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반야심경 강의 5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저희들은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관세음보살님께서 어떤 수행을 하셨는가? 그 수행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행하신 수행은 반야바라밀다 수행입니다. 관세음보살님만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시는 게 아니고, 모든 보살님들이 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십니다. 보살님들만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셔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다.
여기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셨다. 그것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행/이라는 것은 수행을 하셨다. 이런 얘기에요. 행하셨다. 실천하셨다. 수행하셨다. 여기서 /심/이라는 것은 매우 깊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셨다. 여기서 핵심은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이 경 제목에 반야바라밀다가 나왔죠? 그래서 그때 간단하게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자세히 다시 말씀을 드릴 겁니다.
/반야/ 빨리어로는 빤야라 그럽니다. 빤야. 산스크리트어로는 브라즈나, 또는 쁘라즈나, 이렇게 부릅니다. 번역하면 지혜, 깨달음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도 다 지혜가 있지요? 우리가 말하는 중생의 지혜는 빤야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지혜, 완전한 깨달음. 이것을 빤야, 반야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번역을 하지 않고 반야라고 그냥 쓰는 이유는, 우리가 지혜라고 번역해 버리면 지혜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다.
중생의 지혜, 성인의 지혜 정도도 반야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 반야라고 할 때는 적어도 불보살의 지혜,
일체 제법의 참모습을 다 훤~히 알 수 있는 그런 지혜를 반야라고 부른다.
반야바라밀다죠. 이 /바라밀다/라는 말은 원래 말은 빠라밋따입니다. 빠라라는 것은 저 언덕이라는 뜻이고, 밋따라는 것은 건너가다. 그러니까 빠라밋따라는 것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이런 뜻이에요.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도피안입니다. 저 언덕이 피안이죠? 도는 건너간다.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도피안.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여기서 이 언덕은 뭘 상징하느냐? 차안, 이 언덕은 괴로움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저 언덕 피안이죠. 피안은 뭘 상징하느냐? 괴로움이 없는 세계, 열반을 상징합니다.
이 언덕은 윤회의 세계, 속박 받는 세계라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저 언덕은 해탈의 세계입니다. 이 언덕이 사바세계라면 저 언덕은 극락세계다. 이 언덕이 중생의 세계라면 저 언덕은 부처의 세계다. 이 언덕이 깜깜한 무명이라면 저 언덕은 아주 밝은 광명이다. 이 언덕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라면 저 언덕은 우리의 이상,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의 세계다. 이 언덕이 중생의 세계라면 저 언덕은 부처의 세계다.
그러니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이 말 자체는 그냥 강을 건너간다. 바다를 건너간다는 뜻이 아니라, 중생이 부처가 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 사바에서 벗어나 극락에 이른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말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즉, 부처가 된다. 이런 의미다.
그러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 문제요. 여러분들이 지금 인생을 살면서 괴로움이 있지 않습니까? 그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첫째 머니머니 해도 머니가 제일이다. 돈이 있으면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다 돈 모으려고 그러죠? 돈 있는 사람은 또 뭘 가지려고 그래요? 권력을 가지려고 그래요. 출세하면 된다. 또 돈도 있고 권력도 있다 하더라도 안 돼요. 이 세상에는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은데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거가지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어야 돼. 명예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다 갖추어져있다 하더라도 몸이 안 좋으면 건강이 안 좋으면 소용이 없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건강하고 거기다가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럼 이러면 다 되느냐? 아니에요. 이것이 또 자손만대로 계속 계승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다 돈 벌려고 그러고, 출세하려고 그러고, 명예를 얻으려고 그러고, 건강에 좋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고, 자식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정말 괴로움의 이 모든 바다를 건널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요.
만약 이런 것으로 건널 수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필요가 없죠. 부처님이 다 가지셨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으로 해탈을 할 수가 없다.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신 거란 말이오.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떤 길일까? 이것을 찾으신 거예요. 그래서 마침내 그 길을 찾았다. 이거야. 그래서 그것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불하셨다. 부처를 이루셨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때 어떻게 해서 이루었어요? /깨달음을 얻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즉, /반야를 증득하셔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꼭 대승불교만 반야를 중요시 하는 게 아니라, 모든 불교가 다 그렇습니다. 깨달아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럼 깨닫는데 왜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요. 여러분들이 밤에 자는데, 꿈을 꾸었어요. 그 꿈속에서 강도를 만났단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도망을 다녀요.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이 강도가 늘 뒤쫓아 온단 말이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누구 좀 나를 살려줄 사람, 숨겨줄 사람을 찾지 않습니까? 그때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하나님을 부르든 누구를 불렀다. 그럴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도 간절하게 불렀더니 누가 여러분들을 도와줬어요.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죠. 이러면 가피를 입었다. 은혜를 입었다. 이렇게 되는 거요.
