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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붓다] 십우도 제 5도 # 목우 - 소를 길들이다 ㅣ 현행을 조복하고, 종자를 끊고, 습기를 버린다ㅣ돈오돈수와 돈오점수

Buddhastudy 2024. 7. 16. 18:54

 

 

우리들 현재 생각과 감정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표면의식 너머의 마음, 그 깊숙한 곳에는

다시 말하면 이 빙산의 일각, 그 바다 아래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본래의 큰 빙상덩어리가 있다는 겁니다.

바다의 표면에 떠오른 빙산은

내 눈에 볼 때는 작아 보이잖아요. 그죠?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착각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으로 유추되는 이 빙산은 작지만

평상시에는 떠오르지 않는 어마무시하게 큰 심층의 마음들이

그 바닷속 밑에 잠재되어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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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계속해서 십우도의 제5도 목우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우는 소를 기르다라는 그런 뜻이죠.

 

십우도의 전개 과정을 보면

소를 잃어버리고

소를 발견하고

발견한 그 소에 고삐를 메고

소를 기르는 단계, 목우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소는 아직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아직은 양심과 욕심이랄까요?

불심과 에고가 합하지 않고 대립하는 그런 단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에고, 이 중생심은 주인공의 말을 잘 듣고 있습니까?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과연 뭘까요?

에고가 본래의 주인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부처라고 우리가 부르는 거죠.

그리고 이 에고가 주인의 말을 잘 안 듣는 상태

주인하고 대립하는 상태

자기 주장이 강한 상태

그런 사람은 이제 곧 중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는 1, 한마음이고

중생은 여러 마음이 날뜁니다.

 

중생의 뜻이 뭐예요?

무리 중, 날 생

그러니까 5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모였다, 흩어진다

이렇게 해서 중생이라고 우리가 부릅니다.

 

이렇게 날뛰고 말 안 듣는 소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달래고 얼려서

우리의 본래 고향인, 본래면목인 집으로 돌아가야 될까요?

때로는 채찍을 때리면서, 때로는 고삐로 당기면서, 때로는 당근도 줘가면서

이 소를 이끌어야 되겠죠.

 

이 과정이 곧 목우, 길들어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우는 말 안 듣는 이 소를

내 마음을 얌전하고 온순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가 아직 난폭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아직 내 마음속에, 내 업식 속에, 심층 의식 속에

미세한 번뇌와 망상

지나친 갈애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그런 뜻이죠.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심층 심리 속에

하나의 씨앗으로 남아 있는 이것을 없애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마음공부고, 마음 훈련이라 할 수가 있겠죠.

 

즉 초견성 해서 보임의 수행을 통해

주인공의 그 자리를 더욱 확고히 강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목우는 볼 수 있습니다.

 

소승이 과거에도 누차 말씀드렸지만

견성을 한 후에도

나도 모르게, 저도 모르게, 이 망상과 번뇌는 일어납니다.

깨달은 인간에게도 번뇌는 일어납니다.

소승의 보는 견해가 그래요.

 

깨달아서 나의 성품과 부처의 성품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지만

무시겁 이래로 가져온 이 습기를 한순간에 다 없애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닦음이 필요하다.

십우도의 과정은 돈오점수의 과정을 보여주는

그런 상징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보조선사는 점수해야 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겨울날에 얼어붙은 연못이

우리가 모두 물인 줄은 알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 얼음이 어떻게 녹습니까?

따뜻한 기운을 받아야 비로소 녹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범부가 부처인 줄은 알지만

계속해서 익히고 닦아야 된다는 거죠.

마치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그 물이 비로소 창생만물에게, 나무나 흙이나 이런 것들에게

어떤 쓰임이 되듯이

내 안의 망상과 번뇌를 다 녹여야

신통광명한 작용을 비로소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나라의 위대한 선승, 성철 스님께서는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말씀하십니다.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보조나 화택, 규봉 같은 선사들을

조계의 적자가 아니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신 적이 있죠.

 

그럼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는 견성은 뭐냐?

십우도의 초견성이 아니라

구경묘각의 경지를 말씀하는 거라는 거죠.

 

확철대오, 철두철미하게 아뢰야식에 미세한 망념까지도 끊어진

구경묘각이 곧 진정한 견성이고,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렇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이런 경지에서는

더 이상 바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살아서 무엇을 하느냐?

부처의 행, 부처의 사실을 다만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닦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부처로서 현현할 따름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돈오견성하면

점수의 과정이 필요 없고

다만 부처의 행, 부처의 삶을 살 뿐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경허선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돈오해서 이치를 깨침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다생으로 익혀온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철스님 말씀 다르고, 경허스님 말씀 다르고

그럼 무엇이 맞을까요?

혜능선사 말씀 다르고, 신수대사 말씀이 다르잖아요.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승은 이걸 개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는 꼭 이거다 하는 고집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한 법도 옳다고 결정하지 말고

한 법도 그르다고 결정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사실 경허스님 역시도 때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중생의 병에 따라서, 중생이 집착하는 바에 따라서 설하시는 거죠.

