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현상이 있고, 그다음에 언어가 있을까요?
반대로 언어가 먼저 있고, 현상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십우도의 제2도죠.
2도인 ‘견적’을 함께 배워보겠습니다.
1도인 ‘심우’를 보면
목동은 욕망이라는 우거진 숲과 아집 아상의 골짜기를 넘어서
참나인 소를 찾아 떠나는
험난한 그런 어떤 자기 내면의 여정을 시작하죠.
그런데 가도 가도 이 내면의 소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 있는지
마치 오리가 무우밭을 헤매듯 ‘오리무중’ 속에 있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룬다는 것은 어렵죠.
심우는 아직 찾는 과정이고
찾지 못하고 끝납니다.
심우1도는 ‘발심의 단계’, ‘발원의 단계’라고 할 수 있죠.
발심수행장의 글귀처럼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으니까
그 고통 속에서 나오려면
부처를 구해야 되고
부처는 내 마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니까
마음을 넘어서(참나의 외형이 마음임) 참나를 찾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가 바로 심우도죠, 심우
십우도의 두 번째는 견적입니다.
견적은 소의 발자국을 보다죠.
소의 흔적 혹은 소의 꼬리를 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나의, 내 마음의 끄트머리를, 언저리를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송에 보면
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목동은 체념하고, 포기하면서
앞을 막연히 바라보게 되는데
기적처럼 소의 발자국을 보게 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목동은 그 방향을 향해서 기쁘게 달려갑니다.
드디어 마음의 언저리, 그 힌트를 얻게 된 거죠.
우리가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고, 해결해야 될 이런 과제나 숙제도 많고
생각처럼 마음처럼 뜻대로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 공부도 그렇고
내면을 찾는 내면의 수행 공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발심, 혹은 발원에 대한 무엇을 가져야 될까요?
신심을 갖고 출발해야 되는 거죠.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자부심과 신심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다른 말로는 뭘까요?
정성(신심이 있어야 정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는데 정성이 없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도 마찬가지죠.
소처럼 우직한 그런 끈기와 인내
그리고 자기가 목표하는 바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되는 거죠.
안 된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세상에 어려운 일,
이런 게 있을까요?
소승의 견해로는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의 반대인 ‘쉬운 일’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뭘까요?
[내가 그 일을 하느냐 마느냐에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눈앞에 어떤 일이 있어요?
그 일은 사실 쉬운 것도 아니고요,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서 ‘쉬운 일’ ‘어려운 일’이라고 구분하는 거죠.
그냥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을 ‘어려운 일이다’. ‘힘든 일이다’. ‘나는 못한다’ ‘불가능하다’고
마음에서 결정하면
그 일은 그 순간 일체유심조라고,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그 일은 진짜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모르니까 어려운 것이지
하다 보면 알게 되고, 가다 보면 익숙해져서
결국 할 수 있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려운 일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하고 하고 하다 보면
가고 가고 가다 보면
그 어려운 일도 어느 순간 쉬운 일이 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정성이 있다면
바위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그 밑에 바위를 뚫는다잖아요.
못 해낼 일이 없습니다.
해마다 수확철이 되면
쌀을 가져다주는 매우 정성스러운 분이 있어요.
서울대 농대를 나오셨고, 농사를 짓는 분이신데, 강원도에 삽니다.
대략 여기까지 오려면 3~4시간 정도 걸려요.
해마다 이분은 첫 햅쌀을 수확하면
그 햅쌀을 1.5톤 트럭에 싣고 가져옵니다.
20kg 20포대 가져올 때도 있고, 더 많이 가져오실 때도 있고.
20여 년을 한결같이 쌀공덕을 하십니다.
‘처음 수확한 것을 부처님 절에 공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져오시는 것이죠.
그분을 보면 저는 정말 이 정성스럽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저 정성이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거죠.
옛날에 어떤 할아버지는
처음 수확한 햅쌀을 해마다 이 지게에 지고 올라오셨는데
작은 암자에 가져다주는 거였어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참 중간 정도
암자는 좀 멀리 있잖아요, 본절보다.
올라오시다가 다시 내려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절에 다 오는데 할아버지 왜 내려가시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말하기를
“내가 정성된 마음으로 햇살을 지게 지고 올라오는데
나도 모르게 생리적인 현상이 터진 거예요.
방구를 뀐 거죠.
그런데 방구 맞은 쌀을
부처님 손에 어떻게 올릴 수 있겠냐 이거죠.
자기는 다시 내려가서 이 쌀을, 방금 왔던 쌀을 새 쌀로 바꿔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굳이 그럴 필요야 있겠냐 싶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참 정성스럽다는 것이죠.
이런 정성된 마음이면 못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다 뭐의 문제일까요?
