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편은 한 8년 전에 돌아갔고 저는 워싱턴 DC 근처에 살고 있고요
결국은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을 듣고 얘가 자살을 했어요
얘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되는지
정해진 운명이 있는지
불교에서는 자살하는 게 죄가 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불교에서는 살인하는 거 하고, 자살하는 거 하고 동일하게 봅니다.
남의 목숨을 죽이든 자기 목숨을 죽이든 동일한 거예요.
남의 목숨을 죽인 사람은 처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가 처벌을 하고
자기 목숨을 죽인 사람은 처벌할 수가 없잖아요, 본인이 없으니까.
그래서 처벌하지 않거든요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남의 목숨을 죽인 사람은 처벌을 하니까 나쁜 줄 알고
자기 목숨을 끊은 사람은 죽이긴 죽였는데 제 목숨을 죽였으니까 처벌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안 나쁜 줄 아는데
똑같다.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이나 남의 목숨을 끊은 사람이나 동일하다, 첫째.
이렇게 보는 게 맞다 얘기에요.
두 번째는 남의 목숨을 끊는 거는 그 사람의 동의가 없이 했지 않습니까?
근데 내 목숨을 끊는 거는 내가 동의를 했지 않습니까, 내가.
내가 동의를 했기 때문에 그걸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가질 건지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
이런 얘기에요.
지금 미국에 있으니까, 워싱턴 DC 가까이 있으니까
지금 백악관 앞에서 의사당 앞에서 대모하고 난리죠.
왜냐하면 낙태권을 인정할 거냐 안 할 거냐,
낙태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 미국 대법원 판사가 보수파가 더 많아지면서 낙태권을 없애겠다 이렇게 하니까
지금 찬반, 난리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왜 문제가 되느냐?
아이가 아이 밴 엄마입장에서는
여성의 입장에서 내 몸을 내가 어떻게 하는 건 내 결정권이다 하는 권리의 주장이
낙태권을 있다고 주장하는 거고
그다음에 다른 쪽에서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이를 중심에 놓고 보는 거예요.
아이의 생명을 누군가 타인이 죽이니까
그러니까 자기 아이라도 자기가 죽일 권리는 없다.
이게 이제 양쪽 의견이 서로 다른 거예요.
옛날에는 우리가 자기 아이가 태어나도
엄마가 자기 아이를 죽으면 죄가 안 됐거든요, 우리 조선시대 같으면.
왜냐하면 자기 아이 자기가 죽이니까, 자기 아이 자기가 때려도 죄가 안 됐잖아요.
근데 지금은 자기 애라도 자기가 때리면 죄가 되잖아요.
왜냐하면 어린아이를 때릴 권리가 없다, 이거예요.
부모라도 때릴 권리가 없다.
이 양쪽이 지금 상충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의 현실적으로 이 두 권리
태아의 생명권과 산모의 자유권이 두 사이의 갈등으로
현재 대충 세계에서 어떤 나라는 아예 그냥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우선시하면 낙태가 허용이 되고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 하면 아예 낙태권이 불허가 되고.
그래서 요 사이에서 지금 중간에 나온게 뭐냐?
4개월, 그러니까 16주 또는 20주 또는 뭐 24주
요렇게 기준으로 해서
요 안에는 여성의 권리, 자기 육신의 결정권을 더 중심에 놓고
요 기간이 넘으면 태아의 생명권을 더 중심에 놓는다.
또 그 기준이 뭐 때문에 나왔느냐?
만약에 24주가 지나면 이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키운다면 살아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생명이다 라고 봐야 한다.
이런 여러 주장들 때문에
이게 우리나라도 지금 4개월인지 24주인지 제가 지금 잘 모르겠는데
이걸 기준으로 해서 그 전은 낙태를 허용하고
그 후에는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것도 다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거든요.
나이가 많아서 또 불치병에 걸려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느니
내 생명을 내가 존엄하게 마치겠다, 그래서 안락사 고난을 달라.
그래서 스위스 같은 데서 안락사 권한을 줍니다.
호주 같은 데서는 허용을 안 해요.
그러니까 옛날에 백몇 살 먹는 분이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했잖습니까.
이게 지금 아직 논쟁 중이에요, 사회적으로는.
생명의 자기 결정권을 어느 정도 허용을 할 거냐?
그럴 때 이제 해당이 되기 때문에
자녀 같으면 눈이 안 보인다 해서 실망했어.
실망해서 생명을 끊었다 하면 이거는 자살할 만한 권리 안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거는 실망을 해서 결정을 한 거기때문에
화가 나서 남을 죽이거나, 화가 나서 자기를 죽이거나
실망해서 남을 죄이거나, 실망해서 자기를 죽이거나
이런 거는 자기 결정권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니까 죄가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지금 현재 사회적으로는요.
그러나 어쨌든 자기 생명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너무 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으면 엄마가 많이 가슴 아프지만
자녀가 이렇게 못 보고 사는 것보다는
내 스스로 내 생명을 마감하겠다고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한 거니까
부모로서 가슴은 아프지만, 이거는 수용을 해주는게 좋겠다,
그래서 마음으로 어떻게 가져야 되냐하몀
“그래, 엄마는 너를 존중한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엄마는 너가 내린 결정을 나는 지지한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
“엄마는 너를 믿기 때문에
엄마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네가 때린 결정이라면
엄마는 늘 믿고 너를 지지하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어떻게 했나 싶습니다.
...
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엄마는 너를 믿기 때문에
엄마한테는 가슴 아프지만
네가 내린 결정은 엄마는 무조건 너를 지지한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라면 천국에 가서
또 힌두교 신자라면 내생에 넌 그런 병 없이 잘 살아라”
이렇게 떠나 보내주는 게 지금 자기가 할 일이다.
