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한테 주어진 주제는
윤회와 해탈이라는 이런 주제를 줬습니다.
이 얘기를 하기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윤회와 해탈이라는 의미가
종교적으로 쓰일 때 하고
담마라고 하는 진리로 쓰일 때는
의미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게 종교라면
‘무엇이 진리인가’ 이 탐구해서 사실을 밝히는 것을
담마, 즉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 두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두려움은 언제 일어나는가?
예부터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번 우리 자신을 관찰해보면
아는 사람 만날 때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가 좀 불안하고
아는 곳에 갈 때보다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더 불안하고
밝을 때보다 어두울 때가 더 두렵고
잘 아는 일보다 모르는 일을 할 때가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를 때 일어나는 거다.
즉 사람 때문이라는 것도 아니고
장소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둠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를 때 우리 마음은 불안하고 두려움이 생긴다.
+++죽음은 왜 두려운가?
모른다모른다 해도 제일 모르는 게 뭘까요?
죽은 뒷 얘기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것도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많은 좋은 생각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중에 제일 먼저 나온 게 뭐냐?
안 죽고 영원히 산다.
근데 그건 도저히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안 죽고 영원히 사는
영생을 추구하는 그런 흐름이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이제 두 번째 나온 게 뭐냐?
죽기는 죽는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
그러니까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좀 많이 줄어들죠.
우리가 헤어질 때 아쉽지만
가는 사람도 더 좋은데 가면 덜 아쉽고
보내는 사람도 좋은데 가면 덜 아쉽죠.
그래서 죽은 뒤에 저세상 좋은 세상에 간다.
이래서 나온 게 천당이나 지옥이나 이런 거죠.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믿는 사람은 덜 불안한 거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큰 거고.
그래서 이 내생의 얘기는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근데 이거보다 더 좋은 생각을 낸 것이
인도 사람들이에요.
죽어서 아무리 좋은 데 가도
멀리 가버리니까 못 만나잖아요.
근데 윤회는 사람들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까 헤어지지마는 금방 나를 만난다 이런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좋은 데 가지마는 먼데 가는 거보다 더 좋은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인도 사람이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게 우리보다 적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제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까
죽은 시신을 오래 두면 다시 태어나는 데 지장이 있잖아요.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 불태워 버려야 돼요.
그래야 집착이 끊어지니까
그래서 장례도 오늘 죽으면 오늘 당일날 치른다.
그래서 인도에는 관 같은 게 없습니다.
바로 가서 태워버리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 다시 태어난다, 이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적으로 보면
이거는 이 인도의 원주민이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런데 인도를 침입해서 현재 인도의 주류 문화가 된 아리안족.
이 아리안들도 이 윤회를 받아들여서 이게 인도의 전통 사상, 신앙이 된 거죠.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났으니까 어때요?
이것을 받아들여서 여러분들은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고 안 믿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
이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불교의 독특함이 되는데
그럼 인도에 가면 이거는 힌두교 사상과 같잖습니까?
그래서 불교의 아이덴티가 되지 못한다 이런 얘기에요.
부처님에 의해서 나온 얘기가 아니고
인도의 전례로부터 있었던 전통 신앙이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관점
그러면 불교도 이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그럼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거는 이런 윤회에 대한 신앙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셨다.
두려움이 왜 생기느냐?
죽음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고 무지 때문에 생겼다.
그러니까 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두려울까?
왜 낯선 곳에 가면 두려울까?
이 두려움에 대한 탐구를 하는 거예요.
왜 사람은 죽으면 두려울까?
이렇게 결국은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하고 탐구해 보니까
결국은 무지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무지 때문에.
이 무지, 이 무명이 타파돼 버리면 두려울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말했죠.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무명은 타파되었다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
이렇게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져 버리니까
‘죽은 뒤에 어떻게 되냐’는 관심 대상이 아니에요.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담마와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가르침에는
무명을 타파해서 해탈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고
불교라고 하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서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기독교로 말하면 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진리에 대한 원리하고는 약간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스님들이 선방에서 하는 화두 타파하는 얘기 하고
우리가 신앙하는 거 하고
약간의 모순과 함께 또는 차이점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윤회를 한다 안 한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돼요, 담마는.