유심소현(모든 것은 마음속 나타남에 있다)
마음 따라서 일어납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정성이 있다면
시간상의 문제가 있을 뿐
결국 이루고 맙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포기하고
덥다고 안 하고, 춥다고 안 하고, 피곤하다고 안 하고,
뭐 하고 뭐 해야 돼서 안 되고
이래서야 언제 내 마음의 소를 찾겠습니까?
내 마음의 참나를 언제 찾겠습니까?
이런 마음이면
쉬운 일도 어려운 일이 되어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됩니다.
--
본문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견적’이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견적은
스승의 가르침
혹은 경전에 쓰여져 있는 구절을 말합니다.
견적은 한마디로 뭐랄까요?
초학자의 어떤 ‘배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죠.
배운다고 할 때, 뭔가를 찾는다고 할 때, 또 뭔가를 익힌다고 할 때
어떻게 배워야 되나요?
첫 번째) 가장 좋은 것은
살아있는 스승에게 직접 보고 듣고 배우거나
둘째) 붓다가 남긴 많은 성년들의 가르침을 책을 보는 거죠.
경전이나 논서에 쓰여진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인생의 길을 알게 되고
소가 어디 있는지 대강 짐작하게 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사성제와 연기의 도리, ‘공과 무아’의 도리를 배우면서
지혜로운 이런 시선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원래는 하나다.
우리 모두는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가르침이나
그리고 어떤 경전상의 구조를 볼 때
과연 그런가? 내가 그런 존재인가?
내가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는가? 하면서
우리는 이 사유하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견적)
‘문자심법’을 통한 지적인 통찰이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면
편견 없이 넓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자면
금강경을 본다 해도
이 금강경에 해석을 달고 주해를 단 사람이 많잖아요.
도덕경도 마찬가지고.
이 금강경에는 무비스님의 금강경도 있고
혹은 오쇼라즈니쉬가 말하는 금강경이 있고
아니면 도울 김용욱 교수가 썼던 금강경이 있습니다.
편견 없이 이것저것 처음에는 다 보라는 거예요.
오쇼는 힌두교 수행자다.
김용욱 교수는 출가한 사람도 아닌데
이런 견해를 내려놓고 보라는 거죠.
우리는 다양한 시선을 접하고 흡수함으로써
그 안에서 [창조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출가스님이 본 금강경, 오쇼가 본 금강경,
그리고 도올 김용옥 교수 같은 전문적인 학자가 본 금강경
다 다릅니다.
그 다름 속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창조적인 지혜를 배우라는 거죠.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 남겨진 경전의 문구나
간접적으로나마 성인의 삶을 접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분들이 남긴 그런 저서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거죠.
살과 피가 됩니다.
독서의 유익함이 여기에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가르침은 경전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책만 보는 것은 뭔가 목마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책을 쓴 저자나 사람을 만나보기를 희망합니다.
살아있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실은 책으로 보는 것과 또 다르잖아요.
더 직접적이고.
류시화 시인도 오쇼 라즈니쉬를 책으로만 접하다가
인도로 그를 직접 찾아가잖아요.
그의 숨결과 그의 존재성을 접하고 싶은 거죠.
깨달음을 이룬 사람 곁에 가면
그의 존재만으로 강렬한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존재성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보다 더 많은 것을
책에서 얻지 못하는 그 어떤 느낌을 얻을 수가 있어요.
옛날에는 성문승이라 하죠.
부처님을 직접 뵌 사람들, 부처님 밑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
그래서 정리하자면
우리가 4단계를 거쳐야 된다고 봐요.
-첫 번째 훌륭한 세상을 만난다.
-두 번째 가르침을 올바르게 듣는다.
-세 번째 들은 것을 이치에 따라 고찰한다.
-네 번째 가장 마지막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열반과 보리에 이르는 겁니다.
육바라밀 행이 있겠죠.
이거를 좀 다른 말로는 문자심법, 관조심법, 실증심법이라고 합니다.
널리 배우고 널리 익히는 단계가 문자심법의 단계고
배운 것을 사유하고 일상생활에서 통찰하는 것이 관조심법이고
일상생활에서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 검증하고 행하는 것이 실증심법이죠.
그럼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가르침을 올바로 듣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행운유수’라고도 하는데
여기저기 가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기저기 들어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보고.
벽을 두지 말라는 거죠.
한 책만 파지 말고,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보는 겁니다.
이웃 종교인 교회도 가보고, 절에도 가보고, 성당에도 가보고
이슬람 사원도 가보는 거예요.
남묘호랭갠교도 한번 가보는 거예요.
종교의 벽을 두지 마세요.
다 나름대로 옳은 얘기를 하거든요.
그분들의 지혜를 다 흡수하고 수행해 보는 거예요.
이와 같이 한 스승만을 고집하거나 그러지 말고
편견 없이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아무거나 막 들어서는 안 되겠죠.
올바로 들어야 됩니다. 바르게 들어야 됩니다.
