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는 파바마을에 이르셨습니다.
파바마을에 이르셔서 어떤 망고동산에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망고나무가 이 마을에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망고숲이었어요.
대장장이 아들 춘다는 여기서 대장장이라고 하는 것은 천민이라는 뜻입니다.
각 카스트마다 빨래하는 사람, 똥 푸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이런 것은 다 천민의 카스트를 뜻합니다.
대장장이 춘다가 자기 망고숲에 부처님이 와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망고숲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부처님께 법을 청해들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너무너무 감동을 했어요.
너무너무 기뻤어.
그래서 말하기를,
“부처님, 내일 아침에 제가 공양을 대접하겠습니다.
부처님과 상가스님들, 다 오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청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승낙을 받자 춘다는 너무너무 기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춘다가 돌아간 뒤에 아난존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춘다는 공양을 올릴만한 형편이 못 됩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느냐고 하면,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탁발을 나간 스님들이 공양을 얻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열반경에 보면 즉,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에서 보면, 누구의 공양을 초대받았다 이런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암나빨리의 공양을 초대받은 이후로 여기까지 누구의 공양에 초대받았다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왜그러냐하면 부처님 한 분만 초대할 수 없습니다.
상가의 대중이 여럿 있을 때는 그 전체 대중을 초대해야지 그 중에 선택해서 몇몇을 초청할 수가 없다.
또 그렇게 초청을 받았을 때는 그 초청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먹을 것도 없는, 그래서 부자도 대중을 한꺼번에 초대해서 공양을 접대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어떻게 이 많은 대중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가 있겠느냐,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아난존자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던 거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춘다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것이다.”
그래도 아난다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에 춘다가 왔습니다.
“부처님,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때를 아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부처님과 대중들이 춘다의 집에 갔을 때, 여러 종류의 음식으로 대중들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춘다가 준 공양을 다 받았습니다.
그때 한 음식을 부처님의 바루에 퍼주니까 부처님께서 보시더니
“춘다야 이 음식이 무엇인가?”
“네, 수크라하맛따바입니다.”
“춘다야, 이 음식은 누구도 소화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음식은 다른 비구들에게는 주지 말아라. 이 음식은 땅을 파고 묻어라.”
그래서 춘다는 그 음식을 다른 스님에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땅을 파고 묻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위하여 아주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아주 심한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한 복통이 일어났는데, 부처님께서 법문이 끝나자
“아난다여, 속히 가자”
이러면서 약간 서둘러서 자리를 떠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부처님은 복통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그렇게 심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결국은 설사를 하셨는데 피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심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대중들이 춘다가 올린 음식이 잘못되어서 부처님께서 큰 병에 걸리셨다.
안 그래도 연세 많으시고 또 이번 여름에 크게 편찮으시고 겨우겨우 몸을 이끌고 가는데 거기다 음식을 잘못 드려서 식중독까지 일어나게 되었으니
춘다는 음식은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이렇게 수근대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정도가 아니겠죠.
‘춘다는 나쁜 놈이다.’
‘부처님께 음식을 잘못 올려서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아무것도 없는 놈이 뭘 건방지게’
이렇게 아마 일반인이라면 비난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 수행자들이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아주 부드럽게
‘춘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이렇게 표현들을 했습니다.
춘다는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부처님을 심하게 아프게 했으니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큰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대중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럼 과연 이 음식이 뭐냐? 이런 문제에요.
이 수크라하맛따바라고 할 때, 이 수크라하라는 말이 돼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뒤에 맛따바가 뭐냐, 여기에 따라서 돼지고기다, 부처님이 돼지고기를 여름에 잘못 드시고 식중독에 걸렸다.
또 일부에서는 ‘아니다. 돼지 버섯이다. 버섯을 잘못드시고 식중독에 걸렸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양에서 주로 이렇게 돼지고기라고 얘기하죠.
저는 이 파바마을,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그곳을 방문하면서 저도 그것이 늘 궁금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음식이었을까, 정말 서양 불교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음식이었을까?’
저를 안내한 사람들이 이 맛따바라는 것은 벵갈어에서는 토란이라는 거요.
그때 저는 퍼뜩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우리나라에서 개살구 이럴 때, 그게 개라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살구다할 때 앞에 동물의 이름이 붙을 때 그것은 야생이다. 이런 것을 뜻합니다.
돼지감자, 감자 앞에 돼지가 붙었다. 이런 것도 사료용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이 수크라하맛따바라는 것도 돼지고기의 뜻이 아니라 어떤 야생의 식물의 이름이다.
즉, 맛따바가 토란이라면 열대지방에 가면 토란이 야생합니다.