그렇게 숨겨줬지만 또 다시 길을 가다 또 강도를 만날 수가 있겠죠. 이것은 해결이 되지만, 다시 또 재발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렇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는 강도가 쫓아오고 앞에는 큰 호랑이 나타났어. 그러니까 도망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해. 옆으로 가려니까 사자가 있다. 하늘로 날으려니까 공중에는 독수리가 있다. 땅을 보니까 뱀이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사면초가다. 이럴 때 우리가 해결하는 늘 방법은 내가 힘이 있어서 호랑이를 없애고 사자를 없애고 강도를 이기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런 것들을 물리치고 나를 구제해주든지, 이런 생각을 하죠.
그런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서 절대 절명의 순간에 처했는데, 눈을 번쩍 뜨니까 꿈이야. 그럼 벗어났어요? 안 벗어났어요? 벗어났죠. 어떻게 벗어났느냐? 눈을 뜨고 벗어났다. 깨달아서 벗어났다. 깨어나서 벗어난 거요. 그러면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줘서 안심하는 거는 사실은 아직도 꿈속의 얘기에요. 또 거기서는 강도도 있고, 나를 보살펴주는 하나님도 있고, 그래서 하나는 원수고 하나는 치안이요. 그런데 눈을 번쩍 뜨니까, 본래 강도도 없었고, 나를 도와준 하나님도 없고, 미워할 이도 없고, 친한 이도 없다.
이렇게 고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러분들이 제일 의지하는 게 누구입니까? 아내에게는 남편, 남편에게는 아내죠.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 부모에게는 자식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의지하던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식이 죽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죠. 거기다가 사업도 망했다. 그래서 며칠 몸져 누워 있다가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고 진단이 났다. 이런 것을 뭐라고 그래요? 엎친 데 덮친 격이죠.
/이럴 때도 여러분들이 눈을 번쩍 뜨면 마치 꿈에서 깨는 것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냥 그대로 두고. 이것이 깨달음이에요./ 이렇게 벗어나는 것을 뭐라고 그러냐? 반야바라밀다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그렇지 않으면 출세를 해서, 그렇지 않으면 명예를 얻어서, 그렇지 않으면 건강하고 오래 살아서.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잘 되어서. 이렇게 벗어나는 것. 이것은 완전한 벗어남의 길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져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것도 완전한 벗어남이 아니에요.
원하는 것이 다 내가 바라는 것 다 이루어진다. 이게 /타화자재천/이에요. 이것은 내가 천상에 나고 싶다. 하는 방식이 이런 거요. 그러나 모든 이런 복은 지은 인연의 과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복이 많다 해도 복이 다 하면 다시 이 세상에 떨어집니다. 이것을 /복진타락/ 이렇게 말해요. 복이 다 하면 다시 이곳으로 떨어진다. 비록 천상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복이 다하면 이곳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윤회의 수례바퀴 안에 있는 세계에요. 이것은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러면 완전하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뭐냐?
그게 바라밀다인데,
이 바라밀다를 이루려면 바로 반야,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즉, 깨달음을 얻으셔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부처님 당시에 제일 큰 나라가 마가다국이에요. 요즘 말하면 미국 같은 나라에요. 그 나라의 수도가 라자그라.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그라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번역하면 왕사, 왕들의 집이에요. 왕사성이에요. 들어보셨죠? 왕사성.