‘윤회를 하고 안 하고가 이 주관심사에서 벗어나 버렸다.’
이렇게 보는 게 맞다.
두려움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비유를 들어서 말해 보면
우리가 바깥에 가서 하늘을 쳐다보면 해가 뜨고 해가 진다.
그것을 조금 더 유추하면
“아,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
이게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뜬다는 건 시작이 있고 진다는 거는 뭐예요?
내리죠. 끝이다 이 말이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근데 이제 돈다라고만 해도 어때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걸 더 깊이 탐구해 보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으로는 여러 가지 현실 관측을 해보면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관찰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측량을 하고 이래보면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옛날부터 뭐가 안 맞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제 연구 연구를 거듭해 보니까
이거는 태양의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돎으로 해서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래서 이제 지구 뭐가 나온다?
자전설이나 지구가 돈다.
근데 중세에서는 혹세무민한다 해서 탄압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죽을까 싶어서 아니라고 해놓고 혼자 중얼거렸다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돈다” 이런 얘기가 있잖아.
그러다가 더 탐구를 해보니까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오히려 돌고 있다.
태양이 우리 눈에 도는 것처럼 보이는 거는
지구가 자전을 하니까
여기 태양이 있는데 이렇게 도는데 우리가 여기 붙어 있으니까
이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니까 뭐다?
감각적으로는 뭐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든지, 태양이 지구를 돈다든지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다.
근데 이 진실을 알아버리면 어떠냐?
지구가 자전하고 있고, 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공전하고 있다.
이걸 알아버리면 태양은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한문으로 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게 뭐예요? 무시무종이다.
진실은 무시무종이에요.
그러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시작이 됐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나온다?
창조론이 나온다.
“이래서 시작이 됐다.”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근데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서 당연히 뭐가 나온다?
종말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그 근저에는 시작이 곧 끝이 있다고 인식을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질문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시작도 끝도 없다면
“왜 시작이 됐나?” 이런 질문이 필요가 없으니까
창조론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고
종말론이라는 것도 나올 수가 없다.
이게 본질을 꿰뚫어 보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 할 때는
여러 이런 내생 얘기, 전생 얘기, 천당 얘기, 극락 얘기가 나오는데
두려움이 없어져 버리면 어떠냐?
그런 거를 얘기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윤회하지 않는다든지 천국이 없다든지 내생이 없다든지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일으킬 뿌리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서 진실을 발견하는 거다.
그러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
아침마다 나가서 뜨고 진다고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지구가 스스로 돌아서 이런 일이 생긴다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느낄 수 없는 거예요, 이걸.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과학을 배웠다 하더라도
관측을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일상 속에서는 우리는 그냥
‘아침에 해가 뜬다, 저녁에 진다’ 이런 용어를 쓰지 않습니까?
용어를 쓴다고 해서 진짜 뜬다고 믿거나 진다고 믿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처럼 이미 깨달음을 얻어서 두려움이 없어져 버린 사람이라고 해서
일상적인 용어를, 전통적인 문화에서 내려오는 용어를
안 쓰는 거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용어를 쓴다고 그럼 그것이 진실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이건 하나의 문화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 불자들에게 많은
믿음의 문제 또는 문화의 문제를 가지고
진리의 문제, 담마 문제하고 자꾸 뒤섞어서 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본질을 꿰뚫어 말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물을 게 없어진다.
+++윤회에 대한 전통적 관점 vs 불교적 관점/ 윤회에 대한 믿음과 철학의 관계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윤회는
이렇게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든지 또 새로 태어나든지 해야 된다.
그러려면 뭔가 자아라고 하는 알맹이가 있어야 되잖아요.
자아라고 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그것이 지옥도 가고, 전당도 가고, 사람도 되고, 소도 되고, 개도 되고 할 거 아니에요.
근데 불교의 근본 교설은 무아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철학에는 이런 모순 관계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자꾸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무아나 무상은 공은
아까처럼 탐구를 통한 진실을 발견한 분상이고
우리의 믿음은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분상이다.
이건 서로 다른 거다.
그러니까 믿음의 분상에서는
내생이 있느냐 없느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어느 게 맞냐 한다면
이건 관점을 잘못 잡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다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이냐 아니냐고 논하는 것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된 거예요.
