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강의 7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관자재보살님의 수행법인 반야바라밀다 수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은 반야바라밀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6가지 바라밀다 수행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6가지가 뭐였습니까? 첫째가 보시바라밀, 두 번째가 지계바라밀, 세 번째가 인욕바라밀, 네 번째가 정진바라밀, 다섯 번째가 선정바라밀, 여섯 번째가 반야바라밀. 지혜의 바라밀. 이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즉, 6개 가운데 하나를 의미하기도 하고, 6가지를 다 포함한다.
그런데 이 반야바라밀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생각해보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셔서 마침내 제법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시자 진정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조금 개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보면 사리자, 사리부트라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기서는 부처님대신 누구에게 여쭈었습니까? 관자재보살에게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명상에 들어계시니까.
그때 어떻게 질문했느냐? 보살이 보살이라는 것은 수행을 하는 선남자 선여인을 말합니다. 금강경에는 어떻게 되어있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까?/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수행을 해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까? 이런 얘기죠. 여기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선남자 선여인을 줄이면 보디사트바, 보살이 된다, 이 말이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다.
그럴 때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대답을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런 금강경하고 비유해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본다면 사리부트라의 질문에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 즉,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 말이오. 어떻게? 제법이 공한 것을 확연히 봐야 한다. 이것이 범어 원본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번역본을 가지고 그대로 해석을 하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한도리를 깨달았다./ 이렇게 되고, 원본에 준해서 해석을 해본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깨쳤다./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깨쳐서 사실은 반야바라밀다가 완성이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그냥 쉽게 말한다면 수행자가 그전에는 얻으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베풀어라 하는 것을 알고 베풀었다. 베푸는 게 보시죠. 보시를 널리 행했는데도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를 않았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봤더니 바로 아직도 “이것은 내 것이다. 그런데 너에게 준다.” 이게 남아있다. 이거요.
“그러니까 내 것을 너에게 주니까, 네가 가난해서, 네가 불쌍해서, 네가 필요해서, 내가 너에게 준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러면 “너는 나에게 뭘 줄 것인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네가 도와주든지, 이렇게 무엇인가 보상심리가 있다. 이 보상심리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베풀어도 그것이 공덕이 될 지언정, 복은 될 지언정 해탈은 안 된다. 그래서 이 한 물건, 이 베푸는 물건, 이것을 깊이 들여다봤더니, 사실은 이 물건은 내 것이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네 것이라 할 것도 없다. 우리 것이라 할 것도 없다. 이 물건 자체는 그냥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다.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것은 본래 없다.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것은 텅 비어있다. 물건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이 보시물에 네 것이나 내 것이니 하는 실체도 없다.
그러니 사실은 ‘준다’ 하는 것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준다’하는 상이 생기지, ‘내 것’이라는 상이 없다면 ‘준다’하는 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는 행위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내 코로 숨 쉰 공기가 상대편 코로 들어가잖아요. 그럴 때 내가 “내 숨을 너에게 준다.” 이런 생각 안하죠. 왜 그럴까요? 이것도 분명히 주고받는데. 이것은 이 공기를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필요에 의해서 쓰는 거요. 내가 필요해서 쓰고 네가 필요해서 쓰는 거다.
내가 볼펜을 갖고 쓰고 있다가 “내가 필요하다”하면 이 볼펜을 주는 거죠. 그때 내 것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그냥 공기를 숨 쉬듯이 그 사람이 필요 하니까, 그 필요에 의해서 내가 주는 거란 말이오. 이럴 때는 거기에는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 내 것이라는 상이 없기 때문에. 준다는 상도 안 일어난다. 주는 행위가 안 일어난다는 게 아니에요. 내 것이라는 상이 없으므로 준다는 상이 없고, 준다는 상이 없다는 말은 뭔가 보상심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 주는 행위에 따른 어떤 과보도 없다. 즉, 내 것을 준다하면 보상심리가 있고, 그 보상심리로 인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라고 하는, 미움이라고 하는, 실망이라고 하는 과보가 따른다. 이 과보가 따른다면 이것은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이 괴로움의 바다를 훌쩍 넘어가버린 세계, 해탈과 열반의 세계가 아니다.
이런 데에서 우리가 현재 한문으로 된 문장의 해석은 관자재보살이 주인공이오.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또는 수행하셔서,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러니까 여기서 원인이 뭐요? 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것이 원인이고, 그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과보가 뭐요?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결과,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수행을 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과보가 뭐냐?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것은 과인데, 그 응보가 뭐냐? 그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 이런 얘기에요.
이렇게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셔서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이 경문에 있는 것을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약간 바꾸어서 본다면, 관자재보살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진실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쳐야 한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반야바라밀다가 행해질 수가 없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쳐야
보시가 보시바라밀다가 되고,
인욕이 인욕바라밀다가 되고
지계가 지계바라밀다가 될 수가 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이 깨치지 못하면 보시가 보시바라밀다가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베푼다 하더라도 아무런 티끌 없는, 흔적 없는 그런 경지로 무여의 경지로는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런 데에서 우리가 원본과 현재 한문본 사이에는 약간의 해석상의 차이를 둘 수 있다. 그럼 어떤 게 더 정확한 해석이냐? 이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의 몫이에요? 학자들의 몫이에요.
