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사람이 출생에 의해서 귀하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성스럽다고 뻐기는 바라문들에게 성스러움이 신분계급에 의해서, 출생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
이런데서 결정이 되는 거다 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교만한 사람,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교만을 꺾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가르침을 인도했다는 가르침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스스로 ‘천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비굴하게 살아간 사람
즉, 천민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을 이끌고 길을 가시는데, 저 앞에 똥을 치는 천민, 이 똥치는 천민은 천민 가운데도 가장 신분이 낮은 그런 천민입니다. 불가촉천민이요.
똥꾼이 똥통을 들고 이렇게 길을 오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기 때문에 그는 땅만 쳐다보고 계속 온 거요.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드니까 저 앞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오고 있단 말이오.
이 똥꾼이 볼 때는 그들은 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출신들이오.
브라만 출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크샤트리아, 장자출신들이란 말이오.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란 말이오.
평상시 같으면 이렇게 브라만이 지나가는 데 똥통을 매고 냄새를 풍기고 옆에 있으면 크게 혼이 납니다.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고. 그래서 소위 말해서 쫓겨나게 되죠.
그래서 그는 미리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숲 옆 오솔길로 가버렸어요.
그랬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부처님도 그 오솔길로 들어가신 거요.
그러니까 똥꾼은 오솔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피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땅만 보고 계속 그냥 걸었는데,
부처님이 그리로 오셨는데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냥 탁 부딪힌 거요.
부딪히면서 넘어져 버린 거요.
똥통도 다 엎어져버린 거요.
그러니까 똥물이 온 몸에 덮어쓴 거요. 옷을 다 버린 거죠.
그리고 그 일부는 튀어서 부처님의 옷까지 더렵혀지게 된 거요.
그래서 이 똥꾼은 ‘이제 죽었다.’ 이렇게 생각한 거요.
당시 사회에서는 이 불가촉천민이 높은 계급인 브라만의 그림자만 밟아도 재수 없다고 죽여 버렸다. 이렇게 말하죠. 그만큼 차별을 받았다. 이거야.
그냥 짐승보다도 못한 거요. 부정탄다는 거요. 부정탄다. 재수없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는 죽었구나하고는 엎드려 살려달라고. 목숨은 살려달라고. 이렇게 빌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니다이여, 일어나거라.” 하고는 이 사람이 이름이 니다이인데, 그의 팔을 잡고 그 냄새나는 그의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요.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거요.
바로 옆에 냇물이 있었는데, 부처님은 이 똥꾼 니다이를 데리고 그 냇가로 데려갔습니다.
“저 냇가에 가서 몸도 씻고 옷을 씻어라.” 이랬어요.
니다이는 가서 자기 옷을 벗어서 냇가에서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리고 몸도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니다이를 불러서
“니다이야, 지금 옷이 어떤가?”
“예, 깨끗해 졌습니다.”
“몸은 어떤가?”
“몸도 깨끗해 졌습니다.”
“조금 전에는 어땠느냐?”
“예, 부처님, 조금 전에는 매우 더러웠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깨끗해 졌느냐? 조금 전에 더러웠으면 지금도 더러워야 되지 않는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는 제가 똥을 뒤집어써서 더러워진 거고, 지금은 물에 깨끗이 씻었기 때문에 깨끗해졌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니다이에게
“니다이여, 신분이라는 것도 그렇다.
너는 본래 천한 것이 아니다. 너가 천한 사람의 구성원 속에 들어있어서
그런 관념,
그런 생각에 살기 때문에
더러워진 것이다.
더럽다고 여기고 있던 것이다.
마치 옷을 이렇게 물에다 빨게 되면 깨끗하듯이
너의 그 어리석은 생각,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된다면,
너도 귀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니다이는 그 말을 듣자,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렇다. 나도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도 여기에 있는 저 수행자처럼 될 수 있는가.
더러운 옷이지만 빨아서 깨끗하게 된다면,
나도 수행을 하면 깨끗하게 된다면 나도 수행자가 되고 싶다.
부처님 저도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 될 수 있다.”
“저도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오라, 니다이여.”
이렇게 해서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니다이는 무슨 배운 지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마는 늘 정진을 할 때,
옷을 빨면 깨끗해지듯이
이 말과 행동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
나도 귀한 존재가 될 수가 있다.