그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믿음은 개인마다 다 다르다.
그러고 그것은 간섭할 수가 없다.
이렇게 돼 있다.
그러니까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법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 두 사람이 믿음이 다르구나’
이렇게 접근하면 된다.
근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자꾸 단맛으로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을 하니까
끝도 없이 이건 결론이 날 수가 없는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는 믿음의 문제고
믿음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다.
헌법에도 보장이 돼 있어요.
“믿음이나 신념 사상 이념 이거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고 서로 우열을 논하거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 붓다는 이 용어를 썼지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전통적인 인도에서 사용됐던 윤회라는 개념과는 좀 다르게
용어는 같이 쓰는데 개념이 좀 다르다.
+++부처님이 말하는 윤회와 해탈은 무엇일까?
그러면 어떨 때 윤회라는 용어를 썼느냐?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탐구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가 첫째잖아요.
두 번째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거나 저절로 생기는 어떤 것도 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
또 여기서 내가 어떤 원인을 짓게 되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은 없다.
그 결과가 미래에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천한통’ 이러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의 힘이다’ 이러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삼명 가운데 하나거든요.
세 가지 밝음 가운데 하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런 말 이런 행동을 하면 우리가 이런 짓을 하면
이것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어떤 결과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천안통입니다.
천안명이에요.
우리 지금 그 능력이 없잖아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까
이 나쁜 행위가 가능해지는 거예요.
이게 어떤 결과가 날 거라고 미리 다 알면
누가 이렇게 하겠어.
그럼 숙명통이다. 숙명지다 이러면
‘과거의 전생을 다 안다’ 이렇게 보통 해석하잖아요.
그건 인도식 해석이에요.
불교에서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딱 보면
이건 무슨 원인에 의해서 이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이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아는 게 뭐라고?
숙명지고
원인을 딱 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 뭐라고?
천안지다.
이거 굉장하죠?
지금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현재 완전히 깨어 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
그게 누진지에요.
그래서 수행을 해서 삼명을 증득해야 된다 ,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원인의 원인을 계속 규명을 했다, 6년 고행을 하시면서.
그때 붓다가 발견한 것은
이 괴로움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욕망인데
우리는 그 욕망을 충족하면
즉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잖아요, 관찰해 보세요.
“야, 됐다” 이렇게 기분이 좋다.
그 기분이 좋은 걸 우리 뭐로 삼느냐?
행복으로 삼는다.
행복하냐? 안 하냐?의 차이는
지금 기분이 좋냐? 안 좋냐?, 이 문제에요.
그래서 사람은 다 자기 원하는 거를 이루려고 하는데
이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롭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울 거 아니에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고
기분이 나쁜 것이 불행이다.
그런데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또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는 거예요.
100만 원만 하다가 100만 원 되면 기분이 좋았는데
“아니, 이거 갖고 안 돼, 천만원.”
천만원 하다 억, 이렇게 올라간다.
그러니까 붓다가 젊은 태자 시절에는
그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까 행복하다고 볼 수 있죠.
근데 그걸 계속 가봐도 이게 끝이 안 나잖아요.
우린 지금 거기 도달을 못 해서 괴롭고
붓다는 그것을 어느 정도 남이 볼 때는 이루었다고 하는 위치에 가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한 거예요.
그래서 “욕망을 따르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니구나.
완전한 행복의 길이 아니구나.”
그래서 한 수행자를 만나서 출가사문의 얘기를 듣고
“아 욕망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씨를 말려야 된다”
그게 오히려 다가 온 거예요.
그것이 고행주의에요.
욕망을 억압하고 억제하는 것.
근데 붓다는 정말 어떤 사람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까지
욕망을 억제한 거예요.
잠도 안 자고, 먹는 것도 거의 안 먹고, 씻고 안 씻고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이르러도 해탈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돌아본 거예요.
이게 고행을 덜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끝까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데까지 해봐도 안 됐던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점검했다.
+++고통과 쾌락, 욕망에 대한 정의
출가 전에는 욕망을 따라갔고
출가 후에는 욕망을 억제했는데
여기서 발견된 게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 욕망의 노예가 아니고
욕망을 억압하는 것도 욕망의 노예라는 거예요.
즉 욕망의 반응한 거라는 거예요.