그 왕사성에서 왕중의 왕, 그 분이 빔비사라왕이에요. 이 빔비사라왕은 그 당시 세계에서, 인도라고 하는 그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의 왕이에요. 역사가 오래된 나라의 왕이에요. 그러니까 세력이 제일 커. 군대도 제일 많아. 제일 좋은 마차도 있어. 그리고 제일 큰 집에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제일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고, 제일 좋은 음식을 먹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아름다운 여인 수십 명을 부인으로 두고 있고, 거기에 수십 명의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 있고, 세상이 볼 때는 부러울 거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 반대편에 누가 있느냐? 우리의 스승 부처님이 계신단 말이오. 부처님은 어떠세요? 가족을 다 버리고 홀로 계세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 다니시고, 아침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어서 드시고, 나무 밑이나 동굴 아래서 잠을 자고, 호위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그 궁성 밖, 그 궁성 밖에 그리드라쿠타 즉, 영축산 그 돌무더기 위해서 홀로 명상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빔비사라왕한테 뭐 부탁하러 가야 되잖아요. 빔비사라왕이 또 누구입니까? 부처님의 제자 아닙니까? 신자란 말이에요. 그럼 부처님이 가서 맛있는 음식도 얻어 드시고, 집도 많은데 한 채 얻고, 그죠? 마차도 많은데 한 대 얻고, 옷도 많은데 한 벌 얻고, 신발도 많은데 하나 얻어 신고, 필요하면 궁중에 가서 “이거 하나 주시오. 저거 하나 주시오.” 그렇게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왕이 늘 힘들고 괴롭고 답답해서 부처님께 도움을 청하러 옵니다.
그런데 왕이 “부처님, 제가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왕궁에 좀 오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부처님께서 왕궁에 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 좋은 음식도 대접하면서 상담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왕궁에 안 오세요. 그 산에 계세요. 부처님께 의논을 해야 되고, 부처님은 안 오시고, 그럼 누가 가야 됩니까? 답답한 사람이 우물판다고 왕이 우물파야 되겠죠. 아무리 지체가 높은 왕이라도 인생이 괴로우니까 자기가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그 산 밑에 이르러서는, 산에 마차는 못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걸어서 올라가는 거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인도에 가면 빔비사라왕의 길이 있습니다. 왕이 다니니까 신하들이 길을 닦겠어요? 안 닦겠어요? 닦아 놓겠죠. 그래서 일정한 거리에 가면 그 다음에 부처님한테 인생 상담 하는 데 옆에 신하가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우리의 위대한 대왕이 인생이 괴로워서 상담을 한다. 체면상 안 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신하들은 여기 있으라 그러고, 자기 혼자 올라가서 부처님한테 상담을 했다. 그래서 거기 보면 왕이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왔다. 여기서는 걸어갔다. 여기서는 다시 혼자서 부처님께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상담을 했다.
부인이 많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많은 부인을 갖고 있는 왕은 부인 때문에 좀 머리가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아프겠지. 거기서 아들딸이 많으면 좋을 거 같은데 왕자들이 형제간에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싸우지. 골치 아픈 거요. 음식을 먹을 때, 전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은 다 왕에게로 보내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혹시 독을 탔을지 모르기 때문에, 먹기 전에 반드시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이 와서 먼저 먹어서 죽나? 안 죽나? 봐야 됩니다. 안 죽으면 은수저 넣어보고 그렇게 먹습니다. 맛있겠어요? 맛있겠죠.
그 성벽을 몇 겹을 쌓고 궁궐을 짓고, 거기에 입구 입구마다 첩첩이 무장한 군사들이 서 있지 않습니까? 부부관계를 하는데도 총 들고 칼 들고 옆에서 지켜봐야 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 참 재미있겠죠. 그런데 이렇게 많이 가지고도 인생이 괴롭다. 이거야.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서 자기 나름대로 하소연을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부처님이 왕한테 얻으러 간 게 아니라, 왕이 답답해서 온갖 거 다 가진 왕이 인생이 답답해서 부처님께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왕을 위해서 좋은 법문을 해주시고, 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하고 마음의 위안을 듣고 내려왔단 말이오.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 가지고도 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줬는데, 왕은 온갖 것을 다 가지고도 괴로워서 남한테 도움을 청해야 되요. 이렇게 많이 가지고도 어디 예쁜 여자가 있다하면 또 뺏어야 되요? 안 뺏어야 되요? 뺏어야지. 이렇게 많이 놔 놓고도 맛있는 특산물이 생겼다하면 또 왕궁으로 가져오잖아요. 말이 그렇게 많은데도 좋은 말이 있다면 또 가져 오잖아요. 이 세상에서 아직도 계속 뺏어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인생이 뭔가?
왜 빔비사라왕이 행복하지 못할까?
