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所傳法分
-전할 바의 法은 없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한 칠보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심히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러한 물질적 복덕은 깨달음에 직결되는 복덕은 아니지만
아상을 녹여주는 연유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나이다.”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금강경의 어느 한 구절을 지니거나
더 나이가 몇 구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 준다면
그 복덕이 칠보로써 보시한 것에 비하겠느냐.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과 법문이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나니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그렇듯 이 경전 또한 그러하니라.
-解義-
왜 보시는 끼달음으로 이어질 때 그 가치를 발하게 되는가?
불교가 탄생한 이유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여 영생과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것은 현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높은 차원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보는 가치의 기준은
중생들의 영적 성숙도이다.
이것을 잣대로 불교의 이상인 깨달음에 얼마나 접근했는지를 헤아려 평가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한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그것이 개개인의 영성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경전의 몇 구절을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줌으로써
영성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준다면
불교는 그 가치에 보다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생로병사에서 오는 시공의 한계를 직시하고
영성을 증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려는 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재물로써 하는 보시보다 법으로써 하는 보시를 더 높이 치게 된다.
그래서 전법의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시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깨달음의 상태에서 보게 되면
특정지을 만한 불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전할 바의 법이란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전법을 강조하는 동사에 전할 바의 법이 없다는
세존의 이중적 가르침이 등장하게 된다.
그럼 도대체 세존은 우리더러 법을 전하라는 건지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건지
그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불법이란 오만 가지 분별에서 벗어나
일체의 걸림이 없는 경지를 논하고 있다.
그런데 법을 전하다 보면 부지불식중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여 법의 분별성을 가중하기 쉽다.
일체의 분별을 걷어 낸 자리에
법이라는 또 다른 분별덩어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겉모습만 법이지 내용물은
법과 상이하게 된다.
법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는 분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세존은 시종일관 법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불별에 의해 왜곡될 것을 우려하여
비법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불법이 불법이 아니어야만 불법이 되는 이치
바로 불법에 대한 분별심마저 초월하여
법을 전하라는 무소전법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법이 꽤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구조는 매우 단순명료하다.
자신이 실존이라는 사실 하나만 자각하면
부처가 이룬 경지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존이 왜 성립되는지에 대한 온전한 각성을 통해
나=불 의 등식을 완성하면 된다.
이 등식 하나를 이루기 위해 불교는 존재한다.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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