그 반응을 따라가느냐 거부하느냐의 차이밖에 없지
욕망의 반응이에요.
제가 여러분들의 손을 잡고 땡기면
따라가거나 안 가겠다고 거절 하거나 하는 건
다 잡아당기는 것에 대한 뭐다?
작용에 따르는 반작용이라는 거에요.
“아 그래서 문제가 있었구나”
욕망을 따라가서 얻는 기쁨을 쾌락이라고 그러고
욕망을 억제해서 얻는 기쁨, 이 수행을 고행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자는 고행도 버리고 쾌락도 버려라” 하는 거는
우리가 말하는 ‘수행할 때 고행하지 마라’ 이 얘기가 아니라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고 하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욕구가 일어나는 걸 부정하지 말고
욕구가 일어날 때 ‘욕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 뿐이지
거기에 그러니까 먹어야지도 하지 말고
그러니까 안 먹어야지도 하지 마라.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그러니까 피워야지도 하지 말고
그러니까 안 피워야지도 하지마라.
‘피워야지’ 하면 과보를 받고
‘안 피워야지’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냥 “욕망이 일어나구나, 성질이 나구나”
이게 이제 알아차림이라는 거예요.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발견
이것을 중도라 그래요.
이것을 통해서 붓다는 해탈을 증득했다.
그러면 여기서 윤회는 어떨 때 쓰느냐?
자기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은 것을 행위라 그러면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은 안 이루어질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생긴다?
불행이 생긴다.
자기가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았다면
안 이루어질 때 기분 나쁨이 필연적으로 생기니까
행과 불행이 뭐 된다?
되풀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반드시 돈을 잃을 때는 뭐가 온다?
불행해 온다.
누굴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질 때는 괴롭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락, 행위 락인데
락과 고가 되풀이 되는 것을 뭐라고 한다?
윤회라고 한다.
우리의 중생의 삶은 고와 락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근데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데
우리는 그 고락을 분리시켜 가지고
고는 버리고 락만 얻겠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거에요.
이것에 대한 비유로
마왕의 세 딸이 유혹을 했을 때,
그 즐거움 아닙니까?
즐거움으로 갈 때 부처님은 그걸 뭐라고 봤다?
락의 본질이 뭐라고 봤다?
고라고 봤기 때문에 유혹에 가지 않은 거죠.
그래서 딱 손가락질로 견주니까 노파로 변해버렸다
이 말은 뭐요?
젊은이라는 락이 곧 늙음이라는 뭐가 된다?
고다. 하나다.
또“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라는 것은
바깥에서 볼 때 아름다움의 내부의 본질은 뭐다?
더러움이다. 이 얘기죠.
또 공덕천 흑암천 얘기도 그래요.
아름다운 여인이 와서 들어오라고 하니까
흑암천이라는 자매가 따라와서
“넌 나가라” 하니까
우리는 자매라서 헤어질 수가 없다.
어리석은 자는 둘 다 받아들이고 지혜로운 자란 둘 다 내쫓는다.
이 수많은 경전의 가르침은 다 이게 윤회라는 거예요.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게 윤회라는 거예요.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우리는 지금 윤회의 삶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데
락만 즐기니까 고가 필연적으로 따라오죠.
그러니까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본질은 뭐다?
고다.
이거를 꿰뚫어야
우리가 사성제의 첫 번째 뭐다?
‘일체는 고다’ 하는 것을 증득하는 거에요.
고와 락 중에 고를 아는 게 아니라
낙이 곧 고임을 알아야 뭐라고 한다?
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념처관에서도 관수시고 그러잖아.
우리의 느낌, 즐겁다 하는 이 느낌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곧 뭐다?
고다
이렇게 돼 있죠.
우리는 이게 고인 줄 모르기 때문에
지금 그 락에 매달려서 거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뿌리가 뭐냐?
욕망이다.
그 욕망의 끌려가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욕망을 욕망으로 다만 알아차린다.
그게 바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뭐도 발생하지 않는다?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은
고가 발생하지 않은데 그러면 락도 발생하지 않아야지.
고락이 다 어디서부터 일어나니까?
욕망으로부터 일어나니까.
그러면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려면
동시에 뭐도 같이 사라진다?