우리가 여기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이런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건강, 자식, 이런 것으로
해탈과 열반의 길이 담보된 것이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부처님의 힘을 빌어서, 그것을 얻으려고 그러잖아요. 이미 이것은 부처님이 이것으로는 해탈의 길이 아니다. 하고 이미 버린 거지 않습니까? 이 말은 재물 필요 없다. 이런 얘기 아니에요. 권력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이런 게 아니라, 그것으로는 완전한 해탈에 이룰 수가 없다.
완전한 해탈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신 거예요.
오늘 우리 불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되요. 안 그러면 불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져야 된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타화자재천입니다. 그 자재천의 우두머리, 자재천왕이 누굽니까? 마왕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것을 원하신다면 우리는 불자가 아니고 마왕의 자손, 마왕의 제자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해탈의 길이 아니다. 이런 얘기에요. 이것은 해탈의 길은 아니다. 이게 분명해야 됩니다.
자, 이 바라밀다라는 뜻은
인도에서, 이 바라밀다라는 것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괴로움의 바다를 건넌다. 이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넘긴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고개를 넘느냐?
어떻게 해야 저 언덕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깨달아야 된다.
밝은 지혜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자, 그러면 이 바라밀다에는
이 강을 건너는 저 언덕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반야바라밀다 하나 밖에 없느냐?
이것이 유일한 길이냐?
대승불교에서는 아니다. 6가지가 있다.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육바라밀이다.
아니다 10가지가 있다. 이게 뭐요? 십바라밀.
우리가 보통 많이 알려진 게 몇 바라밀이죠? 육바라밀이에요. 6가지 바라밀다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뭐요? 반야바라밀다에요. 이
반야바라밀다는 6개의 바라밀다 중에
하나이면서 동시에 6가지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여기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곧 육바라밀을 말한다. 이렇게 이해해도 좋다.
/보시바라밀/
그러면 그 6가지가 뭐에요? 첫째가 제일 쉬운 거부터 앞에 나옵니다. 아시겠습니까? 반야바라밀다가 제일 끝에 나와요.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이에요.
베풀어야 이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널 수가 있다.
이게 보시바라밀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괴로운 것은
못 베풀어서 지금 괴로운 거요?
못 얻어서 괴로운 거요?
못 얻어서 괴로워요.
그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얻어야 돼. 더 많이 얻어야 돼. 그래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니까, 그러면 빌어서 많이 얻어라. 이래야 답이 된단 말이오. 그런데 괴롭다고 하니까 베풀어라.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괴로워 죽겠습니까?” 그러니까 “너 얼마 가지고 있니?” “없는데요.” “하나도 없어?” “갈 차비밖에 없습니다.” “그럼 남에게 베풀어라.” “저는 어떻게 가요?” “걸어가거라.”
베풀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이게 우리가 얼른 들으면 얘기가 안 되잖아요. 현실성이 없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반야바라밀다가 중요하냐? 그냥 베푼다고 보시바라밀이 아니에요.
어떻게 베푸냐?
베푸는 것에 대한 아주 밝은 지혜와 베푸는 것이 결합이 되어야
베풀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하는 보시바라밀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밝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반야죠. 그러니까 이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반야와 결합이 된 보시라야 되요. 그러기 때문에 보시는 크게는 반야바라밀에 속한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범부중생/
자, 그러면 이 세상에 사는 중생, 어리석은 중생, 범부중생, 이렇게 말하죠. 범부 중생은 어때야 행복하다? 얻어야 행복합니다. 왜 괴로운데? 얻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그래서 불보살의 영을 부르며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얻어지면 좋다고 난리에요. 가피를 입었다고 난리다. 그런데 제 뜻대로 안 얻어지면 어때요? “부처 믿어도 소용없네.”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 믿어도 소용없다. “기도해봐야 소용없데. 영험 있다하더니 다 거짓말이데.” 이렇게.
