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칸타키강을 지나서 그리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반다마을을 지나고 하티마을을 지나고, 그리고 압빠마을을 지나고 잠보마을을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보가나가라마을에 이르셔서 그곳에서 머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대교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그 중에 하나가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어떤 비구가 이렇게 주장을 한다는 거요.
“존자여, 세존께 직접 나는 들었는데,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율이다. 이것이 큰 스승의 교설이다.’
나는 그것을 듣고 그대로 수지하고 있다” 라고
이렇게 누가 주장을 한다는 거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이 안 계시는데, 어떤 비구가
“내가 부처님께 이런 법문을 직접 들었다.
그래서 나는 들은 대로 내가 수지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넌 틀렸어. 그러면 안 돼.” 이렇게 무조건 거부해도 안 되고,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니까
“아, 그래요, 아이고 그렇습니까?” 이러고 무조건 받아들여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직 그 말의 작구를 잘 파악해야 된다.
그가 하는 말에 그 뜻을 잘 들어봐야 된다.
그리고 그 문구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하고 견주어 봐야 돼.
저 사람 말은 경에 없는 얘기인데, 저 사람 말이 경 안에 그 내용과 같은 말이 있는가,
그리고 율, 그가 하는 말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율에 합당한 말인가.
이것을 다 견주어 봤을 때, 그 경과 율에 그가 하는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얘기가 없다.
이렇게 되면 그가 아무리
“이 얘기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야. 내가 직접 들었어.”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거요.
또 반대로 그 작구를 잘 의미를 새겨보고 경율과 비교해보니까 그의 말이 경과 율에 있는 얘기와 거의 같은 얘기에요.
그렇다면 그 얘기를 받아들여라. 이거야.
이렇게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후대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어” 해서 자기 마음대로 어떤 주장을 써서 내 놓는단 말이오.
그래서 위경일수록, 즉 가짜 부처님의 말씀일수록 앞에 뭐라고 씁니까?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야, 이것은 부처님의 진짜 말씀이야.
이것은 부처님이 애지중지한 말씀이야’
이런 것을 자꾸 강조하게 돼.
그리고 이 경을 읽으면 큰 복이 있어.
한량없는 복이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는 거요.
진짜 말씀에는 그런 주장은 없잖아. 그죠?
진짜 부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니까 현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생겨났는지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어떻게 소멸할거냐.
그래서 우리가 직접 행해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 법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눈 있는 자 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나의 법이다.
그런데 ‘이 경을 몇 번 읽으면 복이 많아진다.
이 경을 몇 번 읽으면 수명이 길어진다. 자식을 낳는다.’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 경문 앞에 어떤 글자가 붙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 뭐 이거이것은 진짜 부처님 말씀입니까?
누가 얘기하는데요, 이것은 위경이라고 그러던데요.”
그런 거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어떤 제자가 와서 물었죠.
“부처님,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많은 나쁜 짓을 했다하더라도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그 죄가 싹 다 씻겨버린다는데요,
그래서 하늘나라에 간다는데요. 그거 맞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아니야. 그건 틀렸어.” 이렇게 말하면 남의 종교를 비방하는 게 되죠.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그 사람들의 말을 존중해야지.
“아마 그럴 거야.”
이렇게 말하면 진리 아닌 것을 인정하는 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어요?
“감미니야.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가겠구나.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 거요.
그러나 그들의 말이 맞다고 할 때는 이런 모순이 생긴다.
그 모순을 스스로 알고,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그렇다 아니다 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죠.
그래도 이미 질문자는 알아들어버렸어.
이게 깨침이에요.
그러니 법을 공부하는 자는
그 경문을 잘 읽어보면 이게 법에 합당한지 안한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와서 물었는데
“아, 그거 위경이요.” 이랬는데 다른 교수님한테 물으니
“아니야. 그건 진짜야.” 이러면 결론이 안 나잖아요.
그럼 제3자한테 가서 물어보면 또 다른 답이 나오고.
제 4자한테 가서 물어보면 또 다른 답이 나오고.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러죠.
“아이고 골치 아프다. 불교는 왜 이리 복잡해.”
이것이 남의 말에 의지하는 거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체험되고 검증되는 거요.
불법의 근원이 어떤 건지,
즉, ‘이것이 진리다’ 하는 도장에 해당되는 게 뭐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이지 않습니까.
이 무상과 무아의 법칙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면
바로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열반적정에 이른다.