굉장히 논둑이나 산이나 토란이 아주 많거든요. 야생토란이.
그러니까 꼭 그것이 토란이 아니라 하더라도 야생하는 어떤 식물의 뿌리다. 이런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 춘다는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때 식량이라든지
즉, 쌀, 옥수수, 밀가루라든지 이런 게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런 것이 있어서 이렇게 많은 대중을 공양 올릴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난다가 ‘춘다는 공양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우려를 했던 겁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공양을 올릴 수 있었느냐,
아마 천민이고 가난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이런 보리고개 때는 야생하는 어떤 풀이나 나무, 이런 것들의 뿌리나 껍질을 벗겨서 식사대용으로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마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야생토란이라면 그는 아마 밤새 야생물질을 채취해서 그것을 잘 요리를 해서 드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 가지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요리를 했다니까, 그 중에 이 수크라하맛따바는 아주 독성이 있는 것이랍니다.
토란도 독성이 있죠.
그것을 만약에 생것을 갈아서 주스처럼 먹는다면 아마 심한 복통이 일어날 겁니다.
이런 데에서 늘 그것을 먹던 사람들은 괜찮지만 그것을 먹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먹으면 심한 독성이 나타나게 되죠.
이런데서 아마 부처님께서 다른 비구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하겠죠.
‘오, 부처님께서 그럼 알았다는 얘기 아니야. 알았는데 왜 부처님께서 드셨을까?’
이게 또 궁금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양을 받는 태도입니다.
바리때를 들고 남의 집 앞에 가서 공양을 받을 때는 주든지 주지 않든지,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어떤 종류를 주든지, 그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달라거나 무엇은 안 된다거나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욕구에 치우쳐있는 태도입니다.
거기에는 바램이라고 하는 그런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다.
수행자는 다만 자기 내면을 응시하며 그집 앞에 서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주든지 그것은 주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받는 사람은 다만 고맙다고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주시오’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는 ‘저 분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니 그것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을 자신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바루에 이미 수크라하맛따바가 담겨버렸어요.
그러기 때문에 주는 대로 받아 드셨던 겁니다.
그러나 다른 대중들에게는 주지 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이런 데에서 어떤 야생의 식물을 채취해서 대중들에게 잘 요리해서 대접하지 않았겠는가.
이럴 때 우리는 춘다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이렇게 밤새껏 자기가 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해도
때로는 이렇게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사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게 아니에요.
정말 잘한다고 했는데, 나쁜 의도를 가진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일이 생길 때,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지 않으셨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또 얼마의 길을 가시다가
“아난다여, 좀 쉬었다 가자” 이렇게 해서 어떤 나무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깔게 하시고, 거기서 쉬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목이 마르구나, 물을 좀 떠다다오.” 했더니, 아난다가
“예, 부처님, 그런데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이 흐려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카쿠타강이 나오는데, 거기는 아주 물도 맑고 하니까 거기 가서 물을 드십시오.”
또 조금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물을 좀 떠 다오.”
아난다가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또 얼마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물을 좀 떠 다오. 목이 심히 마르다.”
3번을 요청을 받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루를 가지고 물을 뜨러 갔습니다.
가서 아난다가 너무너무 놀랐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갔는데, 분명히 흙탕물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물이 맑을 수가 있는가.
너무너무 놀라서 물을 떠오면서 부처님께 와서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을 오래 시봉을 했지만, 그래도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자기 눈으로 본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 말씀도 안 믿는다. 이거야.
“부처님,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 눈으로 봤는데, 500대의 수레가 방금 지나가서 흙탕물이라서 안 돼요.” 이렇게 되죠.
“물을 좀 떠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물 뜨러 갔더니
오, 흙탕물이야. 그래서 흙탕물을 떠 왔어.
“부처님, 물 뜨러 갔더니 흙탕물인데요, 이건 못 드시지 않습니까?”
그럼 “알았다.” 이럴 텐데
자기 눈으로 봤다고 딱 고집을 하죠.
세 번을 요청하니까 할 수 없이 물을 뜨러 갔는데, 자기가 본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니 이럴 수가. 방금 500대의 수레가 분명히 지나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인생을 공부하면서 이럴 때가 많습니다.
자기 눈으로 봤거나, 자기가 들었거나, 신문이나 TV에 났거나, 그러면 그것은 진실이다.
이렇게 확신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 가운데도, 우리가 진실이다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이렇게 함부로 확신하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얘기를 잘 듣고
받아들여 보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것이 무조건 맞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 본 후, 아니라고 확인을 해도 얼마든지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같이 인생을 살면 그렇게 되지 않죠.