그러니까 제 맘에 들면 부처님이고 제 맘에 안 들면 부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빌다가 안 되면 저기 가고, 저기서 빌다 안되면 저저기 가고, 불교에서 빌다 안되면 교회가고, 여기는 불교냐? 기독교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에는 관세음보살이냐? 지장보살이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느냐? 안 주어지느냐? 이게 중요한 거요. 이것만 주어진다면 종교도 바꿀 수 있고, 종파도 바꿀 수 있고, 절도 바꿀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바란다. 이거야. 늘 달라고 그래.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못 산다는 거 아니오. 자립적인 인간이오? 자립이 안 돼요? 자립이 안 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겨우 사는 사람이오. 어린애 같은 사람이오. 어른이 아니에요. 그런데 늘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데, 늘 하는 소리가 괴롭다고 그래요.
그럼 지난번에 우리 공부했던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베푸는 사람이죠. “누구든지 도움을 필요해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가서 다 베풀리라.” 그런데 관세음보살님 괴롭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안 들어봤잖아.
늘 베푸는데 그분은 괴롭다는 말이 없어요.
우리는 늘 도움을 얻는데 괴로워죽겠다고 그래요. 여기서
범부 중생의 특징이 뭐냐?
얻으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이게 범부중생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고 내가 범부중생일까? 현인일까? 성인일까? 부처일까? 이렇게 딱 봤을 때, 첫째 범부 중생의 특징이 뭐라고? 얻으려고 한다. 그러면 자기 딱 보니 자기가 뭐다?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범부중생이구나.
내가 범부 중생이기를 원해서
범부중생이 된 거요.
얻는 자는 범부중생이고,
주는 자는 보살이다
그러면 여러분 뭐하고 싶어요?
범부중생하고 싶어요.
그런데 얻으려고 하면 주어진다고 말하는데,
어디서 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게 어디서 오겠어요? 주는 자가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다 얻으려고만 하지
아무도 주려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얻어지려고 하는 것이 얻어지겠어요? 안 얻어지겠어요?
안 얻어지겠지.
그러니까 얻으려고 하는데 안 얻어지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이 범부중생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은 누가 벌을 줘서 그런 게 아니고,
모순 때문에 그래요.
다 얻으려고 하고 주려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그 얻으려는 사람이 대다수가 못 얻어.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요.
그러니까 남의 것 뺏어,
일시적으로는 좋지만 뺏긴 사람은 가만히 있어요?
그럼 또 뺏어가. 이런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좀 솔직하게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 절에 와서 불전함에 만 원짜리 넣으면서 12천원 받기를 원합니까? 아니잖아. 2만원 받기를 바래요? 아니잖아. 백만 원? 그것도 아니에요. 엄청나게 받기를 원해요. 복권보다 더 바래요. 그래서 저는 불전함에 든 돈이나 불단에 올려놓은 음식 안 먹어요. 그거 먹거나 쓰면 책임져야 될 거 아니오. 안 그래요? 우리 부처님은 가만히 웃으시고 말이 없으시잖아요. 그럼 내려 먹은 사람이 책임져야 되요.
그래서 ‘불공물을 절에 살면서 수행자가 함부로 먹지마라.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소되어서 갚아야 된다.’ 그런 옛날 얘기가 있는 이유도 그렇다. 그 바램이 그 속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서 있단 말이오. 그 답답한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탈로 가는 길이 아니에요. 첫째 그것은 성취될 수도 없고,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뭐에 속한다? 빚에 속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언젠가 갚아야 될 거요. 그래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요. 이게 범부중생이고,
/현인/
두 번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두 번째 사람이 현인이에요. 현인.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준 게 없이 받을 수가 없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 나는 베푼 게 없는데 어떻게 얻을 게 있느냐? 그래서 베푸는 거요. 베풀 때 베푸는 목적이 뭐요? 베푸는 게 목적이에요? 이자 쳐서 받는 게 목적이에요? 이자 쳐서 받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범부 중생은 베푼 바 없이 그냥 얻으려고 하고,
현인은 베풀어서 얻으려고 한다.
씨를 뿌리고 추수를 걷으려고 하는 거요.
이렇게 베풀면 이것은 인연을 짓고 과보를 받는 거 아니에요. 그죠? 이것은 범부중생보다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까? 낮습니까? 훨씬 나아요. 이것은 남을 헤치려는 생각 없어요. 공짜로 먹으려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 노력에 의해서 자기가 먹겠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우리가 현명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사람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이루어질 확률은 높지만 투자했다고 반드시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농사를 안 짓고 그냥 가을 논에 가서 추수하겠다면 얼토당토않지만, 농사 지었다고 반드시 가을에 추수하겠다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한 80~90% 확률은 되지만, 안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이 사람은 후회를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풀지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 농사 짓지 말고 놀 걸. 그러면 이때 괴로움은 더 큽니다. 그래서 이것도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니다.
