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단지 무심하게 앉아서
선정이나 산매의 상태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정한 마음, 고요한 마음, 지를 기초로 삼고 뼈대로 삼고
그 위에 예리하게 회전하는 깨어 있는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진리를 구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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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오랜만에 십우도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지난 영상에 소승이 아마 2도까지 공부를 했었는데
오늘은 제3도 ‘견우’를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견우란
소를 보다, 소를 발견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견우의 계송을 보면
소의 뒷모습, 나무 그늘에 숨어 있는 소를 발견하는
그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를 발견했다는 것은 과연 뭘까요?
전체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자신의 본성과 참된 자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살짝 엿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틈으로 나의 본래면목을 본 거죠.
그러나 아직 전체적으로 소를 얻은 그 득우는 아닙니다.
봤다는 것은 뭘까요?
도대체 자기 속에 무엇을 본 것일까요?
여기서 본다고 해도 본다고 하는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무슨 육안으로 보는 건 아니죠.
이런 질문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보는 자는 누구이고
과연 보여진 것은 무엇인가?
보여지는 것이 불성이고, 참나고, 나의 본래면목이라면
그럼 그것을 보는자는 누구입니까?
사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죠. 하나입니다.
찾는 자가 찾는 놈이고
보는 자가 보이는 놈입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언어 문자로 표현할 길이 없으니까
봤다, 견우라는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놈 그 자체가
무지와 아집의 그런 어떤 무명의 껍질을 뚫고
불성이라는 병아리가 열린 상태죠.
‘무지와 아집에 갇혀 질식하고 있던 영혼’이
비로소 해방된 상태
껍질이 깨지고 열린 상태죠.
안과 밖이라는, 껍질과 알맹이라는
그런 이원적인 구분이 사라진 그런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의 어떤 실재, 존재로서의 어떤 존재
부동의 그 자리
강조하는 자도 없고 강조되어지는 것도 없는 그런 상태가 바로
견성, 견우라고 말할 수가 있죠.
관조법에 보면 이 [지관수행]이 있습니다.
생각 감정을 내려놓고 거의 그치는 것
그것이 이제 지이고
그 지의 상태에서 ‘궁극의 실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곧 관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지관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모든 존재를
자기 마음속으로 반조해서
무엇이 참되게 존재하는 것인지
참되게 존재하는 것에 그 진상, 그 이치는 어떤 것인지
구명하는 것입니다.
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라는 게 마음의 술렁거림을 재잘거림을 가라앉히고
파도가 쉬고, 수면이 잔잔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잖아요.
이른바 공으로
적적한 어떤 무로 가는 것이죠.
그러나 그 자체로만은
사물의 본질, 사물의 이치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무정물의 돌이나 바위나 흙 물질 그 자체는
있는 그대로의 止, 삼매의 상태지만 그 안에 뭐가 없어요?
관觀은 없습니다.
관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관에 의해서 청정하게 가라앉힌 수면 위에
보름달을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무심하게 앉아서
선정이나 삼매의 상태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정한 마음, 고요한 마음
지를 기초로 삼고, 뼈대로 삼고
그 이후에 예리하게 회전하는 깨어 있는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진리를 구명하는 것이다.
지와 관이 두 가지가 합해져야 되는 거죠.
그래서 통일되고 깨어 있는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
몰입에 들어가는 겁니다.
부처님의 사성제와 연기론
그 모든 8만 4천 법문이 어디에서 나왔겠어요?
바로 관입니다.
유가적인 해석으로 굳이 얘기를 하자면.
격물치지의 공부가 된 거죠.
격물치지를 잠깐 한번 얘기해 볼까요?
격물치지에 대한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가 있어요.
그중에 이제 대표적인 학파가
유가에서 알아주는 인물이 주자잖아요.
주자학파가 있고 양명학파가 있습니다.
주자는 말하길
세상 삼라만상 나무, 꽃, 대나무,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이치를 갖추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이치를 하나씩 따져 들어가면
마침내 확연하게 세상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게 된다.
주자는 이렇게 이제 격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격물이란
만물이 지닌 이치를 추구하는 궁리다.
그래서 사물의 위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치지_ 앎에 이를 수가 있다.
이것이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의 공부입니다.
그리고 주자 이 말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
왕양명 선생이죠.
왕양명은 실제로 대나무 한 그루를 놓고
오랫동안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심지어 갈라보고 쪼개보고 하면서 대나무의 이치는 무엇인가?
궁리해 보는 거죠.
그런데 주자의 이론대로
아무리 대나무를 쪼개고 갈라보고 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바라봐도 안 되니까
왕양명은 격물의 격을 주자보다는 조금 다른 의미로 재해석합니다.
사물에는 사리가 있잖아요.
