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윤회와죽음

5.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2월23일 방송 - 업의 개요 (30:12)

Buddhastudy 2012. 5. 6. 20:46

  출처: 유나방송

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서로 간의 아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서로서로의 어떤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따로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금덩이경 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소금을 한주먹을 손에 쥐고 아주 작은 술잔에다가 아주 작은 컵에다가 물을 담아서 그 물에다 이 소금을 넣는다면, 그 컵에 있는 물은 말할 것도 없이 짜질 겁니다. 하지만 한강물에다가 여러분들이 이 소금을 만약에 한 주먹 넣는다면 이 한강물은 짜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사 여러분이 불선업을 지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앞으로 열심히 수행을 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훨씬 더 많은 선업. 다시 말하면 한강물과 같이 아주 많은 선업을 짓는다면 여러분들의 선업이 이 불선업이 익는 것을 방해서 희석화시켜서 그 불선업의 결과가 원래 그 맺을 수 있는 결과보다 훨씬 작은 결과로 맺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선업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불선업을 너무나 많이 짓는다면 이 선업이 제 역할을 못하고 선업이 법보로 익는 것보다 불선업이 더욱더 먼저 결과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것은 숙명론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결과가 반드시 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여러 가지 선업과 불선업이 상호작용을 해서 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뭔가 이 세상에 진리를 몰라서 함부로 살고, 나쁜 업을 많이 지었다고 생각을 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발심을 해서 다시 선업을 많이 짓는다면 이런 불선업의 결과를 훨씬 약화시키고 오히려 선업의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기 때문에 한 가지만 더 비유를 든다면 밀린다왕문경이라는 경전에는 이것을 배와 바위. 두 가지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악업이 바위로 비유를 한다면 그 바위를 떠받칠 수 있는 그런 만약에 큰 배가 있다면 그 바위가 물에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배는 자꾸 바위가 크다면 반드시 물에 가라앉을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위는 악업에 비유를 할 수 있고, 배는 선업에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에 가라앉는 것은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불선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떠받혀주는 선업이 강하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선처에 태어나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선업은 적고 다시 말하면 그 바위는 크고, 악업은 많다면 그 큰 바위를 떠받혀 줄 수 있는 배, 선업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악처에 태어나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숙명론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호적으로 여러분들이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 여러분들 노력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지었던 업을 소멸하는, 우리가 더이상 업을 짓지 않고 과거에 지었던 그런 업들이 더이상 자기의 결과를 생산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더이상 윤회를 하지 않으면 그 업을 생산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바꿀 수 없다면, 열반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업은 여러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부연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아~ 전생 업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업이라고 하는 것이 윤회를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특히 이생에서 다음 생에 태어날 때 그때는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업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상당히 모순적인 잘못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그런 것도 전생의 업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날씨가 추워져서 그로 인해서 동상이 생겼습니다. 이런 것도 전생의 업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업 이외에도 기우라든가 대상이라든가 환경,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또 어떤 선지식을 만나느냐?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이런 것들도 아주 중요한 조건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24가지로 이야기를 하는데, 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24가지 조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업이라는 것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의 조건은 아니다.

 

업 외에도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은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업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잘못 이해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되고 확정적이고 숙명론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것은 여러분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업과 여러분들이 지은 업들은 현재 여러분들이 짓는 업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상호관련 돼서 서로가 영향을 미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나에게 내가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그런 마음, 어떤 업을 짓느냐가 지금까지 지었던 업에도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이론은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아주 가소성을 가진, 변화 가능성을 가진, 그런 것이라는 것을 좀 명심을 해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업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큰 시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이생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이생에 국한해서 만약에 이생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부자로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가? 불합리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금 더 먼 시각에서,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면,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가 만들어 준 것도 아닙니다. 불교적으로 볼 때는. 자기가 전생에 불선업을 많이 지으신 분들은 이생에 태어나서 처음 시작이 어렵게 시작을 합니다. 어렵게 시작을 하고, 또 선업을 많이 지으신 분들은 처음 시작은 아주 풍족하고 좋은 쪽으로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계속 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이생에 태어날 때 아주 좋은 조건에서, 아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생에 삶을 함부로 산다면, 그 사람은 결코 다시 일생동안 항상 즐거운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비록 이생에 태어날 때는 전생에 불선업 때문에 좀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생에 태어나서 열심히 또 노력을 하고 한다면, 그 업을 받고서 더 잘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이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가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우리가 지은 업과 관계있다는 것을 이해를 하면 조금 더 폭넓게 이해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과거와 전혀 무관하지 않고 현재 여러분들이 하는 행동, 마음들이 미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잘 본다면 과거에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도 왜 현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현재를 잘 살펴본다면 미래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네가 과거를 알고 싶으면 현재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봐라. 그리고 미래를 알고 싶으면 현재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업을 이해를 하게 되면 우리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실의 좀 불합리한 것들이 결국은 자기가 전생에 지은 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현생의 삶을 노력을 해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여기와 마찬가지로 또 이런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현생에 여러분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현생에 또 비참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또 과거에 지은 업이 아주 안 좋다고 하더라도 현생에 여러분들이 노력을 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분명히 명심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을 과거에 지나간 과거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고, 우리가 이런 업의, 업의 이론을 이해하게 되면, 과거의 삶이나, 과거의 삶에 연연하거나 미래에 오지 않는 것에 연연해 하기 보다는 현재 내가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삶에 유익한 선업을 많이 짓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행복은 많아지고 고통은 줄어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업에 대해서 업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가 간단히 개요에 대해서만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면 첫째 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불선한 마음과 선한 마음에 일어나는 의도다. 다시 말하면 선한 의도와 불선한 의도가 바로 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요. 이 업은 우리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업이 가지고 있는 그런 잠재력은 세세생생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다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기회만 만나면, 또는 조건만 성숙되면 그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루 일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조심하고, 내 마음을 잘 단속해서 불선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조건에 의해서 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 불선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선업을 많이 짓는다면 그 불선업을 희석화시키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불선업을 소멸해서 다시는 그런 고통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라는 것을 명심하시고요.

 

그리고 모든 것이 업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업 이외에도 우리 삶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시고 업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를 하면은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업의 개요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업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윤회를 할 때 어떤 업이 작용을 하고 업의 기능, 역할, 또 업이 여러 가지 업을 짓는데 그런 것들이 성숙하는 순서라든가 이런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공부를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업의 개론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린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