이 베푼다. 얻으려고 하는 데 대해서 베푸는데 이 보시라고 그래요. 베푸는 게 보시에요. 그럼 이 베푸는 것을 통해서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냐? 그것은 아니에요. 이것도 아직 괴로움이 돌아올 씨앗이 남아있습니다. 윤회의 씨앗을 심고 있는 거요. 그래서 이것은 해탈의 길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시라고는 할 수 있지만, 보시바라밀은 아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많이 하지만, 지금 보시바라밀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성인/
그러면 세 번째 보살의 경지, 성인의 경지는 어떠냐? 베풀 되 베풀 뿐이지 거기에 뭔가 받으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베푸는 것으로 끝나는 거요. 누가 배고프다 하니까 음식을 그냥 주는 거요. “내가 음식 줄테니 나중에 뭐해줄래?” 이렇게 안한다. 아프다 그러면 그냥 치료해주는 거지, “내가 치료해 줄테니 다음에 뭐 줄래?” 이렇게 말 안한다. 물에 빠져있다. 그럼 건지는 거지, 장대 내놓고, “야, 건져줄까? 말까? 너 건지면 뭐 줄래? 얼마 줄래?” 이런 거 안 하는 거요. 그냥 건지는 거요. 설령 건져낸 뒤에 내 보따리 내놔라 하더라도 어때요? 건져주는 거요.
다만 베풀 뿐이다. 다만 베풀 뿐이다. 그럼 베푼 것으로 인해서 뭔가 괴로움이 일어날 아무런 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 이게 끝이 나는 거요. 이게 뭐요? 바라밀다에요.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조건 없는 베품이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 불교 용어로 뭐라고 그러죠?
무주상보시다. 이렇게 말해요.
무주상 보시는 어디 절에 보시하면서 “스님, 제 이름은 쓰지 마세요. 저 이름 안 쓸래요.” 이게 무주상보시가 아니에요. “왜 이름 안 써요?” 하니까? “무주상보시를 해야 복이 많다던데요.” 더 많은 복을 받으려고. 이름을 쓰고 안 쓰고, 이게 핵심이 아니고, 절의 재정을 투명하게 하려면 이름을 써야죠. 또 이름을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 쓰는 것은 괜찮아요.
그럼 무주상 보시는 뭐냐?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보시를 하는 거지, 거기에 조건이 안 붙어 있다. “이렇게 할 테니까 뭘 달라. 어떻게 해라.” 이게 없다는 거요. 이게 무주상보시에요. 그러니까 이
무주상보시 같은 마음이 되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만 사랑할 뿐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사랑하면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남에게 베풀면 여러분들이 주인이 됩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똑같이 일을 했는데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모르겠어. 끝나고 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고, “감사합니다.” 이러면 여러분들은 주인하고 나그네 구분할 수 있죠? 예.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줍니다. 그러면 누가 주인인지 구분할 수 있죠? 예.
디스코 장에서 막 춤을 춥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춤추고 돈을 받아가고 한 사람은 돈 내고 춤춰요. 그러면 누가 놀러왔고, 누가 일하러 왔는지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지.
보세요. 주인과 객을 간파하는 방법이 간단하다는 거요.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베푸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받는 사람은 종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주인 되기가 싫죠? 다 뭐되고 싶다? 종 되고 싶다. 그래서 “부처님 저 종 좀 되게 해주세요. 저 괴롭게 살도록 좀 해주세요.” 여러분들은 잘한다고 기도하는데 기도 내용이 늘 그렇다. 그래서 기도를 늘 하는데도 이 괴로움에서 못 벗어나는 거요.
왜 괴로움에서 못 벗어나느냐?
나빠서? 아니에요.
어리석어서.
거꾸로 하고 있어서.
그래서 못 벗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이 원리를 바로 알고 여러분들이 정진을 하면 금방 얼굴이 밝아지고, 좋아지는 거요. 으흠. 수행한다고 단식 안 해도 됩니다. 예. 수행 한다고 결혼 안하고 혼자 살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 안하셔도 되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첫째 법의 이치를 바르게 알 것
두 번째는 그것을 행할 것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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