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지만
그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므로
문제를 넘어서 위대한 존재가 되는 거죠.
인간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때때로 죄를 범하고 고통에 시달리면서
무지하지만 그 무지를 자각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각의 힘입니다.
이 자각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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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십우도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소를 찾아 나서는 여행은
내면의 참나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여러분이 지옥도를 돌든, 아수라도와 축생대에서 헤매이든
혹은 인간계든, 극락세계든
항상 나와 함께합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는 거죠.
그러나 이 윤회의 세계인, 이 현상계인, 이 사바세계에서는
이 본래면목이 업식, 업장에 가려져 있고
욕망의 우거진 숲에 숨겨져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처럼 어떤 원력에 의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면
이 업식, 업장이 적을 것이고
업에 의해서 우리가 몸을 받고 세상에 왔다면
업장, 그러니까 숨겨진 이 욕망의 숲이 매우 두터울 겁니다.
십우도에서 목동이 걸어가는 길은
욕망에 가려져 있고 업식업장에 묶여 있는
아집의 감옥에 갇혀 ‘질식하는 영혼’을 해방 시키는 여행이다.
숨겨져 있는 참나를 찾아가는 그런 여행인 거죠.
그런데 여러분 그 ‘내면에 내’가
어디 따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그 ‘내면의 나를 찾아 떠나는 그’가 곧 누구요?
나입니다.
파순(마왕)이 곧 붓다요.
붓다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붓다입니다.
그 둘은 이원적으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번뇌즉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 수행의 길에 접어들 때는, 처음 시작할 때는
에고에, 욕심에 젖어서 사는 에고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나 이면서 나 아닌 나’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거죠.
내 안에는 그래서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내가 있다는 것]을 깨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나와 그 참 나와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그 나가 곧 법신입니다.
저번 시간에 인간이 소를 잃어버린 원인에 있어
서양에서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죄의 근원이 아담이 범한 원죄에서 비롯되었고
불가에서는 개인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무명이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임을 관하셨고
소를 잃어버린 주된 이유라고 설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십이연기 무명의 뜻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상태이기도 하지만
좀 더 깊게 파고들면
최초의 인연, 모든 인연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연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무명에서 비롯됩니다.
만약에 무명이 없었다면
여러분도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저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태초 이전에 ‘알 수 없음(인식이 안 됨)’
혹은 ‘공과 무아’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 ‘본성의 바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인식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색이 있어야 되고 유가 있어야 됩니다.
비유하자면
잠이 들면 우리는 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잠자는 중에는 모릅니다.
잠에서 깨어 의식이 펼쳐지고, 색이 드러나야
“아, 내가 잠에 들었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의 불성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면 인식하지 못한다.
인연에 따라 생명으로서
시공간의 모습을 드러낸 순간
즉 우리 의식이 펼쳐지는 순간
그 존재를 유추하게 됩니다.
즉 무명은 어쩌면 여러분이 현상계에 나타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통해서
육도윤회의 고해 속에서
고뇌하고 번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왜 존재하는지 살펴보니까
까마득한 옛날에 무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명]은 첫 인연이자 시작점인 거죠.
이 처음 인연으로 인해서 무명에 반응하는 [행]이 나오고,
이 행으로 인해 너와 나를 구별하는 [식]이 생기고
이 분별심이 업이 되어 육체인 [명색]을 받게 되고
몸을 받고 나니 자연이 감각이라 불리는 [육경]이 생겨나고
감각을 갖추게 되니 [촉]이 있게 되고
이 접촉에서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의 어떤 느낌의 [수]가 생기고
일어나는 느낌에 [집착]을 하게 되니까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인 [애]가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되니 그것을 소유하고 가지려는 [취]가 생깁니다.
그 치에 의해 [유]가 생기죠. 소유하게 만들죠.
이런 소유의 업이 뿌리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생]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생으로 늙고 죽는 [노사]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제 십이연기론이죠.
따라서 여러분
무명을 없앤다는 것은
인연의 원인을 없애겠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원인인 이 무명을 멸하면
해탈을 이루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무명, 최초의 인연이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인과론은 모든 것은 선행되는 어떤 이유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런데 무명은 혼자거든요.
그런데 이 무명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이거예요.
최초의 이유는
아무런 앞에 선행되는 이유도 없이
그냥 일어났다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인과론에 배치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왜 있었나?
그냥 있었다와 같습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누가 만들었나?
그냥 있었다, 그거죠.
여기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명 이전의 세계는
아무런 이유나 목적도 동기도 없는
비인과론적인 세계, 비논리적인 세계, 비상식적인 세계고
무명 이후의 세계는
이유와 목적과 동기와 의도가 작용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용되는
인과론적인 세계라는 겁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우리가 빅뱅까지 소급해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빅뱅 이전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 수 없음’입니다.
오직 모를 뿐입니다.
말하자면 분자 이상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잖아요.
예측한 대로의 어떤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이 세계에 들어가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해지고
인과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원자의 핵을 싸고 도는 게 전자잖아요.
그런데 전자의 움직임은 전혀 비인과적입니다.