이거를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정문훈습’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게 ‘듣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가르침을 보고 듣고 사유함으로써
진리를 점점 깨달아 가면서 지혜를 얻게 되잖아요.
유식학에서는 그런 지혜를 낳는 힘이
나의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고
그것이 연을 얻어서 지혜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부처가 되는 그 씨앗이 내 안에 다 있다는 거죠.
진리를 밖에서 보고, 듣고, 배워서 획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의 아뢰야식 속에 그런 씨앗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라고 보는 견해죠.
이것을 이제 유식학에서는 ‘본유종자’라고 합니다.
본래 우리가 선천적으로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종자라는 것이죠.
다만 그 본유종자가 업식과 업장에 의해서 너무 가리워져 있으면
부처와 예수가 와서 얘기해도 ‘귀밖의 소리’로 듣습니다.
아직 ‘시절인연’이 꽃피지 않은 거죠.
인연이 없습니다, 아직은.
그런데 소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사람은
이미 본유종자가, 부처님이 될 그 씨앗이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유종자가
올바른 가르침을 올바르게 듣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 행위가 심층심리에 새로운 종자를 훈습하는 것을
‘정문훈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훈습된 종자가
본래 있는 ‘본유종자’를 자극하고 성숙시켜서
마침내 진리를 찾는 지혜를 열게 됩니다.
진리를 듣고 배우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진리를 가리고 있던 아상의 껍데기가 한 겹 두 겹 벗겨지면서
마침내 내 마음속에 진리가 보름달처럼 빛을 뿌리며 나타납니다.
정문훈습은
가르침을 듣는 일의 중요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유식학의 사고방식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천리길은 한 걸음부터 가는 겁니다.
처음부터 정상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도통 이해가 안 가고, 뭔 소리인가 싶어도
자꾸 듣고 듣다 보면
그 뜻이 “아, 이거구나”하고 체득될 때가 있어요.
다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죠.
[문자나 언어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현상이 있고 그다음에 언어가 있을까요?
반대로 언어가 먼저 있고 현상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통은 우리가 전자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용히 우리가 이제 생각해 보면
후자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정말 미워요?
그리고 ‘저 사람은 밉다, 싫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미운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에요.
미운 사람 자체라는 건 없어요.
마음이 만드는 허상의 구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 이 마음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로, 단어로, 문장으로 그것을 구체화시키면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자체가 미운 것이 아니라
‘미운사람이다’라고 언어로 사유하고 말하는 순간
마음 안에서 미운 감정이 더 생기게 되고
더 플러스가 된다는 거죠.
유식사상에서는 심층의 마음인 아뢰야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즉 우리들 마음에 모든 것을 낳는 종자가 숨겨져 있다는 거죠.
그 종자로부터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이 종자를 이제 ‘명언종자’라고 합니다.
언어의 종자라고도 하죠.
마음이든 사물이든 언어가 모든 것을 낳는다고 여기는 그런 태도인데
과거 영상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언어를 ‘바츄신’으로 신격화하였습니다.
언어를 우주의 최고 원리로 삼아서
언어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라는 사상이죠.
언어의 신성시, 언어를 신격화하는 것은
유대교를 일으킨 이 히브리인에게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기독교에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잖아요.
성경에 보면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말씀이 있었다”라고 그러잖아요.
말을 함으로써 일체의 존재를 존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언어에, 이 말에 그만큼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이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논리적 사고와 그 속에서 올라오는 깨달음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합니다.
그만큼 언어가 또 중요하죠.
그래서 이 언어가
종교를 낳고, 철학을 일으키고
정신과학과 사회과학 모든 학문 전반을 낳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논리적 사고를 잘못 운영함으로써
우리가 원폭을 만들고, 세계를 파괴하고,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는 우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요,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약도 쓰기에 따라서는 고통을 멎게 하는 양약이 되기도 하지만
많이 쓰면 인간을 패인으로 만들잖아요.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죠.
논리적 사고에만 집착하고, 언어와 문자에 구애받으면
역으로 진리(참나찾는 공부, 깨달음)를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언어와 문자에 의해서 공부를 하지만
최종에는 그걸 버려야 되는 거죠.
도망친 소를 발견하는 견적은
배움의 과정이고
문자와 언어를 통해서 진리로 들어가는 단계이지만
다시 언어와 문자의 감옥으로부터
역시 또 벗어나야 됩니다.
언어의 노예로 있는 한
진리를 파악하는 참된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종국에는 뗏목을 버려야 돼요.
강을 건널 때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그 뗏목이 필요 없잖아요.
왜 그럴까요?
문자와 언어는 진리를 가리키는 하나의 뗏목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거든요.
그것이 바로 언어가 가진 한계성이죠.
특히 ‘비유비무’라고 그러잖아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라고 파악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입장이죠.
과거에 선승인 몽창국사는
“아주 궁극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글자와 언어에 따라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망상이 될 수 있다”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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