상대가 말 다하기 전에 “몰라요” 이러든지 안 그러면 “알았어요” 이러죠.
그것은 알았다.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듣기 싫다’이런 얘기로 가기가 쉽습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몸을 추스르시고, 또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마침 카쿠타강에 이르렀습니다. 카쿠타는 예나 지금이나 물이 아주 맑습니다.
인도의 대부분은 물이 맑지 못합니다. 많이 흐립니다.
그런데 이 카쿠타 강물만큼은 아주 깨끗하고 맑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도성지순례를 할 때는 반드시 카쿠타 강을 지날 때, 차를 세우고 내려가서 부처님처럼 물도 한 모금 먹고, 목욕도 하고, 그렇게 보는 게 좋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카쿠타의 맑은 물에 물을 드시고 목욕을 하시고 그리고 강변에 망고나무 나래 자리를 깔고 누우셨어요.
지금도 이 강가에는 망고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를 불렀습니다.
“아난다여, 지금 대중의 여론이 어떤가?”
“예, 대중들이 춘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 춘다를 앞으로 오라고 그래라.”
그리고 대중들이 둘러앉은 자리에 춘다를 앞으로 오게 해서 앉혔습니다.
춘다는 완전히 죄인처럼 되어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우리가 타인에게 공양을 올릴 때, 많은 공덕을 짓게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이 제일 수승하다.
그런데 아난다여, 부처님께 올린 공양 가운데서도 최고로 수승한 공덕이 있는 공양이 2가지가 있느라.
첫째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마지막에 올린 공양이 누가 올린 공양입니까?
수자타의 공양이죠.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시면서 거의 몸이 쇠약해져서 나란자라 강가에 쓰러져있을 때, 우유를 짜고 가던 소녀 수자타가 그걸 보고 집에 가서 우유하고 쌀가루를 넣어서
요즘 말로하면 미음을 쑤어서 그래서 부처님께 드려서 부처님이 살아나신 거요.
그래서 우리는 수자타의 공양을 최고의 공덕이 있는 공양으로 칩니다.
그런데 아난다여,
또 한 가지 그와 같은 똑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드신 공양과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마지막 드신 공양,
이것이 최고로 수승한 공덕이 있는 공양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춘다의 공양이 갑자기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고로 수승한 공양이 되었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은 비록 독이든 음식을 드렸다 하더라도 그걸 드시고 부처님께서 돌아가셨다면 그게 마지막 공양이 되겠죠.
그럼 세상의 관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독살했다. 이렇게 아주 나쁘게 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열반에 들기 직전에 드신 공양이다. 이렇게 되니까, 완전히 똑같은 일인데 평가가 달라지죠.
최고로 수승한 공양,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 된 거요.
그래서 춘다는 잘못하면 기독교에서의 가롯유다처럼 그 종교 안에서 비난을 받아야할 사람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의 한 말씀으로 춘다는 우리 불교 안에서 최고의 공덕을 지은 공양을 올린 사람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춘다가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그 자리에 세운 기념탑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이때 부처님께서 춘다를 아끼고 사랑해서 자비심으로 그를 위로한 그 모습을 생각하며 이곳에서 우리도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저는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신통한 사람은 독이 있는 줄을 미리 알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어떤 신통한 사람은 음식을 먹고 독이 들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떤 신통한 사람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토해버렸다. 그래서 죽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 수백 명의 얘기가 있습니다.
소위 기적적인 얘기죠.
그런데 부처님처럼 그런 음식을 드시고, 그런 음식을 드신 사람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렇게 위로해서 그 사람만 위로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런 부정한 마음들도 다 풀어주셔서
오래도록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사람으로 이름이 남도록
이렇게 마음을 쓰신 분이 이 세상에 누가 있었던가.
제가 아는 지식과 상식으로는 저는 부처님 한분밖에 알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가 독을 마시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미리 알고 먹지 않았다든지, 이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당했어도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를 염려하는 이런 대자대비심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런데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대장장이 아들 춘다에 대한 비난을 이렇게 말하여 춘다를 변호하고 위로하여라.”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춘다의 그 괴로워하는 마음을 위로하시고, 대중들 속에 춘다에 대한 부정적인 그런 생각들을 다 지우셨다.
그리고 시로 이렇게 읊으셨습니다.
베푸는 사람에게 복은 증가하고
자재로운 사람은 원망하지 않으며
선한 사람 나쁜 과보 받지 않고
탐진치는 다하여 열반에 들리.
이렇게 공양의 공덕에 대해서 찬탄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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