락도 같이 사라지니까
여러분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즐겁고 보자
이래서 여러분들은 해탈이 안되는 거예요.
+++고락이 사라지면 생기는 일들
그래서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어떠냐?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도 같이 사라지니 뭐다?
적정, 고요적정이라고 그래요.
이 고요적정이 열반이에요.
그러면 락은 들뜨죠.
고독 가라앉잖아요.
그러니까 이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을
우리 식으로 말하면 번역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면
행복이라고 밖에 번역할 수 없는데
이 행복이 즐거움을 행복이라 하는 이 세속적인 행복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이걸 행복이라고 번역하면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속으로 이해가 되고
이걸 그냥 열반이라고 인도말로 그냥 써놓으면
뭔지를 모르고
여기에 모순이 있다.
그래서 이 윤회에서 벗어났다 하는
이 고리에서 벗어났다는 용어로 쓸 때는 뭐라고 쓴다?
해탈이라고 써요.
해탈을 세속적인 용어의 가장 근접하는 게 뭐다?
자유예요.
근데 자유라고 쓰면 어떤 문제가 있냐?
내 맘대로 하는 게 뭐다?
자유라고 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하는
이 자유와 또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다.
그러니까 불교의 이상은
굳이 요걸 구분하려면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참자유는 내 맘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자
그래서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
그래서 부처님이 받게 100만의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 ‘고가 소멸됐다’
‘고가 완전히 소멸돼 버렸다’ 하는 관점에서는 이걸 뭐란다?
‘열반’이라는 용어를 써요.
같은 말이에요.
우리말로는 해탈이다 열반이다 쓰지만
인도말로 번역할 때는 해탈이란 말이 따로 없이
그냥 다 뭐다?
니르바나, 니빠나 이렇게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의 경지라는 것
자유로움에 이르는 것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근데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좋게 태어나는 것, 복 받는 것, 극락 가는 것이 이상이죠.
그건 종교적인 이상이고
수행적 이상은
해탈과 열반, 참자유와 참 행복에 이르는 거다.
이 수행적 관점에서는
돈이 많으냐 적으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얼굴이 검으냐 있냐 희냐, 오래 사냐 빨리 죽냐
이런 건 아무 비교대상이 안 됩니다.
다음 생이 있느냐 없느냐, 극락 가느냐 안 가느냐
이런 거 자체는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의 차별을 부정했고, 성차별을 부정하시고 .
지금도 인도에서 안 되고 있는데
2600년 전에 그런 가르침을 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죠.
오늘 우리들은 그걸 이해하죠.
그러나 결국은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결국은 이러한 계급 차별 성차별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오히려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뀌죠.
그래서 붓다는 이런 운명론을
그것이 신에 의해서 좌우된다거나, 전생에 의해서 좌우된다거나, 사주팔자에서 좌우된다는 것을 부정하신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 신앙으로는 그것을 믿고 있잖아요.
그래서 담마와 신앙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 앞으로 미래 문명에는 어떨까?
지금 이러한 신앙은 점점 불교만이 아니고
그게 기독교는 무슨 종교든 점점점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근데 이 담마는
정말 인간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옛날에 배고플 때는 밥을 주는 것
헐벗었을 때는 옷을 주는 것
가난할 때는 복을 주는 것이 우리의 요구에 본질이었지만
지금은 먹고 입고 자는 게 다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잘 살아도
옛날 사람이 볼 때는 천국과 다름없는 이런 시대에 왔는데도
우리의 고뇌는 사라지기는 커녕 줄어지지도 않잖아요.
이것의 해결책은
부다담마,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다.
이 부다담마라는 말은 불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부다담마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이 전 인류에게 다 적용이 된다.
이것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인간의 빈곤 퇴치를 해결하는데도
인간의 차별을 해결하는데도, 인권을 옹호하는데도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데도
이 담마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우리 불교인들이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비중을 어디로 더 넓혀라?
부처님이 가르침인 담아, 진리를 탐구하는
그래서 나의 고뇌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고뇌 없이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제가 하는 말이
자기가 믿는 종교적인 믿음과 조금 다르다고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시고
믿음은 자유이기 때문에
저는 믿음을 터치하려는 게 아니라
진실이 어떠냐 하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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