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견성의 이 견우는
우리가 첫 걸음을 뗀 그런 시작 단계입니다.
마음의 구조물, 생각의 구조물들이
이 견우의 단계에서부터 하나둘 파괴되고 정화된다고 할까요?
더 이상 이 자아의 느낌에, 마음의 느낌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생각과 마음의 구조물들이
건물처럼 쌓아지지가 않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십우도 제3도인 견우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견우는 안전한 어떤 견성이라기 보다도
초견성에 해당됩니다.
비유하자면
날이 저문 설악산 공룡능선을 한참 헤매다가
어딘지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다가 확신도 없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가
저 멀리 ‘희운각 대피소’의 불빛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런 단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는 불안과 초조의 의심의 단계에서
드디어 불빛을 발견하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그런 단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견우가 바로 그런 단계죠.
여러분도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추운 겨울날 산을 헤매다가 불빛을 본다는 게
정말 마음에 큰 안도감이 듭니다.
과거 소승이 지리산 종주를 한 7~8번 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종주를 할 때였어요.
출가하기 전이죠.
소승의 불알친구하고
지리산 화엄사에서... 구층암이죠.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공항을 하고
구층암에서 세석산장까지 그날 하루에 다 갔었거든요.
그때는 지금처럼 산이 개발되고 그런 때도 아니고
대피소도 있긴 있었지만, 아주 조그마 했습니다.
그때는 세석평전 주변으로 텐트 치던 그런 시대였거든요.
지금은 전국 국립공원에서 텐트를 못 치죠.
여하튼 소승의 친구랑 그때 아침을 한 끼만 먹고
이 세석까지 갔었습니다.
우리 둘 다 걸음이 엄청 빨랐어요.
그런데 한 끼만 먹고 가려니까 힘이 좀 많이 달리긴 했습니다.
그러다가 연하천을 지나서 세석으로 가는데 날이 저물었어요.
초행길인데 날이 저물고
산속에서 길을 잃을까 좀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후레쉬도 없었습니다,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거죠.
그렇게 이제 밤길을 더듬더듬 길 따라서 어둠 속을 헤쳐 걷다가
멀리 이 세석산장의 불빛이 보이는 거예요.
그때의 안도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이제 다 왔다” 그런 안도감이죠.
그동안의 불안과 두려움이 그 불빛을 봄으로 해서
일시에 사라지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십우도의 견우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참나가 무엇인지 나의 본래면묵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 뭐꼬 할 때는 불안불안하고, 뭐지 하고 마음도 조급하고
“내가 깨달음을 잃을 수 있을까?” 답답하고 그러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소식이 탁 열리면서
깨어남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십우도의 견우입니다. 초견성이죠.
견우는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깨어남이에요.
이 초견성만 일어나도 심경에 사실 많은 변화를 몰고 옵니다.
의식혁명이 이루어지는 변화의 길목에 비로소 들어선 거라고 볼 수가 있죠.
화엄으로 치자면 ‘일지보살’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비록 생각과 감정에 기반한 무명의 번뇌는 그래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분리되었다고 할까요?
내 안에 ‘고요한 중심’이 자리 잡으면서 강력하게 그것이 드러납니다.
항상 여여한 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어요.
태풍의 중심에서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그런 순간인 거죠.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 초견성의 단계는
그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는
그러니까 그 무엇을 인식하는 순간, 개오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모든 존재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자면 ‘무아’라는 것이죠.
무아의 현존, 나의 본래면목은
‘그 무엇으로 정의될 수 없는 실존’이랄까요?
이런 거를 이제 우리가 뭐랄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무엇무엇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것
그 점을 깨치게 됩니다.
나의 본래면목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죠.
여러분,
산의 정상에 올라
장엄한 산 아래의 풍경을 볼 때, 산맥을 볼 때
말이 사라지는, 언어가 사라지는, 탁 막히는 그런 순간이 있잖아요.
그냥 그 순간과 하나가 되죠.
몰아일체가 됩니다.
그때 존재의 뿌리로 들어간 느낌이 들죠.
그리고 이 깨어남이 열리면
다시는 닫혀지지 않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제 견우는 깨어나고, 부활하고, 거듭난 거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깨어남이 일어나면
우리의 심신체계, 몸과 마음의 체계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서
‘재조율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첫 번째가 여러분 뭘까요?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봅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견성은 꿈꾸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에고와의 분리 상태거든요.
