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자무_바보붓다

[바보붓다] 십우도 제 4도 # 득우 - 염(집중하는 마음) ,정(고요한 마음), 혜(진리를 비추는 마음 / 지관수행

Buddhastudy 2024. 7. 9. 18:37

 

 

아무리 큰 폭풍우와 비바람도

여러분이 고요한 내면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면

폭풍 같은 생각과 감정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

오늘은 십우도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번에 소승이 여러분들과 제3도인 견우, 소를 보다를 얘기했었죠.

오늘은 소를 얻다, 득우를 얘기하겠습니다.

 

득우는 소를 발견한 목동이 소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소에게 고삐를 메고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는 그런 단계라고 볼 수가 있죠.

 

그래서 득우는

전면적으로 내면의 나를 발견하고

그 내면의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안아서 밝히는 단계입니다.

 

수행의 다섯 단계 중 견도에 해당되죠.

그동안의 오랜 노력과 수행으로 그 과보가 무르익어서 폭발하는 단계가

바로 득우의 단계이자

도를 보는 단계라고 볼 수가 있죠.

플라톤은 이런 견성을 이데아의 관조로 명명합니다.

 

그러니까 장기간에 걸친 탐구와 수행, 연구 끝에

순간적으로 이런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깨달음 혹은 깨침, 견성이라고 하는 게

동양적인, 혹은 불교적인 산물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붓다만이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종류나 수행의 방법은 다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철인들, 많은 성자들

이런 분들도 다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렇게 노력했던 사람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견성, 혹은 신을 밝히다, 내면의 나를 발견하다, 신과 합일되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다 같은 말이죠.

 

그래서 깨닫기 위한, 혹은 지혜를 얻기 위한, 이데아를 알기 위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그 내면의 탐구 과정은

동서양을 떠나서 다 공통적인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내면의 폭발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까지 가기 위해서는

뭔가 좀 답답하고, 지리하고, 막막하지만 진보가 없는 듯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나아가는 수행자에게만 일어나는

그런 우직한 정신이 바탕이 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수행의 바탕하에

가고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되듯이

변증법에서 말하는 양질전화의 법칙처럼

어느 순간 깨달음이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99도의 물에서 1도가 채워지자

확 끓어오르는 물하고 똑같은 거죠.

그 순간 우주의 참모습, 자신의 참다운 실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득우를 보면 고삐가 나옵니다.

왜 고삐가 나올까요?

여러분 아직 소는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어도, 돈오했어도 점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 5도인 목우가 이어지죠.

 

우리가 소를 발견해서

나는 누구인가?

뭐 잃어버린 자기를 찾고

깨달음은 얻었어도, 견성은 했어도

사실 누세누겁에 쌓아온

미세한 번뇌와 무명의 업장은 아직 잔존해 있습니다, 아직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 마음을 잡아매는 고삐가, 채찍이 아직 필요합니다.

소가 아직 난폭해서 고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럼 여러분 소를 잡아매는 고삐는 무엇일까요?

불가에서는 [], [], []로 전개되는

이 세 가지 마음의 활동을 고삐라고 말합니다.

 

염은 뭘까요?

염은 일심으로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정은 뭘까요?

그런 집중된 마음을 통해서 고요한 마음에 이르는 겁니다.

혜는

그 고요한 마음에 바탕 하에서 진리를 비추는 마음을 말합니다.

관이죠.

 

여기서 염은

자기의 몸과 마음, 자기의 전 존재를

일심으로, 한 점에 묶여서

자기를 집중시키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의 한 점을 화두로 잡는 수행에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뭐냐 하면

호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역대 모든 수행의 비법에는 딴 게 아니고

이 호흡이 뼈대가 되고 기초가 됩니다.

부처님은 들숨과 날숨에 출입식년경을 말씀하셨죠.

 

우리나라엔 용호비결에 단학수련이 있고

티벳밀교에서는 이것을 항아리 호흡이라고 하고

중국 도가에서도 이런 양생법, 호흡법이 있죠.