마술처럼 갑자기 여기서 나타났다가 저기서 나타났다가 그렇다는 거예요.
굉장히 비인과론적인 것이죠.
이것이 그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미립자도
전혀 선행하는 앞의 원인 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미립자들은
관찰자의 또 의식에 따라서 입자가 되기도 하고 파동이 된다고도 하잖아요.
여하튼 우리가 무명을 [관]함으로
무명에 오염된 자신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무명을 없애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십우도는 이 무명이 사라져가는, 무명을 없애가는
단계별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무명이 있게 되면
그 무명에 지배당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그래서 무명을 자각하는 자,
그 자를 자각하는 것이 ‘견성’이고 ‘돈오’라면은
무명에 훈습된 업장을 제거하는 과정은 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깨달았어도 여전히 번뇌는 일어납니다.
깨달았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가 누겁누세동안 무시이래로
육도윤회를 돌면서 가져온 이 습이라는 게 있어요.
그 습을 견성만으로, 깨달음만으로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운전을 어떻게 하고, 뒤로 빠꾸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 깨닫고 있다, 외워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우리가 실질적으로 운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운전면허라는, 견성이라는 라이센스를 땄다고
운전을 바로 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죠.
운전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법을 알게 된 거죠.
그러나 운전을 익숙하게 잘하는 건
더 습관을 들여야 됩니다.
직접 운전을 해봐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점수를 통해
비로소 ‘돈오’가 완성된다는 것이 바로 소승의 견해입니다.
십우도에 10단계는
이런 점수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습을, 습관을, 업식을, 업장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이죠.
그리고 그 첫 번째 훈련으로
붓다께서는
몸의 무상함을 관하는 훈련,
그리고 의식이 무아임을 관하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정법안장수기’에 보면
“탐욕을 없애려고 생각한다면 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상을 관해야 한다.”
이것이 ‘으뜸가는 용심, 마음의 쓰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무상함을 관한다는 거예요.
무상이란 뭘까요?
계속 얘기해 왔지만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순간일 뿐, 영원하지 않다는 거죠.
여러분 제가 놀라운 사실 하나 얘기해 줄까요?
벌써 1년 중 반절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이만큼 왔습니다.
과거는 이미 무상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다시 되돌아오지 않죠.
여러분 인생이라고 이렇게 안 될까요?
젊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주름이 질 거고 허리는 굽어질 겁니다.
금방 늙음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쩌면 ‘무상을 관하는 일’은 괴롭습니다.
깨닫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으로 작용하죠.
무상한 현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노화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음식은 목구멍을 통해서 위장에 머물다가 금방 똥오줌으로 변합니다.
이런 나를 잘 보면
이 나라고 하는 게, 이 육신이라고 하는 게
뼈다구와 여러 내장 등으로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소승불교에서는
먼저 내 ‘육체의 부정함(일곱 구멍에 더러운 것이 있다)’을 관하라고 하죠.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다 한들
한 꺼풀 벗기면
결국 수많은 뼈와 살로 구조된 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백골과 각종 피와 살로 구성된 자기를 깨달을 때
우리는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몸이 무상함을 아는 거죠.
그리고 그 속에서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무상함을 알아차려서 그것을 자각하는 일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반대로 굉장히 아름답고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상함에 대한 자각,
그러나 자각하는 그 자는
그 어떤 고통이나 번뇌도 없는 열반의 자리임을 알면
그때 우리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지복을 얻게 됩니다.
그 자리는 살고 죽는 것에 여여하고
길흉화복에 영향을 받지 않고
희로애락에도 흔들리지 않는
젊고 늙음에 관계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참나 아래의 생각이나 감정은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게 바로 ‘무아론’입니다.
이 육체든 생각, 감정의 마음이든
혼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항상 반연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죠.
그때그때 ‘어떤 연’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가만히 있는 건 못 견딥니다.
여러분 마음이라는 거 보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책이든 독서든 운동이든 뭐든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것이 연에 붙어 있는 마음이라 해서
반연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래서 이 마음은 어디를 찾아봐도
자유자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내 의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사실 반연하여서 마음이 시시각각 움직입니다.
몸도 반연하여서 시시각각 움직입니다.
붓다 이 속에서 반연하여서 움직이는
이 나는 자기애가 강하다는 것을 관하게 됩니다.
깨닫게 되죠.
기독교나 불교나 이 ‘자기애’가 곧 불선함이라고 봅니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나는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므로
이 자기애는 신에 대한 반역이고 죄악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방탄소년단이 말하는 러브유어셀프가 아니라
에고이스트적이고 타인과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욕심에 나를 말합니다.
이에 반해 부처는
보다 냉정한 철학적 안목으로
자기를 관찰하고
그 결과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무아라는
자기 인식으로부터 자기애를 부정합니다.
이렇게 기독교나 불교나 일반적인 종교는
자기만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이 자기애를 부정합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과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형태는 분명 다르죠.
그래서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든가
숫타니파타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을 목숨 걸고 보호하는 것처럼
일체중생에 대해서도 외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라.
내 자식을 사랑하듯이 내 부모를 사랑하듯이
똑같게 일체중생을 대하라는 거죠.
