루공양할 때도 대승보살 중, 이런 말이 있단 말이오. 대승은 보살의 무리로 승가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테라밧다에서 봤을 때는 그 상가 구성원으로 재가자 중에도 끼어있으니까 저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래서 비불설이다. , 불교도 아니다. 이렇게 했던 거고, 바로 이 대승 불교에서, 이런 철학을 갖고 새로운 불교 이런 사람들은 우리는 수레로 비유한다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나만 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말 타고 가면서 뒤에 수레를 하나 달고 여러 명 태워가. 이렇게 나만 해탈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동시에 마누라까지 같이 가버려. 내가 해탈한 뒤에 부인의 어려움을 구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나와 부인이 동시에 가버린단 말이오. 이게 자타일시성불도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러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뭐다? 대승, 큰 수레고, 너희는 너희도 그렇게 공부해도 되긴 돼. 되기는 되는데 그것은 너밖에 못 간다. 조그마한 수레다. 그래서 너희는 소승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대승불교요? 소승불교요? 대승불교를 하면서 승가 구성은 어떤 식으로 한다? 소승식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신도들이 그래요. “대승불교는 사부대중으로 승가를 구성하는데, 신도도 거기에 넣자.” 이러는데, 맞지 않습니다. 그것도 맞지 않아요. ? ‘대승의 승가의 구성은 깨달은 자로 상가를 구성한다.’ 이렇게 되어있는 거요. 보살로 상가를 구성을 하는 거지, 보살이 될 자격은 승려나 승려 아닌 사람이나 누구나 다 있지만,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승가의 구성원이 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신도들은 이걸 모르고 그냥 일반신도 절에만 등록하면 다 우리도 승단의 일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까 아무튼 깨달아야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가 있다. 깨달았다는 것은 뭐냐? 이런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깨달았다는 거지 혼자서 나도 깨달았다.” 이런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냐하는 것은 절에 오랜 다닌 보살님은 누구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남편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어요. 남편이 절에 오래 다닌 사람은 부인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당신 남편 좀 바뀌었습니까?" "절에 다니다 요새 사람이 많이 되었습니다."이러면 공부가 좀 된 줄 생각하면 되요.

 

, 그러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승불교 테라밧다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불보로 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고 하는 사암 12부 경전을 다르마로 보고, 십대 제자, 5백대 제자, 1200대 제자를 승가로 본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부처님을 불보로 보고 팔만대장경을 다 법보로 보고, 성문 연각 보살 조사까지 다 뭐로 본다? 승보로 본다.

 

더 크게 나가면, 더 크게 벌려버리면 깨달은 사람은 다 부처다. 예수님도 깨달았다면 그분도 부처다. 이렇게 깨달은 자는 다 부처다. 불보다. 이렇게 정리하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한량없이 많겠죠. 그래서 우리가 /상주일체불타야중.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처님께 내가 다 귀의합니다./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그게 뭐라고 이름이 뭐라고 되어있던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다 뭐다? 법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길로, 그가 종교에 들어왔든 안 들어왔든 어떤 종교에 있든 관계없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들은 다 승보다. 이렇게 정의해 버리면 다른 종교도 불교가 포용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이렇게 크게 규정하면 다른 종교까지도 다 깨달음의 길로 추구하는 것은 민족과 인종 종교 모양 형식을 넘어서서 다 불교라는 울타리에 넣을 수 있고, 조금 좁혀서 대승적으로 규정을 하면 소승이든 대승이든 밀교든 종파든 관계없이 다 불교라고 할 수 있고, 테라밧다 식으로 더 좁혀버리면 테라밧다 불교만 뭐다? 불교의 근본이고 다른 것은 다 엉터리다. 이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규정을 어떻게 지을 거냐에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왜 제가 이 3가지를 다 설명해요? 제가 다 폭넓게 말하는 이것만 불법승 삼보다 이러든지, 좁혀서 이것만 불법승 삼보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나가서 이 세상에 만나는 불교는 그런 불교와 만나는 게 아니다. 요런 색깔의 불교도 있고, 요런 색깔의 불교도 있고, 요런 색깔의 불교도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 색깔을 지금 내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 색깔을 여러분께서 보시고, “, 저 스리랑카가면 이분들과 대화를 할 때는 이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러면 대화가 잘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되겠죠. 깨달은 자는 다 부처님이오,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는 다 부처님의 제자라 했고,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은 다 법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이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 시간이라도 긴요히 들어야 되겠다. 이런 마름을 내야 된단 말이오.

 

내일 모래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와서 할 때는 에이, 법당 앞에서 스님도 아닌 사람이 앉아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이 스님의 다른 모양의 옷을 입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앉아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러면 큰 테두리를 가지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죠.

 

*귀의불

, 그러면 불보라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에요. , 내 인생의 목적이 뭐다? 부처되는 거다. 깨닫는 거다. 돈버는 거? 권력 잡는 거?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거다. 최 위에 목적, 최고의 목적은 깨닫는 거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마음가짐을 가질 때 /부처님께 귀의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

 

*귀의법

그리고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분의 그 가르침에 따라 그 방법을 선택해서 가겠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마음을 가질 때 그것이 바로 법에 귀의하는 거다.

 

*귀의승

그리고 혼자 가는 것 보다는 같이 가는 게 좋다. 그죠? 그래서 여러 도반들과 내가 이렇게 같이 그 길로 나아가자. 내가 모르면 그들이 가르쳐주고, 내가 알면 그들에게 가르쳐주면서 같이 가는 게 좋겠다. 이럴 때 우리가 공동체를 만든단 말이오. 이 공동체를 승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은 깨달은이를 찬탄하고 공경하는 태도,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그 법에 대해서 기쁨을 갖는 태도, 그리고 이 함께 나아가는 이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함께 실천해 나가는 이런 태도를 갖는 게 우리가 가장 현실적으로 이해했을 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 이런 의미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그런 거요.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죠. 공부를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좋은 벗이 있다는 것은 수행의 한 반은 그냥 해결해주는 것 같아. 그래서 부처님께 "부처님, 좋은 벗은 수행의 반은 되겠죠?" 아난존자는 좀 많이 잡아서 얘기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니야 그랬어. “아난아, 좋은 벗은 수행의 전부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또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여러분과 함께 가는 사람들이 그 목표로 가는 사람들하고 같이 도반을 해야 도움이 되지, 복 얻으러 다니는 사람, 뭐 딴 거하는 사람하고 같이 섞여서 다니다보면 금방 물들어서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불법인냥, 그것이 깨달음인냥. 이렇게 기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 너 착하다. 너 깨달았다.”하면 진짜 깨달은 줄 안다든지, 그것은 다 환상이죠. 예를 들어 이런 목적이 분명해 지면 이 공부가 금방 되는데, 엉터리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다보면 헷갈린단 말이오. 자꾸.

 

그래서 좋은 벗을 만난다는 것은 수행의 전부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늘 같이 하는 도반과 더불어 탁마, 서로 지적해주고, 서로 물어보고, 반성하고 이렇게 가는 게 매우 좋다. 좋은 도반이라는 것은 경쟁의 상대가 아니에요.

 

, 그러면 한번만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무인 광야를 가게 되는 터이니

여러 가지 공포를 맛볼 것이니라.

만약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를 마음속에서 이와 같이 염하라.

여래는 응공, 정등각, , 세존이시다 라고.

그렇게 염하면 그대들의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가 설하신 가르침은 현재에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그대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교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의 교단은 잘 수도하는 사람들의 집단,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복전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