 

여하튼 들숨과 날숨에 이 잔잔한 호흡을 통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집중시키는 염의 작용은(집중하는) 공통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호흡과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염법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그 안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생깁니다.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육체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의 본래면목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마치 원자핵은 정말 작은 공간이지만

이 원자핵 속에 양자와 중성자가 압축되어 있잖아요.

그러면서 이 핵이 터지면

그 조그마한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처럼

우리의 실상인 본래면목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집중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그 안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고 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집중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몰입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자주 봤던 <전설의 고향>이 보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잖아요.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그게 곧 일념집중입니다. 일심집중이죠.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걱정 근심으로 밤을 지새다

다음 날 머리가 하얗게 됐다는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옛날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숭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공양간에 두부를 물에 담가놓잖아요.

그런데 가끔 이 두부가 공양간에서 없어지더라는 거예요.

자꾸 없어지길래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어느 날 하루는 이 숭산스님께서 공양간을 살짝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그 절간에 같이 살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조그마한 물 항아리에 쟁여둔 두부를

아주 지긋하게 일념으로 바라보더라는 거죠.

마치 고양이가 쥐구멍을 바라보듯 바라봅니다.

숭산스님도 이 모습이 좀 신기해서

이 고양이가 뭐 하나 싶어서 가만히 그 모습을 봤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에 잠긴 두부가

신기하게도 물 위로 스르르 떠오르더라는 거죠.

그리고 그 찰나에 고양이가 그걸 낚아챕니다.

사실 두부가 나무도 아니고

물 위로 떠오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동물인, 축생인 이 고양이가

쥐구멍 바라보듯 집중하니까 그게 떠오르더라는 거죠.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우리가 집중하는 그 마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거예요.

내 내면을 변화시킨다는 거죠.

 

고양이의 사례처럼

우리가 자기 전 존재를 한 점에 집중할수록

마치 돋보기가 태양빛을 모아서 불을 일으키듯이

우리의 존재는 더 강력한 에너지와 진동으로 움직입니다.

 

여러분 평상시에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때요?

평상시에 우리는 굉장히 산란하게 삽니다.

하루에도 5만 가지 잡생각을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으로 하루 종일 보냅니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에너지는 이렇게 늘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상태죠.

그런데 이 마음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 호흡을 통해서

여일하게 하나의 점에 단단히 집중하면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에너지가 한 점으로 응축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힘으로 대상을 관통하는 힘, 에너지가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이 염정혜가 굉장히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예요.

이 염정혜를 두 가지 말로 합치면

[지관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마음의 정적인 측면이고

관은 마음의 동적인 측면입니다.

 

지는 뭐예요?

마음을 고요하게 그치는 것이죠.

 

그럼 마음을 어떻게 고요하게 그쳐야 할까요?

생각이나 망상은 절로 일어나는 것이잖아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 방법은 뭡니까?

지는 생각이나 망상이 일어날 때

그 순간 각조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회광반조하는 거죠.

 

생각이나 감정을 창문 밖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대상화시켜서, 객관화시켜서

마치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처럼 바라보는 겁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의 상태가 되면

수면 위의 생각이

이 알아차리는 자에 의해서 힘을 잃고 소멸해 갑니다.

바람이 잦아들고, 수면 위가 잔잔해지는 거죠.

 

아무리 큰 폭풍우와 비바람도

여러분이 고요한 내면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면

폭풍 같은 생각과 감정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것도 결국 생각과 감정의 허상이거든요.

그리고 알아차리는 순간 고통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잔잔해진 수면에는 뭐가 떠요?

지혜의 보름달이 뜹니다.

이것이 곧 지관수행에서 관이죠.

 

잔잔해지는 수면상태에서 예리하게 관을 합니다.

고요한 그 상태에서 지혜의 빛을 비추는 거예요.