그 자체로 상당히 엄청난 변화인 거죠.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많은 에너지를
꿈꾸는 상태에 얼마나 많이 써왔는가를 알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인 것에
얼마나 우리가 허망하게 집착해 왔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하고, 무시를 하고
혹은 칭찬을 하고 박수를 쳐주고 그 무엇을 해도
고요한 중심이 있다는 것을, 고요한 중심이 작동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이 있어서 좋거나, 무엇이 없어서 나쁘거나
이런 상대적인 분별심에서 점차적으로 멀어집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분노, 시기, 짜증, 각종 생각과 감정의 잉여물
이런 것들에 많은 에너지를 주었지만
그 에너지의 방향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고
내적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할까요?
비유하자면 이 번뇌의 에너지가 열반의 에너지로 쓰인다는 거죠.
우리들 몸과 마음의 심신체계,
쉽게 말하면 구조조정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견우의 상태죠.
그래서 이 미묘한 에너지에 적응하는 데에는
사실 약간의 시간이 걸릴 수가 있어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견우죠.
견우는 시작 단계인 거예요.
견우의 단계는 본래면목의 명징함과 단순함
그 비어 있음에 엄청난 에너지를 마주한 단계라고 할까요?
그 단계입니다.
이제 그 에너지가 더욱 미묘하고, 강력한 에너지로
이 마음을, 이 에고를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에고의 지배에서
에고를 지배하는 진짜 주인이 되는 시발점이죠.
그래서 이 마음을 훌륭한 열반의 도구, 보리의 도구로 쓰는 겁니다.
이전에는 참선과 명상을 하더라도
마음의 고요에, 마음의 고요함에 도달하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명상에 관계없이
시장바닥이든 절간이든
움직이거나 걷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어묵동정 응대진퇴’라고 그러죠.
그런 가운데서 항상 ‘뚜렷한 마음의 고요한 중심’이 작동됨을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을 고요히 하려는
어떤 애씀이,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연스러워지죠.
그래서 이 십우도의 삼도인 견우로 인해서
마음의 구조가 재편됩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평소에는 늘 쓸데없는 망상과 환상의 젖거나
온갖 생각의 억측이라고 그러죠?
감정의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면
깨어남이 일어난 후에는
생각은 필요한 범위 내로 좁혀지고
혼자 중얼거리거나 마음의 재잘거림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거죠.
이렇게 의식이 더 이상 이 마음의 에고에 붙들려 있지 않게 되면
이 마음 자체는 이완되고 부드러워져서
활짝 열리게 됩니다.
원숭이처럼 날뛰고 망아지처럼 움직이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된다는 거죠.
이 과정은 매우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우리 마음이 ‘의식혁명’에 맞춰져서
새롭게 깨달은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마음과 뇌의 어떤 ‘재조율’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견성한 사람은, 견우한 사람은
초기에는 이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마음 사용이 좀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에크하르트 톨레라는 이분도
자기 마음을 사용하는데 꼬박 2년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상황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사실 그냥 자연스럽게 냅두면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이 찾아갑니다.
그리고 불면증 현상도
전혀 조급해하거나
“어라, 잠을 못 자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잠이라는 건
과도한 생각과 감정의 증폭으로
뇌가 피곤해지고, 뇌가 휴식기가 필요해서 잠을 자는 거잖아요.
견우가 일어나면, 견성이 일어나면
과도한 생각과 감정의 증폭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속의 재잘거림이나
쓸데없는 망상과 생각이 많이 줄어들거든요.
마음이 맑아지고, 투명해지고, 단순해지고, 단단해지고, 단아해집니다.
그래서요. 잠이 적어집니다.
부처님도 1시간밖에 안 주무셨거든요.
그건 자는 건 아니고 그냥 누워서 릴렉스, 휴식하는 상태거든요.
성철 스님이나 한암 스님이나 우리나라 고승들을 보면
잠을 아예 10년간 이렇게 안 주무신 분들도 있는데
바로 그런 연유라고 할 수가 있어요.
뇌의 이상으로 잠이 안 오는 일반적인 불면증이 아니에요, 그런 거는.
몸에서 잠을 요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잠잘 필요가 없습니다.
억지스럽게 잘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과
견성한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그리고 생각과 감정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느끼는 방식에도
삼라만상을 대하는 방식에도
이 감각이라고 할까요?
이 감각이 매우 예민해집니다.
이게 날카로워진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인지, 그리고 시야가 넓어집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 장’들을 우리가 직관하게 된다는 거죠.
어떤 사람이 느끼고 있는 것을 내가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식물이나, 꽃 하나에도
생명의 에너지 같은 그들의 어떤 정서와 기분을 직관하기도 합니다.
그 기운을 느낀다는 거죠.
이게 에너지 차원의 확장이 일어난 상태예요.
또 그들과 에너지 차원의 공명이 일어나면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견성한 사람, 견우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소승 같은 경우도
가끔 새가 옆에 앉아 있거나
머리를 쓰다듬어도 도망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오랜 기간 소승은 육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몸에서 품어지는 그런 ‘살업의 기운’도 없겠죠.