그런데 이 무상과 무아에 무지하면
알지 못하면 어떠냐?
하는 일마다 다 괴로움이 된다.
그러니 그 가르침을
이 무상과 무아에 견주어볼 때
부처님의 연기법에 견주어볼 때,
이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어요.
어디 가서 빌면 복 받는다더라.
그게 진짜입니까?
그건 인과법에 어긋나죠.
지은 인연의 과보가 생긴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는다.
복을 지어서 복을 받는데,
어떻게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겠느냐.
그것은 인과법에 어긋나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쁜 일을 해놓고, 부적을 하나 쓰면 재앙이 없어진다는데요,
그것도 인과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수행자라면 나쁜 인연을 지었으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아야 됩니다.
기꺼이 받아낼 때는 이미 그것은 과보가 아니에요.
그러니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어야 하고,
재앙을 받지 않으려면 계율을 지키고
재앙이 올 인연을 짓지 말아야 하는 거요.
이미 지었거들랑 기꺼이 받아내야 되는 거요.
이것이 수행자가 갈 길이다.
이게 법에 귀의한 자가 갈 길이다.
그러기 때문에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이게 법에 합당한지 안한지를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돼.
그 눈이 열린 게 뭐요? 견도에요. 견도.
그래서 바른 법에 귀의해서
법의 이치는 알아야 됩니다.
그 이치를 알기 전까지는 수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저곳 가서 공부한다고 ‘수행한다’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그건 헤매고 다니는 중이에요. 헤매고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법에 눈뜬 뒤라야,
눈을 뜨고부터 그다음부터
수행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거요.
이치는 깨쳤지만 행해지지 않죠.
그래서 이치를 알고 그 이치에 따라
끝없는 부단한 연습을 하는 것이 수도다. 수행이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 지금까지 교화사례를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눈을 뜨지 않습니까. 진리의 눈을 뜨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다원과를 얻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수행에 들어가는 거요.
오늘 우리들은 부처님법에 귀의해서 정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니르바나를 해탈을 경험하지 못하는 거요.
그러니까 법이 얼마나 중요하냐.
“내가 불법 안 만났으면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법을 만난 기쁨이 없다.
이 좋은 법을 스스로 깨닫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그래서 나를 깨닫게 해주신 그분에 대한
존경,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또 이 좋은 법을 함께 닦아나가는 도반들, 불자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단 말이오.
왜?
내가 법을 만난, 법을 경험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법에 귀의해야 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불자는 법에 귀의해야 한다.
법에 귀의해서 정진을 해야
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번뇌가 사라지는, 분별심이 사라지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런 경험을 얻게 되죠.
그때 우리가 법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이 생겨나게 된다.
천하가 어떻게 되든지, 거기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천하가 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휩쓸리지 않게 된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세력이나 이런데 휩쓸리지 않게 되는 거요.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휩쓸리게 되죠.
100명이 잠을 자는데, 그 중에 99명이 잠들어 있고, 한 명만 잠에서 깼어.
그런데 그 잠자는 사람이 99명이 “불이야”하고 다 똑같은 잠꼬대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깨어 있는 1명이 그 99명을 따라갑니까? 아니죠.
“쯧쯧, 잠꼬대하네.” 이러지.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99명을 다 깨울 수가 있습니다.
여긴 다수가 아닙니다. 흔들어 깨어준다.
그럼 눈을 뜨면 불이 난 게 아니란 걸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법에 눈을 뜨게 되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이 사람 얘기 듣고, 저 사람 얘기 듣고 자꾸 흔들리느냐,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이것은 아직도 견도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바른 법에 딱 근거를 해서 그런 것들을 판단해라.
그냥 누가 얘기한다고 무조건 따라가거나 또는 무조건 거부하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다. 이런 얘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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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와서 이렇게 주장한다는 거요.
“존자들이여, 이러저러한 곳에는 장노비구 상수비구들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나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율이다. 이것이 큰 스승의 교설이다’ 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수지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부처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10대 제자라든지, 아주 덕망이 있는, 한 사람이 아니고, 그들의 모임인 상가로부터 내가 이런 법을 듣고, 율을 듣고, 지침을 받았다. 이렇게 주장하더라도
그 권위에 따라 무조건 그렇다 하고 따라가서도 안 되고,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된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 경에 대조해보고 율에 대조해보고
그 가르침의 의미를 깊이 파악해보고,
붓다의 가르침에 합당한지 안하는지 이렇게 해서
받아들이거나 배격해야 된다.
