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윤회와죽음

5.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2월23일 방송 - 업의 개요 (15:01)

Buddhastudy 2012. 5. 6. 20:45

  출처: 유나방송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까지 서른한 가지 세상, 삼계. 욕계색계무색계를 서른한 가지 세상으로 나누어서 개원적으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윤회를 할 때 이 서른한 가지 세상 중에 어떤 세상에 태어나는가? 하는 거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 바로 업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그 업에 의해서 다음 생에 서른한 가지 세상 중에 한 곳에 태어나게 되겠죠. 이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내가 원하는 세상에 가고자 한다 하더라고 거기에 합당한 업을 짓지 않는다면 여러분들 마음대로 이곳이나 저곳에 자기가 원하는 곳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업이 어떤 곳에 태어나는지를 알고, 만약에 내가 원하는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맞는 어떤 업을 지어야만이 내가 원하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고, 또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 업을 소멸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서른한 가지 세상 중에 한 곳에는 반드시 태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거 같아서 먼저 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에 따라서 그것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다음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어려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좋은 어떤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아주 나쁜 마음으로 또 게으르게 살았다면 다음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다음에 우리에게 닥쳐올 삶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 삶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마음을 선한 마음이라고, 그렇지 않은 마음을 불선한 마음이라고 한다고 간단히 말씀을 드렸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선한 마음을 많이 일으킨다면 그것은 다음에 우리가 좋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고 만약에 불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킨다면 그것은 다시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가 다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가 한번 일으킨 마음은 순간적으로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마음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잠재력, 가능성은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일반화해서 우리가 설명을 할 때 업이라는 것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업이라는 것에 정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업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선한 마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을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그 선한 마음, 또 우리 삶을 해롭게 하는, 또는 불행하게 하는 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의 의도를 업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도에 의해서 우리 세상사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선한 의도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선한 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불선한 의도로써 어떤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때의 마음은 그때의 의도를 불선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에 있는 의도, 즉 선한 의도와 불선한 의도를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의도에 의해서 우리가 삶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이 의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게 되면 이 의도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 의도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의도라는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의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잠재력을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업력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이해할 때는 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업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업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지지만 업력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적당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 실제로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맺는 것은 업이 결과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결과를 맺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과 씨앗이 있습니다. 이 사과 씨앗을 땅에다 묻으면 사과 씨앗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사과 씨앗을 심은 곳에 물을 주고 또 적당한 거름을 주고, 또 보살피고, 햇빛을 적당히 주고, 햇빛을 적당히 있게 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정성을 쏟으면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는 거가 되겠죠.

 

그렇게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면 언젠가는 이 사과열매가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과씨앗은 그때, 땅에 묻었을 때 벌써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과 씨앗이 가지고 있는 이 사과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 사과열매는 맺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과 씨앗은 땅에 묻어서 얼마 안 지나서 사라졌지만, 그 사과 씨앗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이것이 적당한 조건, 다시 말하면 거름, , 이런 돌봄, 햇빛, 이런 적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사과열매라고 하는 그런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거겠죠. 이 업도 이와 똑같습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에 업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겠죠. 의도와 마음은 함께 일어났다 사라지니까.

 

하지만 이 의도가 가지고 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하면 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업력이라고 한다 했죠. 업력이라고 하는 것은 적당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나 자기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동안 행했던 모든 마음들, 우리가 일으켰던 마음들은 선한 마음을 일으켰거나 불선한 마음을 일으켰거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잠재되어 있다가 언제든지 기회만 만나면 다시 자신의 결과를 맺게 되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고 있지만, 이 업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벗어나는 그날까지 언제나 조건만 갖추어지면 그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남는 것이 되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은 내가 한 행위가 결과가 맺어지지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조금 더 쉬운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옛날에 통도사 강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통도사 강원을 다닐 때 저하고 같이 공부하던 스님 중에 연세가 좀 있는 분이 있었는데, 그때 저도 어릴 때니까요 아직 잘 모를 때, 그 스님이 좀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스님에게 조금 잔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때 일 학년이었는데 일 학년 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님에 대해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연세도 저보다 많고 하니까 제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좀 싫어하셨겠죠.

 

그런데 저는 뭐 그걸 잘 모르게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어떤 상황이 안 좋은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통도사 강원을 떠나는 상황이 되어서 다른 강원으로 옮기려고 통도사 강원을 떠났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다시 그 강원으로 돌아갈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 조계종에서는 원래 있다가 다시 나갔을 때는 그 우리하고 같은 학년의 모든 스님들이 강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찬성을 해야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번 나갔을 때 다시 들어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제가 다시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결국은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중에 제가 옛날에 그 스님을 나이 많은 스님에게 잔소리를 한 바로 그 스님이 제가 다시 그 강원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저는 그 강원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범어사로 가서 강원을 졸업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업과 업력의 관계입니다. 제가 그때 그 스님에게 잔소리를 한 그 싫은 마음을 냈던 것은 내가 지었던 불선업 입니다. 나의 마음에 그 스님에 대한 불만족, 다시 말하면 이건 성냄에 해당합니다. 그런 성냄은 그 순간에 사라졌지만 그리고 그 성냄이 사라지고 나서 그것이 전혀 우리 삶에서는 전혀 영향이 없는 것처럼 잠재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강원에 들어가려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제가 지었던 그 업이 내가 그 강원을 들어가지 제가 그 강원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이때 작용한 것은 업이 작용을 한 것이 아니라 그때, 제가 오래전에 지었던 그 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어떤 조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 그 상황의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그런 업의 결과를 맺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업을 이해를 할 때는 업과 업력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을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간단히 말씀을 드리지만, 업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킬 때 일어나는 선한 의도나 불선한 의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업은 순간적으로 사라지지만, 이 업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가능성, 또는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은 우리가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언제나 그 결과를 맺을 때까지 가능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소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단 우리가 지은 업은 우리가 그 업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업은 선한 업을 지었으면 그 선한 업의 결과는 반드시 언젠가는 결과를 맺습니다. 그리고 악업을 지었다면 반드시 그 악업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선업을 지었는데 악업의 결과가 나타난다거나 선업을 지었는데 악보가, 그러니까 괴로운 과보가 나타난다거나, 불선업을 지었는데 선한 과보가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선한 업은 우리에게 선한 과보, 다시 말하면 복과 행복이 오고, 불선한 업을 지었을 때는 괴로움이 오는 그런 과보로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업을 지었는데 이 업의 과보로써 나타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수행을 해서 업을 소멸하고 업을 바꾸는, 이런 일들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이런 업은 단순히 A라는 업을 지으면 A'라는 결과가 있고, B라는 업을 지으면 B'라는 결과가 있는, 이런 기계적으로 업이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