물론 이런 현상에
자만에 빠지거나 아상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대단한 거라고 또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고, 부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과시한 나머지
사자 우리에 뛰어 들어간 사람 있잖아요.
여러분 그런 경우가 정말 있었거든요.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잡아먹혔습니다. 죽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목사들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고.
사실 이런 목사님들이 괜히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자신의 믿음과 신앙 안에서 어떤 신비롭고 경이로운
그러니까 신의 체험이 있었던 거예요.
분명 자기가 봤을 때
이건 신의 계시이고, 신이 나를 보호해 주고, 신이 나를 돌보신다.
문제는 뭐냐?
그런 체험을 자만한 겁니다.
이것이 잘못된 후유증일 수가 있어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그런 느낌들을 꿰뚫어 봐야 됩니다.
그런 경험과 체험으로부터 이 자아의 느낌을 직시해야 합니다.
잘못되면 다시 이 ‘에고 덩어리’가 형성됩니다.
그동안의 영적 성장이랄까
이걸 한 방에 그런 교만과 자만에 빠져서 무너질 수가 있거든요.
모래성이 돼버리는 거죠.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새로운 수준의 느낌, 각성, 에너지 흐름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탄허스님의 제자 중에 한 명이
참선을 하다가 문득 산문 밖에 어떤 사람이 오는지
방 안에서도 다 보이고
그 사람의 신수라고 할까요? 사주팔자라고 할까요?
그 사람들의 미래와 과거가 훤히 보이는 신통이 조금 열린 거예요.
그래서 이 제자가 탄허스님께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말씀드렸어요.
스님이 뭐라고 했겠습까?
탄허 스님은
그런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휩쓸리지 말고
하던 대로 정진해야 된다고 일깨워줬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이 너무 신비롭고
자기가 경험해 보고 체험해 보지 못한 그런 세계잖아요.
일단 신기하고, 또 자신이 뭔가 대단해진 것 같고
그래서 큰스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점괘나 신수를 알려주면서
불법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결국에는 환속해서 어떤 점집 같은 걸 차렸어요?
초기에는 아주 잘 됐습니다.
신통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점차적으로 이 스님에게 일어났던 신비로운 현상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약발이 떨어진 거죠.
결국에는 사람이 망가져버립니다.
‘영적인 덫’에 쓰러진 거다, 저희들은 그렇게 말을 하죠.
사실 이런 능력은 하나의 선물이거든요.
나쁜 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능력에 붙들려 있거나
혹은 그 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더 키우려 하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심해야 될 것은
수행과정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서 내버려두는 것이 중요하다
관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일어나고 있는 그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사고과정을 떼어놓는 겁니다.
그래서 정견하고 정사유하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나가는 게 중요하죠.
여러분 깨어남, 견성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구조물 안에는
궁극적으로 참인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그 사실이죠.
그래서 깨어남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참자아의 느낌의 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온갖 고통과 번뇌가 춤춥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깨어남이 일어나면
생각은 그 자체가 원래부터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고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나라고 여기고 살고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인식해 온 그 자아가
사실은 그 어떤 실체도 없는 허깨비였던 것이죠.
또 그 마음을 통해 인식했던 세계 역시도
그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음을 우리가 보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개인의 차원인 아공에서
모든 삼라만상, 모든 만물의 차원인 법공으로
승화되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철학, 모든 인류의 사상과 학문
다르마는 비어 있다고 했습니다.
‘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공이 뭡니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이 남는 겁니다.
철저한 빈털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저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냐면
그 어떤 관념, 어떤 생각의 구조물에도
여러분 우리가 쉴 곳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전한 포기다, 전면적인 포기다, 안전한 방하착이다, 이런 얘기죠.
물론 아직 견우인 초견상의 단계
처음으로 진리를 일별하는 순간의 견우의 단계에서
‘완전한 포기’가 일어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우구망 반본환원하는 정도는 가야죠.
초견성의 견훤은 첫걸음을 뗀 그런 시작 단계입니다.
마음의 구조물, 생각의 구조물들이
이 견우의 단계에서부터
하나둘 파괴되고 정화된다고 할까요?
더 이상 이 자아의 느낌에, 마음의 느낌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생각과 마음의 구조물들이
건물처럼 쌓아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사랑, 질투, 미움, 원한, 분노, 짜증, 각종 감정적 느낌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우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예요.
그래서 더 이상 ‘감정의 차원’에서
자신을 정의하지 않게 될 때
우리의 자아감은 감정의 차원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감정의 차원에서 떠도는
이 갈등의 느낌들로부터 해방된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견우의 단계다.
견우가 일어나면
어떠한 현상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가?
그 부분에서 오늘 짤막하게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