--
그리고 세 번째로 어떤 비구가 와서
“존자들이여, 이러저러한 곳에 장노비구가 많이 머물고 있다.
이들 비구는 박식하여 성전에 통요하고 법을 보존하고 율을 지키며 논문을 보전하고 있는 훌륭한 비구들인데
그들 장노비구들로부터 직접 나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율이다, 이것이 큰 스승님의 교설이다’ 라고 듣고, 그대로 수지하고 있다라고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무조건 배격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주장, 그 작구를 깊이 음미해보고, 그리고 연기법, 삼법인에 견주어 보고, 부처님의 5계, 10계, 또는 250계 이런 계율에 다 대조해보고,
“아, 그것은 합당하다” 이렇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배격해라.
어떤 권위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따라서도 안 되고
또 누가 주장한다고 그래서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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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존자들이여, 이런 저런 곳에 한 명의 장노비구가 머물고 있다.
그 장노비구는 박식하여 성전에 통요하고, 법을 보존하고, 율을 지키며 논문을 보존하고 있는 훌륭한 비구가 있는데, 그 장노비구로부터 직접 나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룰이다. 이것이 큰 스승의 교설이다’라고 듣고 그대로 수지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더라도 그 말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또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된다.
그 얘기를 잘~~~~ 들어보고, 작구 하나하나를 잘 새겨보고, 경과 율에 대조해보고,
그 진의가 경율에 맞다면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버려라.
이것이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후대에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빙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가에서 내려온 지침이라고 빙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로들의 말이라고 빙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 훌륭한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오더라도
그걸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배격해서는 안 된다.
즉, 그런 권위를 갖고 얘기한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하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그 주장하는 사람이 신분이 하찮다고
“네가 뭘 알아” 하고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된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배격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을 잘 들어보고, 작구를 음미해보고
그리고 그의 말을 경전과 일일이 다 살펴보고, 계율에 맞는지 살펴보고
그래서 그 진위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합당하다면 받아들여라.
“이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가 설령 다른 종교나 다른 학문, 다른 사상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진위를 봤을 때 그것이 개관적 사실에 합당하고
그것이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과 부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서두에 써놨다든지,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잘 살펴봤을 때
‘이것은 법에 합당하지 않다. 이것은 경의 얘기와 다르고 율의 얘기와도 다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렇지가 않죠.
주로 ‘형식이 어떠냐? 모양이 어떠냐? 누가 얘기했냐?’ 이걸 갖고 판단하지
‘그 내용이 어떠냐’라고 판단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서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판별하느냐.
대부분의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뭔가 역사적 사실을 내걸거나, 다수를 내걸거나, 전통을 내걸거나 이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
이런 것에 의해서 무조건 이건 진리다. 아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가 없다.
그 내용을 잘 살펴서
이것이 객관적 사실인가
이렇게 접근해 들어가야 된다는 거요.
그럴 때 우리는 진리를 검증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얘기, 언설인 작구가 있다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그 가르침을 따라 경험해보고, 체험해보니 확실하더라.
이럴 때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리가 되는 거요.
내가 경험되어지고 체험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겐 아직 진리가 아니에요.
그건 아직 내가 확인을 못한 거요.
내가 확인하지 못한 것은 배격하라는 게 아니라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직 보류상태에 있어야 됩니다.
법은 반드시 행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믿음, 미신이나 우상이라는 것은
확인되어질 수가 없어.
그건 너무나 막연한 얘기야.
‘죽어서 천당 간다.’
그건 죽어봐야 알 일이야.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얘기야.
그러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경험적으로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얘기에
우리가 정신을 팔고 지금 살고 있는 거요.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가?
그것은 우리가 법대로 행해보면
내 자신이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확인이 되어지는 거요.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거요.
누가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런 좋은 법이 불법이고
이 좋은 법마저도 후대에 가면 또 다른 권위로
이런저런 부작용이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자위의, 법귀의를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어떤 주장이 있다하더라도
그 형식적 주장에 끌려가지 말고
반드시 그 작구를 잘 음미해보고
즉, 그 내용을 잘 살펴보고
그리고 지금까지 배운 정법과 비교해서 합당한지 안한지를 검토해보고
그래서 받아들이든지 배격하든지 해라.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배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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