청정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사음하고, 거짓말 하고, 술먹고 취해서 다니고,
이런 것들은 마치 똥을 뒤집어쓴 거와 같아서
더러운 그런 언행이, 마음속에 탐심과
즉 욕심내고, 성내고, 짜증내는 어리석은 이 탐진치 삼독은
마치 똥을 뒤집어 쓴 이 몸처럼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똥을 냇가에 가서 씻어버리면 깨끗해지듯이
이 살생하는 이 행위를 버리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행위로 바꾸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뺏고하는 이것을 오히려 남을 도와주는 행위로 바꾸고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을 청정하게 바꾸고
거짓말하고 욕설하는 것을 진실을 말하고 자비롭게 말하는 것으로 바꾸고
술먹고 취해 다니는 행위를 멈추고
지혜롭게 사는 그런 생활을 한다면
그런 말과 행동을 한다면
마음속에 욕심을 버리고,
화내고 짜증내는 것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린다면
이것은 마치 더러운 옷을 빨아서
깨끗한 옷이 되는 것과 같다.
이것만 버리면, 이 빨래만 하게 되면
나도 귀하고 깨끗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빨래하는 마음으로 이 악행을 버리고 악심을 버리는 공부가 굉장히 열심히 되었던 거요.
그래서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바로 깨달음을 얻고 최고 성자의 경지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에게 고상한 말로 경전을 인용해서 어려운 어떤 법을 가르쳐서 행하라고 해서 그가 하다가 도저히 못해서 지쳐서 나가떨어지도록
그래서 “나는 수행자가 못되는가 보다. 나 같은 사람은 안 되는가 보다.
나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렇게 좌절감을 느끼게 한 게 아니고
그가 평소에 하는 것, 그가 빨래하는 거기에 견주어서 이 수행을 설명해주므로 해서
빨래하면서 옷이 깨끗해지는 것은 잠시지 않습니까. 그죠?
아무리 더러운 걸레도 비누칠해서 잘 빨고, 삶으면 깨끗해지지 않습니까.
그 잠시 노력해서 깨끗해지는 그걸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 자기가 이제까지 알게 모르게 행했던
이 악심, 이걸 쉽게 버리게 된 거요.
이것만 버리면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람이 된다고 하니까,
거기에 추어도 그런 행위를
살다보면 살생 안하고 어떻게 사나?
도둑질 안하고 어떻게 사냐?
사음 안하고 어떻게 사냐?
거짓말 안하고 어떻게 사냐?
욕심 안내고 어떻게 사냐?
짜증 안내고 어떻게 사냐?
이런식으로 그 업에 끌려서 합리화 시키는 이런 태도에서
빨래하는 마음으로
이것만 버리게 되면 나도 고귀한 존재가 된다. 하니까,
정말 용맹정진을 한 거요.
이런 니다이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 천한 사람, 무식한 사람도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정진을 해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지니고, 선정을 닦고
마침내 지혜를 증득해서 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단 말이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사람보다 훨씬 더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잠자리를 가지고,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더 많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우리가 수행정진이 미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법에 귀의하는 태도가 약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그런 태도가 약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불자로서 살아가면서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을 차별하고
남자 여자를 차별하고
지위 높은 사람, 지위 낮은 사람을 차별하고
한국인과 외국인을 차별하고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불자의 길이 아니다. 이 말이오.
아직도 이 세상에는 피부빛깔에 의한 차별이 있죠.
흰 것은 아주 좋은 거고
검은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하얀 옷을 입히고
악마는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듯이
이게 바로 백인 우월주의에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한 때,
이런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천사는 흰색으로 표현하고
악마와 사탄은 검은색으로 표시하고
그러니까 흑인들은 이런 종교를 받아들이게 될 때,
자기는 이미 피부 빛깔 적으로 열등의식을 갖게 되는 거요.
그래서 그 검은 피부에 흰 분을 바르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희게 되지 않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가 이렇게 흑인이 백인을 닮아가려고 하는 이런 어떤 사상,
그런 철학을 갖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바로 검은 것이 아름답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 하는 이 혁명적 사고가 필요한 거요.
오늘 우리가 환경 운동을 하는데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우리는 무조건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게 잘 사는 거다.
1인당 콜라 몇 병 마셨냐?
1인당 술 몇 병 마셨냐?
1인당 전기 몇키로 썼냐?
수돗물을 얼마나 많이 썼냐?