유가에서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든가 인의예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일체중생을 강조하는데,
일체중생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모든 일체중생
이것을 이제 유정이라고 그러죠.
모든 중생에 대한 사랑을 설파합니다.
개미 한 마리도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들 모두는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것이 불교적인 인식이죠.
너와 내가 같다는 시각
자기와 타자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의 정신
이것이 인간의 몸을 바꿔 살아가는
훌륭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훌륭하게 인생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이제 당위의 영역이죠.
우리 인간은 매일 무엇을 해야 할까?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를 안고 삽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의 진리는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참되고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깨쳐야
어떻게 살 것인가?의 행위의 문제가 나오기 때문이죠.
우리는 무상으로서 존재하고
무아로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무지의 자각이 나옵니다.
보이저 2호는 태양계 밖을 벗어나고
자연의 여러 수수께끼 같은 현상들은 과학적으로 풀었지만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우리는 근원적으로 무지합니다.
‘자기 발밑을 비추어 보라’는 조고각하라는 말이 있듯이
보고 듣고 자각하는
자신의 주인공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자기 추구를
자기 자신을 구명한다고 해서 ‘기사구명’이라고 하죠.
자기 마음의 심층, 심연 속에
명상이나 어떤 기도로 침잠하면서 신과 합일되는 길
에고를 넘어 무아가 되는 길.
기독교에서는 신으로
부처는 무아로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로 명명했죠.
소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자기에게로 돌아온 뒤
자기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이게 자아실현의 완성이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자신 속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나는 무엇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나는 어떻게 살까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선은 잃어버린 소를
참된 자기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 거죠.
여기서 자각이 중요합니다.
자각은 반조하는 힘이죠.
소가 도망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소를 찾아 떠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소가 도망친 것을 자각하는 사람만이 소를 찾아서 떠날 수 있습니다.
나는 참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근원적으로 모릅니다.
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이 무지를 자각할 때
자신의 본질을 찾는 여행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여러분 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점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거죠.
인간이라는 말이 그리스어로는 음미한다는 뜻도 있는데
예컨대 동물은 그저 볼 뿐이지만
우리 인간은 본 것에 대해 음미할 줄 압니다.
진.선.미.를 느낄 줄 압니다.
파스카르 <팡세>에 아주 유명한 말이 있죠.
“사고가 인간의 이대함을 형성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가장 나약한 하나의 갈대에 지하지 않지만
하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자연계에서 힘이 약한 우리 인간이
가장 최상위 그룹이 된 것은
이 생각하는 힘, 음미할 줄 아는 힘, 자각할 줄 아는 힘이 있기 때문인 거죠.
우리가 인생의 어떤 여러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우리 인간은 그 속에서
그 경험의 내용과 체험을 사유함으로써 무엇이 일어날까요?
자각이 일어납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소승이 친견했던 버마의 어떤 고승이 한 분 계시는데
지금은 물론 열반하셨어요.
버마는 불교 국가잖아요.
이분에게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절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까 자신의 아내가 죽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누구라도 죽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몇 달 후에 다시 부처님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자식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또 억울한 일로 경찰에게 붙들려서 온갖 고문을 받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겪으면 어떻게 될까요?
부처님을 원망하거나 신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한탄할 수가 있겠어.
자기가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부처님의 일을 했는데
이런 고난이 온 거잖아요.
그러나 이분은 자신에게 닥친 이익 시련을
자각하고 사유함으로써
그 불행을 넘어섭니다.
구약 성서 욥기에도 이런 얘기가 나오죠.
욥은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행복하게 살다가
폭도에 의해 재산을 약탈당하고
다음엔 태풍에 의해 아이들의 생명까지 빼앗기고
마지막엔 자기 자신도 심한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욥 역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넘어 섭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지만
그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므로
문제를 넘어서 위대한 존재가 되는 거죠.
인간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때때로 죄를 범하고, 고통에 시달리면서
무지하지만 그 무지를 장악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각의 힘입니다.
이 자각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각하는 자기는 새로운 자기이기 때문이죠.
무지와 아집의 껍질을 뚫고 새롭게 피어나는 순수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자각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일은
순수하게 자신만의 몫이고
그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십우도에서 목동은 왜 소를 혼자 찾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찾아 나서면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목동이 홀로 고독하게 찾아 나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를 밝히는 내면의 여행은
자기 혼자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습니다.
홀로 태어나고, 많은 것들을 이루고 성취하고 달성했어도
죽어갈 때는 여전히 혼자 죽습니다.
누가 같이 죽어줄 수가 없죠.
자신의 죽음을 타인이 결코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을 향해
내가 죽은 뒤에는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서 수행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자득명이라는 표현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불성을 밝히고 의지해서 걸어가야 한다는
이 자력을 표현하는 말이죠.
자신을 모르고,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몸 밖의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의존이든, 부처에 대한 의존이든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모든 의존은
어떤 의존이든 불행을 낳습니다.
하물며 사람에 대한 의존은 두말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숫타니파타 제3장의 말처럼
‘무소의 불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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