오늘 우리들은 그런 약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인가? 이게 우리의 주관심사다. 자, 현재 경문대로 기초로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견/
관자재보살님께서 육바라밀을 행하셔서 결국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죠? 그 깨달음을 얻었다. 또는 깨달았다. 이게 각이에요. 깨달았다. 또는 알았다. 이건 뭐요? 지혜에요. 확연히 보셨다. 관이에요. 그와 같은 의미에요. 뭐가? 조견이. 비추어 보셨다. 환하게 비추어 보셨다. 이 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확연히 알으셨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비추어보셨다.
뭘 비추어보셨느냐?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실을. 오온의 특성이 공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그래서 오온개공. 모두 개. 오온이 모두 다 공하다.
/오온/
오온이 뭐냐? 이 오온이라는 용어는 소승교설입니다. 소승교설. 지금 이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사상이죠. 오온이라는 용어는 소승에 나오는 불교교설이에요. 일체가 뭐냐? 일체. 일체는 곧 오온이다. 이게 오온설이에요. 일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5가지 쌓임이다. 여기서 오온이라는 온자는 어떤 쌓임이라는 뜻이에요. 다른 데서는 오음이다. 이렇게도 말해요. 그러면 그 5가지가 뭐냐? 색, 수, 상, 행, 식.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다.
/개공/
이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 다 공하다. 여기서 다 공하다는 것은 뭘 말해요? 이 오온이 복수이기 때문에 그러겠죠? 그 말은 색도 공하고, 수도 공하고, 상도 공하고, 행도 공하고, 식도 공하다. 오온이 모두 다 공하다. 오온의 실체가 없다. 오온은 특성이 텅 비었다. 이런 의미란 말이오. 그럼 오온이 일체니까 오온대신에 일체를 집어넣으면 일체가 다 공하다. 일체를 제법이라고 하니까 제법이 다 공하다.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법이
그 본질은, 근본은 이거다 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다.
그래서 여기서 소승교설의 용어를 쓰지 않는다면 그냥 오온대신 뭐로 대치하면 된다? 일체, 또는 제법. 이렇게 대치하면 됩니다.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셨다. 제법의 실체가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텅 빈 존재임을 깨달으셨다.
/도일체고액/
그러니까 그것을 확연히 깨달으시니까 이 천하 만유, 모든 것의 본성이, 그 본질이, 근본이 이것이라고 할 어떤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고, 텅 빈 것을 깨달으니까, 어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번뇌, 고뇌, 이것이 흔적도 없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뭐요? 도일체고액이다. 일체의 고액, 일체. 그러니까 모든 이런 얘기요. 모든 괴로움과 액난이 다 사라져버렸다. 모든 고통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건너가 버렸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를 오온이라고 한다. 소승교설에서는 또 일체를 오온이라고 할 뿐만이 아니고, 일체는 12처다. 이런 12처설이 있습니다. 5온설이 있고 12처설이 있다. 일체는 18계다라고 하는 18계설도 있습니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을 말하고, 12처라고 하는 것은 색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를 말한다. 여기서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을 하는, 사물을 인식을 할 때 그 인식의 대상을 우리들의 감각기관을 기초로 해서 나누면 6가지가 된다. 즉, 우리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이 6가지다.
첫째 뭐가 있습니까? 눈이 있고_안,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가 있고, 다섯 번째는 이 몸뚱이. 몸뚱이 중에 제일 감각이 예민한 게 어디인 줄 아십니까? 손이에요. 손. 이게 따뜻한지, 찬지, 보들보들한지, 꺼칠꺼칠 한지, 알아보려면 엉덩이로 비벼봐야 되요? 발바닥으로 비벼봐야 되요? 머리로 비벼봐야 되요? 손으로 만져봐야 되요? 손으로 만져봐야 되요. 이 손바닥 감각이 제일 예민하다. 그래서 몸에서 가장 대표적인, 접촉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알아내는 가장 대표적인 게 손이다.
그래서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은 뭐로? 손으로 감각을 알아낸다. 우리가 깜깜한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역시 여러분들, 더듬더듬 할 때 뭐로 주로 더듬습니까? 손으로 더듬죠. 발로 더듬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일 정확한 게 뭐다? 손이에요. 손으로 이렇게 이렇게 더듬어서 알아차리고 간다. 그다음에 머리로 생각하는 의, 생각하는 이게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뭐라고 한다? 안이비설신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본다할 때 보이는 대상, 첫째 보이는 것은 빛깔이 이죠. 두 번째는 모양이 있습니다. 그 빛깔과 모양.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그 대상은 빛깔과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모양이 없는데도 빛깔이 있으면 볼 수 있죠.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빛깔이 있습니까? 요즘 레이저 같은 거, 가서 손으로 만져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빛깔이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칼라가 아니라도 어떤 형체가 있으면 우리가 볼 수가 있죠.