1인당 병상이 얼마나 많으냐,
이런 거 갖고 잘 사는 거다?
병상 많은 게 어떻게 잘 사는 거요.
콜라 많이 마시는 것이 어떻게 잘 사는 거요.
이건 뭐냐?
큰 게 좋은 거라는 거요. 뭐든지.
그래서 여러분들도
키 작은 사람은 열등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큰 게 좋은 거다.
집도 크고, 사람도 크고, 뭐든지 다 크면 좋은 줄 알아요.
그래서 이 환경운동을 하려면 사고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는 가운데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가지고, 높은 것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된다.
부러워하게 되면 어떠냐?
비난을 하게 됩니다.
상대편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고가 딱 바뀌어버리면 어떠냐?
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똥을 많이 가졌다고 부러워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죠?
내가 똥을 적게 가져갔다고 열등하게 생각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거나
남을 부러워하거나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사라져야
바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당당해 진다. 이 말이오.
외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오?
‘저 사람 미국사람이다.’ ‘유럽 사람이다’ 하면 높이는 생각이 들고
동남아 사람이다 이러면 낮춰보는 생각이 들잖아요.
사람을 대할 때 함부로 대한다.
지위가 높은 것에 대해서도, 남녀에 대해서도
이런 것들을 우리 불자들은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서
피부빛깔이 희거나 검거나 다만 다를 뿐이다.
어떤 것이 더 귀하고, 어떤 것이 더 천하고,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어떤 것이 덜 아름답다 그런 게 아니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꽃을 볼 때도
호박꽃은 못생겼고, 장미꽃은 예쁘다. 이럴게 아니라
꽃의 색깔이 다르고, 꽃의 모양이 다르고, 꽃의 종류가 다르고
꽃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각각 그 나름대로 생겨서 피어난 겁니다.
또 사람에 따라서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사짓는 우리 할머니 세대는 장미꽃보다는 호박꽃이 훨씬 좋습니다.
장미꽃을 어디에 씁니까? 가시만 있지. 불도 못 떼고, 반찬도 안 되고, 양식도 안 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니까 누에가 있는데 누에를 치는 농부는 그 누에야 말로 자기 생명과 같은 존재에요.
그 누에를 쳐서 그걸 팔아서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식량도 구하고, 옷도 사 입고
그러니까 누에를 보면서
“아이고, 예쁘다, 귀엽다, 잘도 큰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누에를 보며 어때요?
‘징그럽다’ 놀라지 않습니까.
이렇게 누에는 누에일 뿐이다.
그것은 예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징그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관념,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검고 흰 것을
좋고 나쁜 거로 봐서는 안 된다.
색이 다를 뿐이다. 인종이 다를 뿐이다. 언어가 다를 뿐이다. 종교가 다를 뿐이다.
문화가 다를 뿐이다.
각각 그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특색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 우열의 논쟁을 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나의 문화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동시에 남의 문화 남의 종교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의 종교 문화를 우월하다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종교나 문화를 열등하다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 사회에 보면
자기 종교는 소중한 줄 알고, 남의 종교는 열등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데서 오늘 우리 불자들은
비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당당해야 한다.
내 키, 내 얼굴, 내 고향, 이거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키며, 얼굴이며, 이런 것도 다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고향은 소중하다고 그러고, 다른 사람의 고향을 비난한다면
이것은 평등한 마음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알게 되면
오늘 내 몸이
팔을 하나 못쓴다. 다리를 하나 못쓴다. 눈이 안 보인다.
이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불편한 것은 뭔가 대체를 하게 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열등한 것은 어떠냐?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버리든지, 다른 사람을 죽여 버리든지
그래야 이게 해결이 됩니다.
불편할 뿐이다.
그것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은 불편하니 그 불편함을 대체하려고 휠체어를 만드니 걷는 사람보다 더 빨리 갈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하나의 장애,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봐야 한다.
그러나 옛날에 우리는 이것을 병신이다, 이래서 열등한 것으로 봤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들의 생각이 이제는 바뀌어 나가야 된다.
그래서 똥꾼 니다이가 그 천한 신분의 감옥에 살다가 버리고
성자의 길로 갔듯이
오늘 우리들도 인생을 한탄하지 말고
하나님 원망하고 사주팔자 타령하지 말고
바로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탐진치 3독을 소멸시킴으로 해서
다 성자의 길로 가자. 갈 수 있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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