잡고 있을게 아니라 떠나 보내준다.
“네가 원해서 한 결정이니까 엄만 널 지지한다.
그러니 다음 생에는 그런 병 없이 잘 살아라.”
이렇게 보내주면 좋겠네.
...
그거는 믿음에 해당하니까
천국에 갔을까요? 이런 문제나
다음 생에 태어날까요? 이런 문제는 믿음에 대한 거거든요.
믿음에 대한 것은 본인이 믿는 대로 믿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즉문즉설은 사실을 다루는 법의 담마, 법이지
사실이 아닌 믿음에 해당하는 것은 각자 알아서 믿으세요.
이렇게 하지
즉문즉설은 위로해주고
아이고 그래그래 쓰다듬어 주는 그런 게 즉문즉설이 아니에요.
즉문즉설은 사실은 어떤가 하는 관점에서 대화를 하는 거거든요.
믿음에 대한 것은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오늘의 즉문즉설에서 아이에 대해서 아픈 마음이 있다면
아이의 결정을 내가 존중하고
“그래, 네가 내린 결정이니까 엄마는 지지한다” 이게 사실이에요.
엄마로서 자녀를 정말 믿는다면
“엄마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엄마는 이 결정을 존중한다.”
이것만 딱 해도 괴로움은 끝난다, 이런 얘기에요.
자기가 지금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끝이 안 나는 거지.
그래서 기독교 신자라면
“천국에 가서 잘 살아라”
또 힌두교 신자라면
“다음 생에 태어나서 인도 사람들이라면 잘 살아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고
종교로서의 불교는
“다음 생에 병 없이 태어나서 잘 살아라”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고요.
그러나 즉문즉설은 종교로서의 불교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 집착에서 벗어나느냐. 그거는
“아, 그래 엄마는 가슴 아프지만 네가 내린 결정이고
엄마는 너를 믿으니까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것만 딱 바로잡히면 더 이상이 문제에 집착할 바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
네네 지금 방글라데시 미얀마에서 난민들이 한 90만 명 넘어와 있습니다.
저희들이 한 5년 전에 이 가스스토브를 10만 개를 지원했는데
그때는 60만 명 넘어왔을 때 지원했는데
지금 100만 명 가까이 넘어와서 그때 지원한 게 낡기도 했고
새로 추가로 넘어온 사람들이 있어서
저희들이 지금 20만 개를 UN에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저희들이 정부에서 일부 지원하라고 요청을 하고
저희들이 지금 10만 개 계약을 해서 지금 주문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곧 지원을 하려고 하고요.
그들이 따뜻하니까 난방은 필요없는데
나무를 떼서 밥을 먹으니까 불날 위험이 있고
두 번째는 그 주위에 100만 명의 난민이 사니까
주위에 산에 나무가 없어 황폐화됐는데
가스로 밥을 해 먹으니까 산림이 전부 다 복구가 됐습니다.
가스는 유엔기구에서 지원을 하고
우리는 가스 스토브를 지원을 한다든지
또 민다나오에서 원주민들을 위해서는 무슬림들을 위해서 학교를 짓는 일을 한다든지
이런 일을 하고 있고요.
지금은 이제 우크라이나 난민 때문에 국경변을 답사하고 일부 지원을 했는데
우크라이나 난민은 현재 유럽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서
크게 뭐 우리까지 안 나서도 될 상황이다.
이렇게 평가가 되고요.
전쟁이 더 장기적으로 길어지면 지원을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에는 우리 고려인들이
옛날에 그게 소련 시절이니까 우리 고려인들이 살고 있어서
현재 한국에 한 800명 정도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들의 한국 정착을 또 전문 구호 단체들이 돕고 있는데
우리도 거기 일부 이불이라든지 생필품 일부를 현재 이불은 지원했고
나머지는 지금 지원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뭐 큰일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주위에 가장 어려운데 늘 이렇게 지원을 하고 있거나 준비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
자녀를 읽은 부모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럴 때 여러분들은
“아이고 그래 49재 지냈으니까 극락에 잘 가셨습니다”
이렇게 얘기해 주면
한마디만 되는 얘기를 스님 왜 그 말 안 하나 하는데
그게 종교적으로 저한테 와서 하면 그렇게 해주는데
이 즉문즉설은 그런 위로하는 자리도 아니고 종교적인 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믿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마는
스님이
“아이고 49재 지냈으니 극락이 잘 갔습니다.” 이러면
기독교인이 얘기를 들으면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여기서 가장 팩트는
엄마입장에서는 자녀의 죽음이 가슴 아프지만
그러나 자녀가 그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그럼 엄마는 자녀를 믿고 신뢰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든 엄마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래, 나는 가슴 아프지만 네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니까
그래 잘했다”
이렇게 떠나보낼 수 있는 건 이거는 진실에 속하는 거다.
그러면 진실을 깨닫게 되면 번뇌나 집착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 싶습니다.
온라인으로 되니까
많이 이렇게 편해진 이런 면도 있는데, 지역을 초월해서 편해진 면도 있는데
제일 피해자라 그럴까? 소외된 사람이 연세드신 분들이에요.
들어오고 나가기가 너무 어려워서 .
나중에 또 워싱턴 DC, 코로나 끝나면 한번 갈테니까 그때 만나서 얘기를 합시다.
그러겠습니다.
아들을 너무 생각하지 말고
아들이 만약에 살아 저기 저 천국에서나 어디서 본다 그러면
엄마가 이렇게 다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지
아들 걱정하고 이렇게 사는 것을 만약에 안다면
죽은 아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지나갔습니다.
이제 다 지나갔으니까 자기 삶에 좀 더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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