부처님도 마찬가지고 역대 많은 조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성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돈오점수는 깨달음에 신비에 안주하거나

깨달음을 실체화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한 가르침이고

돈오돈수는 한 법도 밖으로 구할 것이 없음을 가르친 것이다.”

 

가르치는 그 방향이 다르다는 거죠.

우리 모두는 이 영상을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은

깨달음을 구현하는 실천의 길에 들어선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런 견해도 치우침이 없이

중도적으로 인식하고

중도정견의 입장에서 살펴봐야 한다.

 

사실 닦음 없이 깨달음이 있을 수 없고,

바른 깨달음이 없이 진정한 닦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과 닦음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보는 게

바로 중도 정견이다.

저는, 소승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십우도의 과정은 계단 올라가둣 단계별 점수의 가정을 보여주면서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소를 발견하면서 견성을 하고

그 견성의 보임아래

그것을 더욱 확고히 해 나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가 있겠죠.

 

내 안에 숨 쉬고 있던 번뇌가

보리로 바뀌는 과정

식이 지혜로 바뀌는 그런 수행을 보여줍니다.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찾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망상 속에서 거기에 숨어 있는 참나를 찾아갑니다.

우거진 숲이 우리의 욕망이고

그 우거진 숲에 숨어 있는 본성이 우리의 본래면목이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그 순간 각조하면서 알아차리고

고요한 내면의 중심에 좌정합니다.

그리고 이 수행이 더 무르익어갈 때

67도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소승이 그동안 저도 모르게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게 뭔 말이냐면

우리가 마음속으로는

저 사람(중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잖아요, 그죠?

설법도 평상시에 많이 듣고, 영상도 많이 보고

깨우침의 자기계발서 글도 많이 보고

개념적으로는 머리로는 알아요.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 훌륭하다는 것도 알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막상 그런 경계를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되나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까요?

그 순간 그 마음이 108천리로 날아갑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나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왜 그럴까요?

이는 심층의 영역이죠.

무의식에 뿌리박고 있던 미움의 종자가

자기의 도덕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을 만나서, 싹을 틔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 깨달았어. 깨우쳤어. 우주의 진리를 알게 되었어.”

난 이제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라고 자신하지만

산속에서, 토굴 속에서

홀로 수행했던 자신의 방에서 자신하지만

과연 그 자신했던 만큼 잘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인연의 경계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자신의 모습

그러니까 새로운 또 다른 자기의 출연에

자신의 상이 무너지는 것을, 자신의 공부가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순간

아직 나에게 이런 오염된 일면이 있었구나

혹은 그 반대로

나에게도 이런 선한 일면이 훌륭한 점도 있었구나를 알게 된다는 거죠.

 

이처럼 자기의 심층에는, 이 무의식 속에는, 아뢰야식 속에는

무수한 가능태의 종자가 다생이래로 숨겨져 있다는 거죠.

유식유가행파에서는 이 심층의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르잖아요.

서양에서는 프로이트나 칼융, 혹은 아들러 등

많은 심리학자들이 얘기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우리들 현재의 생각과 감정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표면의식 너머의 마음, 그 깊숙한 곳에는

다시 말하면

이 빙산의 일각, 그 바다 아래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본래의 큰 빙상덩어리가 있다는 겁니다.

 

바다의 표면에 떠오른 빙산은

내 눈에 볼 때는 작아 보이잖아요. 그죠?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착각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으로 유추되는 이 빙산은 작지만

평상시에는 떠오르지 않는 어마무시하게 큰 심층의 마음들이

그 바닷속 밑에 잠재되어 있다는 거죠.

 

그럼 잠재되어 있는, 잠들어 있는 이 종자들을 어떻게 없애가는가?

그게 우리들의 수행 공부가 되겠죠.

 

유식사상에서는 그것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과거 영상에서도 소송이 설명했었는데

여러분들과 한번 다시 한 번 복습해 볼까요?

 

첫 번째, 현행을 조복한다.

두 번째, 종자를 끊는다.

세 번째, 습기를 버린다.

 

첫 번째 여기서 말하는 현행이란 뭘까요?

현행은 우리들 표면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마음의 움직임, 마음의 흐름, 마음의 활동을 말합니다.

 

여러분이나 소승이나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인연들을 만나잖아요.

그 안에 좋은 일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행복하거나 짜증 나는 일들도 만납니다.

 

그럼 거기에 따른 느낌이 일어나잖아요.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안에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부처의 마음이면 괜찮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표적인 마음의 오염물이 떠오르죠.

그게 탐진치 삼독심입니다

이것이 현행, 드러난 마음입니다.

 

깨치지 못하고 마음이 훈련되지 못하면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에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고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게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입니다.

