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오늘 프린트물 보시고, 또 교재는 38페이지 펴시고요, 오늘 강의 내용은 그 삼보 가운데에서 승보에 대해서 오늘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프린트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가지 화합.
부처님은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6가지 화합하는 법이 있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하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추어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은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에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 해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에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계율을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뜨리지 말아라.”/
이 글은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당시에 코삼비에 살고 있는 스님들이 계율문제를가지고 “어겼다. 어기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어. 이것이 다시 패가 형성이 되어서 크게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승가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라고 이렇게 간곡하게 화합하는 6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비구들은 이미 자기 견해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의 말씀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 이것은 저희들의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만히 계십시오.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러면서 한 사람을 보고 “당신은 계율을 어겼다.” 그 사람은 “나는 계율을 어긴 적이 없다.” 이렇게 해서 계속 다투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도 듣지 않고 다투니, 여기에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하고 부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숲속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정진을 하고 계셨다. 그때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서 말없이 떠나셨는데,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알고 봤더니 스님들이 서로 다투어서 부처님께서 이곳을 떠났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재가신자들이 이렇게 화합하지 않는 승단에는 보시를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서 모든 신도들이 일체 코삼비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바루를 들고 탁발하라 집집에 가 봐도 아무도 주지 않았어요.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도 공양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고집 센 사람도 밥 굶고는 살수가 없죠. 요즘은 스님들이 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주든지 말든지 쓸 수가 있지만, 옛날에는 부처님께서 아무도 갖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매일매일 공양을 얻어먹어야 되는데 그것을 안줘버리니까, 또 배가 불러야 싸우지 배고픈데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들은 다툼을 멈추고 부처님이 계시는 먼 곳까지 걸어서 부처님께 참회를 하러 갔다. 그 이후에 다시 얘기가 진행이 되는데, 그러니까 스님들이 싸운다고 "에이, 교회나 가버려야 되겠다." 이렇게 해야 되겠어요? 아니겠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는지는 경전에 자세히 다 나온다.
그러니까 어른의 말을 듣지 않고 다툴 때 어른이 한편을 들어서 싸워야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것들이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아니라, 경전에 보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부처님께서 다 이렇게 보여주셨다. 여러분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 것 같아요? 예.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여러분들은 불법을 위해서, 스님들을 위해서 보시한 게 아니고, 내 복을 얻기 위해서 투자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복 받기 위해서 돈을 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공양이 진실로 대중을 위하고 진실로 불법을 위해서 보시를 한 것이었다면 능히 당시에 재가신자들처럼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보시가 정말 그런 보시였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주식을 사는 것처럼 은행의 이율을 받기 위해서 예금을 하는 것처럼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보시를 하는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태를 멈출 수 있는 재가자의 어떤 힘도 발휘할 수가 없다.
이러한 기복 불교가 스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문제가 있고, 이 다툼이 스님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이 절에 다니는 그 목적이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에 쌓이고 쌓임이 결국은 다툼의 원인인 것이지, 여러분들을 떠나서 다툼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겠느냐.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 같이 반성을 해봐야 되겠다.
그래서 오늘은 승단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요 부분만 별도로 떼어서 다시 한 번 경전에 있는 내용을 갖고 자세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상가는, 즉 승단은, /상가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을 하세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뭐하고? 뭐해야 한다고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그래서 화합승가, 청정승가 이래요. 승가하면 그 가장 큰 특징은 청정하다는 거요. 승가하면 가장 큰 특징은 화합이라는 거요. 그러면 청정은 뭐냐? 뭐에 청정하냐? 계율을 잘 지킨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어. 상가에 소속된 그 구성원들은 그 조직이 갖고 있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 규칙을 잘 지킬 때 뭐하다고 말한다? 청정하다고 말하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하면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다. 부패했다. 이런 말을 하겠죠. 그것이 바로 청정성을 잃었다. 세속의 물들었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이 청정은 또 특히 재물에 있어서 청정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근본 중에 하나가 뭡니까?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이런 말일까?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런 말일까? 누구의 것도 아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 안 갖고 있느냐? 적게 갖느냐? 많이 갖느냐? 이것이 근본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물건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 누구의 소유도 될 수도 없다.