모든 물질에는 물리가 있잖아요.
그만의 고유한 이치가 있는데
그 고유한 이치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곧 격물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악과 불순한 욕심 등을 격물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선언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심과 지혜를 밝힐 수 있다고 본 거죠.
이것이 바로 이제 치지에 해당됩니다.
격물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욕심을 제어하고, 물욕을 극복하는 것
이렇게 해석을 넓게 해석을 합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양지양능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을 제어하고, 다스리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로서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 격물이라면
고요한 그 바탕에 몰입을 통한 궁리를 하는 것이
곧 관의 수행, 치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부처님처럼
자신의 성품을 보고 견성은 할 수 있어요.
또 실제로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이
견성을 하고, 한소식을 했지만 다른 점이 뭘까요?
수많은 수행자들이 불교이래로 이 수천 년 동안 다 견성하신 분들이 엄청 많잖아요.
조사도 많고
그러나 부처님처럼 변재무애한
사물의 이치나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죠.
사실 그건 또 다른 공부거든요.
생사를 지배하는 진리란 무엇인지
인과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사를 초래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연기와 공의 도리는 무엇인지
이건 깨어 있는 마음의 바탕하에서
예리한 그 관의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통찰하신 거죠.
그러니까 견성했다고, 깨달았다고 소를 봤다고
이 모든 도리를 그 순간 당하에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부처님도 왕자 때부터 쌓아온 공부
출가 후 많은 스승들에게 배운 학문
그리고 붓다 자신의 깨달음과 오랜 이런 지관 수행을 통해서
그것이 무르익어진 것입니다.
지와 관의 수행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8만 4천 법문
이런 것들이 나온 거죠.
그러면 우리는 관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유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 관이 이루어지려면
육체적 욕망에 오염된 마음
탐진치 삼독에 물든 마음
이런 마음들은 사물의 표면에만 집착하지
그 내부까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생각과 감정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공부가 필요하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육근을 멸한다고 하지 않고
수호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나 마음이나 그것이 버릴 것이 아니에요, 사실은
그것도 별개로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반연해서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에 반연해서 육체가 일어나는 거거든요.
서로 상호작용하는 거죠.
그러니까 육근의 작용은 늘 일어납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을 먹고 싶어 하는
이런 근의 작용이 일어난다는 거죠.
추우면 따뜻한 곳으로 가려고 하고
더우면 시원한 곳으로 가려고
이 감각은 뇌에 신호를 보냅니다.
이런 작용은
부처나 중생이나 똑같은 작용이라는 거예요.
다만 각자나 깨친 사람들은
이런 육근의 작용을
염- 혜- 정으로
육근의 활동이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 팔정도를 통해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곧 요가이자 선이고, 중도행이라는 거죠.
그래서 눈을 반쯤 뜨고 앉아 있는 것만이
선이나 요가가 아니고
청소를 하고, 밥을 먹고, 누워 자고,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이런 하나하나가 다 수행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수행이라고
따로 특별히 어떤 것만 있는 게 아니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도량석하고 염불하고 예불하는 것도 선이요.
출근하는 남편과 학교 가는 아이를 위해서
밥하고, 요리하고, 반찬을 만들고
혹은 밀린 빨래를 하는 것도
선이고, 수행이고, 기도입니다.
시장바닥에 나가 야채와 과일을 파는 것도
선이고 기도고 예배고
교회나 절에 나가서 강의나 법문을 듣는 것도
바로 선이고 요가고 기도입니다.
좌선만이 선이 아니라
행선, 주선, 와선도 선이고
일상 모두가 다 선이며 부처의 일입니다.
부처가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데
어디 범속의 일이 따로 있고, 성속의 일이 따로 있겠어요?
범속이나 성속이나 그런 구분은 사실은 없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누는 분별심이
이거다 저거다 상대를 짓는 그 마음이 문제가 되는 거죠.
만약에 나는 고요히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지금 너무 시끄러운 시장 바닥에 나와 있어서
마음이 오염된 것 같아
얼른 깊은 산속으로 조용한 곳으로 가야지
이렇게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구별하거나
성속을 구분하거나
동과 정을 구별하는 것은
바로 바른 정견이 아니고, 바른 사유가 아니다.
중도가 아니라는 거죠.
활동과 고요함의 두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공부를 이쪽이나 저쪽이나 순일하게 하는 것
이것이 진짜 공부고, 필요한 공부고, 귀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선을 닦는 납자는
다니면서도 다니는 걸 알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앉고 서는 것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동하고 정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러한 봄, 이런 관이
바르게 보는 것이고
바르게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우도의 견우의 견은
진리를 보는 참나가
눈을 떴다는 눈을 떴다는 개안했다는
그런 의미도 됩니다.