 

도대체 나의 본질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서

때로는 언어를 통해서 화두를 통해서

무엇인가 무엇인가, 이 뭐꼬 이 뭐꼬를 계속 추구해 갑니다.

 

그런데 이 관수행에서도

이런 고요해졌지만

이런 고요해진 그 공하고 허한 본성의 바탕에서

대상 없는 관법으로 밀어붙이면 또 뭔가 또 막막하거든요.

 

그래서 이 관법수행에서도 하나에 초점을 두고 사유화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체에 대한 욕망을 버리기 위해서

예로부터 실천했던 부정관이라는 관법이 있습니다.

 

이 관법에는 나를 백골이라고 해골이라고 관하는 이 골상관이 있어요.

마하가섭이 실천했던 두타행 중의 하나가 바로

무덤 옆에서 자는 거거든요.

여러분 무덤 옆에서 자라고 하면 잘 수가 있겠어요?

무섭죠, 우리 중생들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 옆에서 자는 게 바로 백골을 관하는 수행이에요.

 

우리 모두 무상으로 간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마음의 욕심을 줄이고

탐진치를 없애는 그런 수행이죠.

 

우리가 손으로 이 육체를 만져보면

여러분 뭐가 만져집니까?

머리를 만지면 피부 말고도 이 백골이 만져지잖아요.

자신의 이 뼈다귀, 두개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백골의 조각조각이 이어져서 감싸고 있고

그 안에 뭐가 있어요?

내가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이 백골을 대상 삼아

내가 왜 백골인지

나의 참다운 본질은 그러한 무엇인지

관하는 겁니다.

 

그게 관법수행의 백골관이죠.

이것이 지관 중에서 관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백골의 무상함을 관하다가

문득 관하고 있는 관조자 자체로 합일됩니다.

이것이 지관으로 말하면 다시 지에 해당됩니다.

관하고 있는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관조자가 관조자와 완전히 합일하는 지의 작용입니다.

 

우리가 근기가 이제 둔열한 우리가

처음부터 아무런 대상 없이 화두 없이

어떠한 스승의 지도 없이

관조자가 관조자와 완전히 합의되기는 여러분이 힘들거든요.

 

즉 소승이 누차 얘기해 왔지만

색을 통해서 공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지

곧바로 공을 통해서 공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공은 공 그 자체인데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어요?

 

그래서 자신의 근기와 인연에 맞는

구체적인 하나의 현상이 필요한 거죠.

그것이 염불이 될 수도 있고

어떤 화두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들숨과 날숨의 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우리가 우주의 진리, 우주의 진리에 자신의 본래면목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어떤 현상을 통해서 본질에 이르는 겁니다.

우리가 현상 일체를 만법이라고 하고 법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리고 이 법의 본질을 진여라고 합니다.

자기의 진면목이 무엇이냐의 추구 과정에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진면목의 다다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몸과 육체는

이 육지와 마음은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에고도 훌륭한 도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염의 칼날이죠.

 

그리고 염한 마음 뒤에 일어난 고요한 선정의 마음

그것이 입니다.

정한 그 마음의 바탕에

온갖 사물이 그대로 비춰지는 것이 곧 .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불어서 파도치는 마음,

다시 말해서

어지러운 생각과 혼탁한 감정들이 파도 칠 때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을까요?

 

표면에 먼지가 앉아 있고

어지럽게 물결치는 연못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대봐야

내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거죠.

 

그래서 먼저 염의 칼날로

어지러운 생각과 혼탁한 감정을 가라앉혀야 되는 것이죠.

 

득우의 소가 말을 잘 듣지 않고 난폭한 것은

우리가 비록 손은 발견했지만

견성은 했지만

내면은 발견했지만

아직 어지러운 생각과 혼탁한 감정이 혼재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음 단계인 제5도인 목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4도인 득우의 과정에서는

채찍과 고삐가 필요한데

그런 고삐의 역할로서 염

그다음에 정,

이 염정혜를 지관수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