저 하늘의 빛나는 태양이 누구의 것이 아니듯이, 저 별이 저 공기가 저 흐르는 물이 누구의 것이 아니듯이, 그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세상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게 무소유요. 그러니까 누구의 것도 아니니 누가 써도 좋다. 누가 써도 좋은데 어떤 사람이 쓰느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만물은 어떻게 쓰여져야 한다? 필요에 의해서 쓰여져야 한다.
‘이것이 약이다’ 하는 물건이 있을까? 아픈 사람이 먹어서 낫는 것을 약이라 이름 할까요? ‘이게 약이다’ 하는 물질이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아픈 사람이 먹어서 나으면 그것을 약이라 이름 할까? 헷갈려요? 하도 이게 약이다 하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 약이다 하는 것이 본래 제법은 공하다 이 말이겠죠. 아픈 사람이 먹어서 병이 나으면 그것을 약이라 이름하고, 멀쩡한 사람이 그것을 먹고 병이 나면 독이라 이름 한다.
그러니까 한 물건이 있는데, 어린 아이의 엉덩이로부터 노란 물건이 툭 떨어졌어. 한 물건이 있다. 이게 방안에 있을 때는 ‘오물’이다. 이렇게 이름 한단 말이오. 오물이라는 말은 필요 없는 물건이다. 이 말이겠죠. 그런데 요게 밭에 가면 어떻게 되요? ‘거름’이라 이렇게 이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높은 데 있다 떨어져서 응어리가 져서 허리가 제대로 안 펴지고 근육도 제대로 안 풀리고 이럴 때 옛사람은 똥물을 먹거나 똥떡을 먹었어요.
그러면 이 어린아이 채소를 넣어 잘 구워서 먹으면 나아요. 그러면 이때는 똥을 먹었답니까? 약을 먹은 거요? 약을 먹은 거요.
그러니까 똥이란 게 없어요.
그것을 오물일 때 이름하여 똥이라 하고,
밭에 가면 거름이라 하고,
병이 났을 때는 약이라 이름하는 거란 말이오.
이게 실제의 세계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럼 이 세상 만물은 어떻게 쓰여지느냐? 필요에 의해서 쓰여 진다. 약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쓰여져야 되겠죠. 여러분들 건강한데, 약이라고 막 먹으면 됩니까? 안 되죠.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약이 아니오. 오히려 독이오. 아플 때 그게 뭐가 된다? 약이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물건의 효용가치는 아픈 사람이 먹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돈 있다고 아프지 않는 사람이 주워 먹고, 돈 없다고 아픈 사람이 못 먹고, 이게 이 세상의 모습이란 말이오. 그럼 뭐가 음식일까요? 배고픈 사람이 먹어서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은 다 뭐요? 음식이에요. 그런데 먹어서 병 들면 음식이 아니오. 음식이 아니죠. 그것은 독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하는,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까? 없어요.
너는 북한 사람이니까, 너는 빨갱이니까 너는 먹지마라 이런 것은 법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공기는 숨 쉬는데 필요하죠. 누구나 다 숨 쉴 수 있죠. 예. 그런데 “너는 오늘 나쁜 짓 했으니까, 너는 숨 쉬지 마.”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햇볕은 누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은 누구다 쪼일 수 있고,
공기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숨 쉴 수 있고,
음식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배고픈 자는 다 먹을 수가 있는 거요.