플라톤은 이 상태를 진리를 본다고 해서
‘견진’이라 했고
기독교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 사람은 신을 본다해서 ‘견신’이라고 했고
불가에서는 부처를 본다해서 ‘견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느 견이든
모두 생각과 감정, 이 에고를 넘어선
진리의 눈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진리의 눈을 얘기하자면
불가에서는 5가지의 눈을 얘기합니다.
참고적으로 이 5가지 눈에는
육안이 있고, 천안이 있고, 혜안이 있고, 법안이 있고, 불안이 있습니다.
육안은 보통의 육체적인 눈으로
가까운 곳과 하한 대낮에만 잘 볼 수 있고,
육안으로는 멀리 있거나 혹은 아주 어두우면
이런 어두운 밤에는 볼 수가 없죠.
천안은 욕계 다음에 색계의 천인이 지닌 눈이라고 하는데
멀리 있는 것이나 낮과 밤에 구별 없이 볼 수가 있고
육신통의 하나로 천안통이라고도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천안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존재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현상 깊숙이 있는 본질이나
현상 깊숙이 있는 본질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은 혜안이죠.
앞서 주희와 왕양명의 격물치지를 얘기했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24시간 대나무와 어떤 사물을 쳐다본다 해도
육안으로는 현상의 표면밖에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보다 깊은 진리를 보는 눈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불가에서는 혜안이라고 합니다.
혜안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혜안은 말하자면
‘지혜의 눈’
철학적인 안목이 있다는 거죠.
부처님이 고집멸도, 사성제나 12연기법이나
모두 혜안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법안은 무엇일까요?
법안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교화하면서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그런 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혜안으로
사물의 인과관계와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깨우쳤다면
자신의 깨침에만 그치지 않고
대승적으로 중생을 이끌어가는 것
그것이 곧 법안입니다.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곧 법안이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겠죠.
이것이 동체대비 무연대자
중생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중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겨서
그들을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이끌어 가는 길
그것이 곧 육바라밀의 행이고 이익중생의 길이죠.
그러나 법안은
모든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을 정도의 눈은 아닙니다.
가장 마지막인 불안, 부처의 눈이 있어야 되는 거죠.
부처의 눈은 이 4개의 눈과 어떻게 다를까요?
불안은....
일체중생을 구원하는 방편을 몸에 터득한 사람의 그런 눈입니다.
예를 들자면
경전에 이런 비유가 있잖아요.
집이 불에 막 타고 있는데
그 집 안에서 불타는 줄을 모르고 어린이들이 막 놀고 있어요.
위험은 닥쳐오고 있는데 그것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은데
고통이 눈앞에 있는데도
거기서 나올 줄 모른다고 이제 비유를 하잖아요.
그럼 우리가 그 불타는 집 안에 있는 그 어린이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
혜안과 법안에 이른 사람은
집이 불타고 있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고 가르쳐주고 위험하다고 알려주겠죠.
진리로 깨우쳐줍니다.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것 갖고는 좀 부족해요.
왜냐하면 불타는 집 안에 있는 애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 믿을 수도 있거든요.
거짓말하지 마, 나는 그 말 안 믿어
이렇게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귀밖의 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진리를 얘기해도 안 듣는 사람 있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것을 안 받아들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이 부족한 걸까요?
방편이 부족합니다.
혜안과 법안은
아무런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비춰주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불안은
때로는 그 사람의 인연과 근기에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고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곧 방편법입니다.
고지식하게 도덕적인 형태만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내 말이 옳고 옳아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얘기하면 안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쓰시는 방편이
불타는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여기 황금 있다.”
낙엽을 들고서 황금으로 속이기도 하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여기 있다.”
거짓말을 때로는 할 수 있다는 거죠.
이것이 이제 방편법입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추죠.
무엇이 오든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성품, 진리의 비유로서 우리가 많이 얘기하잖아요.
미인이 오든 추녀가 오든 분별하지 않고 상대를 짓지 않고
권력자가 오든 신분이 없는 사람이 오든
부자든 가난하든
아무런 분별이나 상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울 같은 마음은
오고 가는 것에 영향받거나 물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공의 마음’이죠.
근데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자비와 지혜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불안은 방편법이 있는 경지입니다.
추녀가 올 때 때로는 이쁘게도 비춰주고
미녀가 올 때 때로는 못 생기게 왜곡시켜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방편법이죠.
부처님의 그 숱한 비유법을 보세요.
그냥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항상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고사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읽고
거기에 맞는 이야깃거리 방편법을 제시하면서
진리로 이끌어갑니다.
여러분도 어떤 강의를 들을 때
어떤 비유가 있을 때
적절하게 이해가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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