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9장 수행하여 얻는 경지가 없다

Buddhastudy 2022. 11. 3. 19:26

 

 

 

修果無相分

-수행하여 얻은 경지가 없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수다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수다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이란 세류에서 벗어나 도에 갓 입문한 경지라고들 하는데

그 실상을 보면 입문한 바에 신경 씀이 없고

색생향미촉법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수다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사다함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사다함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한 번만 윤회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지라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런 윤회에 구애됨이 없기에

사다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아나함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아나함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을 일컬어 윤회를 끊은 경지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에 집착함이 없기에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아라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옵니다.

 

시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무정삼맹의 경지에 오른 비구 가운데 으뜸이라 하셨는데

이는 걸릴 바가 없는 아라한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세존시이여,

저는 사실 걸릴 바가 없는 아라한이라는 생각 자체도 없나이다.

 

시존이시여,

제가 만약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허나 제가 진실로 아란나행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解義-

 

본 장은 성불사과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불에 이르는 네 단계의 경지를 일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 한다.

 

수다원이란

아상에서 비롯되는 고를 절감하는 단계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수행에 대한 발원이 싹트게 된다.

인생이 남에 비해 초라하며 재미도 없고

이런저런 불쾌한 일들로 인해 생기는 괴로움 따위는

불교의 고가 될 수 없다.

 

불교의 고는

시공의 제약에서 오는 한계를 뼈저리게 인지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렇기에 향후 수행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원이 된다.

 

사다함이란

아상에서 벗어나 외계와의 공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인상의 경지이다.

도의 맛을 살짝 봤다고나 할까.

일체의 고액은 아상에서 나온다.

아상에 머무르는 한 고해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아상을 녹여 인상으로 만든다.

 

비유하자면

영화 속 주인공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되어 영화의 전체상과 공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좁다란 의식의 사공에서 벗어나

보다 큰 우주적 자아로 승화되는데

이때 누리게 되는 순수 공명의 경지를 사다함이라 한다.

 

 

아나함이란

삼라만상을 중생과 부처로만 보는 경지이다.

법과 법이 아닌 것으로만 보여지며

그래서 달리 중생상이라 한다.

 

실존과 허상이 뒤얽혀

한 덩어리의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게 되는데

그만큼 수행자의 법력이 증가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비법이란

자신이 법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법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자각하는 것과 그러지 못하고 무명에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해 꿈에서 깬 자와 꿈속에 빠져 있는자

두 부류만이 존재하며

이런 양단의 시각으로 보는 경지가 아나함이다.

 

 

아라한이란

삼라만상을 시간과 공간으로만 보는 경지이다.

사다함에서 거울을 들고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면

아나함은 거울을 당겨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어 바라보는 경지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나함에서의 거울이 쓸모없게 돼 버리는데

이런 경지를 아라한이라 한다.

 

거울이 없이도 일심과 하나로 존재하는 상태

이쯤 되면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고 절대 평등에 머무르게 되어

부처라 이를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이런 아라한의 경지 또한 아직은 중생이라고 단언하셨다.

왜 그런 것인가?

아직 그 이상의 단계, 즉 열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