그게 원래 만물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이치대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를 대서 내것다. 네 거다. 이렇게 해서 서로 가지려고 지금 다툰다. 이거야. 내거라면 남에게 주면 뭐가 될 수 있습니까? 복이 될 수 있죠. 이게 본래 내게 아니라면 남에게 줘도 복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 보살은 복을 받지 않는다. 이래요. 왜? 이 만물이 본래 내거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 육신까지 남을 위해서 베풀어도 “내가 너한테 줬으니 너 나한테 뭐 좀 보답을 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없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들이 이 법당에 와서 지금 두 시간이나 이렇게 생명의 근원인 숨을 쉬고 있죠. 그러면 저한테 감사하다고 그래야 될 거 아니오. 이 법당에 예를 들어서 법륜스님 거라면 이 법당 안에 있는 공기도 누구 거요? 법륜스님 거니까. 여러분들 두 시간이나 살려줬잖아요. 그런데도 제가 여러분들이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 하고, 고맙다는 생각도 안하고, 저도 여러분께 살려줬다는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공기를 내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진리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청정하다의 핵심은 무소유의 그 진리를 체득해 있으면 저절로 청정해 지는 거다. 청정하다는 계율을 잘 지킨다는 의미들이지만, 더 근원적으로 가서 말하면 무소유의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즉, 무소유는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한테 보관하라고 많이 갖다 놓으면 내가 많이 가지고 있어요? 안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지.
그러나 이게 내거에요? 내거 아니에요? 내게 아니겠죠. 그러니까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다 가져가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부자라 하더라도 수행자라면
그 재물이나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여러분께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에게 보관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된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줘야 되는 거요.
주는 게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죠.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줄 때
이것을 무주상보시다.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살은 복을 짓지마는 복을 받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단 말이오. 복을 짓는다는 것은 베풀어주니까 일반 용어로 복을 짓는다. 우리는 다 복을 지을 때 뭐하려고 복을 짓습니까? 복을 받으려고 복 짓지. 복을 안 받을 바에야 복질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왜 복을 탐하지 않고 복을 받지 않는다. 불수불탐이라 그러느냐?
그것은 본래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승가는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재물에 대한 욕심, 지위에 대한 어떤 욕심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승가의 구성요소에서 자격이 미달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만약에 그러면 이렇게 청정해야 되는데 청정하지 못했을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욕심을 내지 않아야 되는데도 욕심을 낼 때가 있고, 계율을 어기지 않아야 되지만 계율을 어길 때가 있죠. 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참회를 해야 된다. “아이고 제가 깜빡했습니다. 제가 잘못했군요. 제가 그냥 갑자기 어리석은 생각이 나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잘못은 누구나 다 저지를 수가 있다. 범할 수가 있다. 출가한 승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적어도 수행자라면 잘못인 줄 빨리 깨닫고, 잘못인 줄 알았을 때는 뉘우쳐 참회할 줄 알아야 된다.
그런데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잘못인 줄 알았는 데도 참회할 줄도 모른다면 이것은 범부나 아무 다름이 없다. 이 참회를 하는 데는 스스로 “아,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뉘우치는 것을 보통 참회라고 하고,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아, 제가 이러이런 일은 참 잘못했습니다.”라고 구체적인 계율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대중 앞에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을 포살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 다음에 내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몰라요. 그럴 때 도반이 “여보 자네, 이러이런 것은 자네계율을 어긴 게 아니냐.” 딱 듣고 “아, 그래.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 도반이 지적을 해줘서 탁마죠. 지적을 해줘서 잘못을 깨닫는 이런 수행법도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그러냐? 자자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승가는 반드시 보름마다 포살을 해야 합니다. 계율을 두고. 그리고 3개월 안거가 끝날 때는 대중이 다 모여서 자자를 행해야 한다. 그러면 이 승가는 청정성을 훼손시킬 때도 있지만, 보름마다 포살을 통해서 또 1년에 한 번씩 안거가 끝나면 자자를 통해서 그 훼손된 부분을 청정하게 도로 복귀한다. 그래서 늘 승가를 청정하게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스님들이 대중을 위해서 법회를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승가가 모여서 포살을 해서 스스로를 먼저 청정하게 한 다음에 그렇게 법회를 하지, 자신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지도 않고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초하루나 보름마다 모여서 승가는 포살을 행하고, 그날 대중은 승가에게 공양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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