아직 닦아야 할 마음이 있구나

자신을 회광반조하고 돌아볼 수 있다는 거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죠.

수행의 재료가 생겼으니까 오히려 기뻐합니다.

나에게 이런 나쁜 마음이 있었네, 나쁜 종자가 있었네

자책할 게 아니란 말이죠.

오히려 이런 마음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다스려야 될까요?

이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인과를 짓는 것이며 악업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의 진리로서

바른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겁니다.

이것이 이제 첫 단추, 첫걸음이 되겠죠.

 

그러나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억제하거나 누르거나 어떤 이성이 힘으로 억압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 순간만을 모면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정면 돌파해서 화두를 들고 맹렬하게 돌진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고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피하거나 고통과 싸우려 하지 말고

그것을 수용하고,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맹렬한 공부를 하는 겁니다.

 

우리들의 생각, 우리들의 감정, 일어나는 그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죠.

거기에 맹렬한 공부를 하는 거죠.

 

법정 스님도 젊은 날에 무서움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밤에 산소길을 혼자 걷다 보면

왠지 귀신이 날 어디선가 보는 것 같고

캄캄한 저 너머에 뭐가 있는 것 같고

나무가 막 흔들리고, 막 풀숲에 사사삭 소리가 나면

왠지 등골이 오싹할 때가 더러 있더라 이 말이죠.

 

그런데 법정 스님이 그랬답니다.

어느 순간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그 모든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다 맞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순간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것이

다 마음이 짓는 일이고, 허상이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두타행으로 제일 가는 가섭존자는 오히려 무덤 옆에서 잤잖아요.

무섭기는 커녕 백골을 통해 오히려 가섭존자는 공부를 했습니다.

옛수행자들은 다이러섰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오히려 귀신이 도망가겠죠.

 

그러니까 수행도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두렵다고 피하거나, 그것을 억압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그것을 잊거나 하지 말고

거기에 맹렬한 공부를 가하라 이거죠.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맞이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종자가 있는 한

다시 그와 똑같은 어떤 경계를 만나면

다시 싹을 틔우기 때문이죠.

그래서 맹렬한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단계로는

그 가능성의 씨앗을, 근원을, 뿌리를

아예 없애버리는 거죠.

 

그래서 첫 번째 현행을 조복하고

두 번째 종자를 끊는다고 하는 겁니다.

 

잡초는 풀만 제거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풀약도 뿌리고, 뿌리를 제거해 줘야 그나마 완벽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마음의 뿌리를 제거하냐, 이거죠.

 

저번 시간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지관수행을 해야 되겠죠.

_ 알아차리고

_ 관조해서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될 것_ 내면의 중심에 자중합니다.

 

견성한 사람은

초견성만 했다 하더라도

항상 그 중심점에 금방 갈 수가 있습니다.

 

추워도 춥지 않은 자리에

더워도 덥지 않은 자리에

상처받아도 상처받지 않는 자리에

불생불멸의 그 자리에

아파도 아프지 않은 그 자리에 곧바로 좌정하게 됩니다.

 

누가 내 멱살을 잡아도

누가 내 얼굴에 설령 침을 뱉어도

누가 내 손과 가슴에 옆구리에 못을 박아도

그것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것일 뿐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나, 부처님 할아비라도

진정한 본래면목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아인데, 무엇이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요?

오히려 그 속에서 잔잔한 미소를 띠게 됩니다.

 

사실 여러분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괴로움이라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미움이라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마음 따라서 일어나는 하나의 허상임을

중심점에서 그 모든 것들을 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그 에고가

그 허상을 붙들고

그것을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거든요.

그래서 고통과 절망을 붙들고, 그것을 마음에서 실체화시킵니다.

 

근데 깨닫고 보면

우리는 신기루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노력해야 될 게 뭡니까?

계속 습관화시켜야 될 게 뭘까요?

내면의 중심에 서서 좌정하는 습관을 들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습기를 없앤다고 그러잖아요.

 

예컨대 어떤 사람하고 막 치고받고 싸웠어요.

여자들은 머리끄댕이 잡고 이년저년 하면서 싸웠어요.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때요?

 

또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그만 오해 풀고 하야하자하잖아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싸운 영향이 있기 때문에

기분이나 정서에 그 습기는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그을음이 남아 있어요.

과거에 쟤가 어쨌지.

과거에 쟤가 어떻게 했지,

과거에 쟤가 나에게 어떻게 상처를 줬지.

이걸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그게 그을음입니다.

김치를 방 안에서 치웠어도

아직 그 냄새가 훈습되어서 한동안 남아 있잖아요.

 

그와 마찬가지죠.

즉 우리가 분노의 종자를 끊어도

아직 그 종자의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이 남아 있는 기분을 우리가 습기라고 합니다.

그 습기마저 없애버리는 것을

습기를 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현행을 조복하고

종자를 뿌리째 뽑고

그 습기마저 버림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번뇌가 뭐로 바뀝니까?

보리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