그런데 이 형체나 빛깔이라는 것은 다 빛이 있어야 됩니다. 빛이 없는 캄캄한 데서는 빛깔도 모양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일러서 색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12처설에서 6가지 감각기관에 대응되는 그 감각의 대상에 있어서의 색은 눈의 대상입니다. 눈의 대상. 그러니까 똑같은 색이라고 하는 용어가 쓰여져도 그게 앞뒤 문맥을 봐서 어떤 의미로 쓰여져 있냐에 따라서 개념이 다르다. 자, 이것이 색이고.
그 다음에 귀의 대상은 뭐요? 소리죠. 소리가 있어야 귀가 듣고, 그 소리를 듣는 게 귀지, 귀가 보는 작용을 하는 게 아니고, 듣는 작용을 해요. 듣는 작용의 대상은 뭐요? 소리에요. 그 다음에 코는 냄새고, 혀는 맛이에요. 그 다음에 몸 또는 손은 뭐에요? 감촉이에요. 접촉이 되어야 되죠. 접촉이 안 되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뜻의 대상은 생각의 대상은 법이라 그래. 원리.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한다? 색성향미촉법이다.
그러니까 일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뜻으로 알음알이 하는 이것이 곧 일체다.
이 밖에 뭐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일체를 설명하는 것을 뭐라고 한다? 12처설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뜻이 굉장히 과학적인데도 불구하고 이것만 갖고는 사실 설명하는데 조금 부족한 게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나와 다른 사람이 똑같은 모양을 똑같은 눈을 가지고 봤는데, 두 사람이 때로는 다르게 볼 수가 있어요. 잘못본 게 아니고, 각자 다 정확하게 봤는데 달리 본다. 그럼 이것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이론을 가지고는. 또 만약에 내가 정신을 잃어버리면, 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 보는 주체, 듣는 주체, 냄새 맡는 주체, 맛보는 주체, 접촉하는 주체, 알음알이 하는 주체로서의 식이 있다. 식. 이 식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식이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는 거다. 그래서 식에 6가지가 있다. 그래서 보는 작용을 뭐라고 한다? 안식. 그 다음에 듣는 작용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오식, 의식. 이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다시 식에 6가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것을 뭐라고 한다? 18계설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나옵니다. 전부 다.
자, 다시 소승교설에서, 소승불교에서 이 말이에요. 일체는 이것이다. 라고 설명하는데 3가지가 있다. 첫째가 일체는 오온이다. 일체는 12처다. 일체는 18계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은 오온이 공하다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12처도 다 공하다. 18계도 다 공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만법이 다 공하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요 문장 자체에서의 핵심은 오온이 아니고 제법입니다. 제법이 모두 다 공하다. 존재의 특성이,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제, 모든 법 할 때 법이라는 것은 뭐요?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법이라 하면 이치, 원리, 이런 뜻도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 이런 뜻도 있고, 진리 이런 뜻도 있고, 여기서 제법이라고 할 때는 존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존재. 이런 의미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법이다 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런 의미요. 그러니까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 바깥 세상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런 의미도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 제법이 다 공하다. 하는 공성을 확연이 알았다. 비추어 봤다. 비추어 봤다는 것은 꿈에서 깼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 도일체고액이다. 모든 괴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이 문장 하나가 전체 경문의 핵심이에요.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셔서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이 얘기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자하는 일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일이에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는
즉, 육바라밀수행을 하는 거다.
우리가 육바라밀수행을 하게 되면
제법의 공성을 깨닫게 되고,
제법의 공성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번뇌는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요.
그런데 범어원본에 준해서 본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보시바라밀을 행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는 게 아니고, 보시를 행하다가 제법의 공상을 깨달으니까, 그 보시가 완성이 되어버린 거요.
보시의 완성, 이게 뭐요?
보시를 행함으로 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야 됩니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확연히 알아야 우리의 수행이,
그것이 비록 보시행을 한다하더라도 보시바라밀행이 될 수가 있다.
또 보시행을 해야, 보시바라밀을 해야,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칠 수가 있다. 앉아서 “제법의 공상을 깨닫자하고 텅 빈 거야. 텅 빈 거야.” 이렇게 한다고 공성이 깨쳐지느냐? 아니에요. 그것은 번뇌 속에 휩싸여 있다. 제법이 공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 이것은 공의 모양을 생각으로 지었다. 하니까 이것은 뭐요? 공상이 되는 거요. 그러면 공이라는 모양을 생각으로 지으면 이것은 공이 아니에요. 공이라고 이름 붙여진 하나의 상, 또는 유아에 해당이 됩니다. 이러면 공에 집착했다. 공에 떨어졌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치면
번뇌가 사라지는데,
제법이 공하다는 생각을 하면
번뇌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제법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번뇌가 사라지거나 괴로움이 사라지는 일은 안 일어난다. 학자가 불교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지식으로 알 때는 자신의 인생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이게 공병이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은 누군가가 “공이 아니다.”라고 그러면 “공이야.”하고 싸우게 됩니다. “왜 공인데 너 왜 공이라고 그래, 그건 불교가 아니야.” 이렇게 다툰다.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다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공이라는 상에 집착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분별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난다. 이게 큰 차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반야심경 공부를 할 때, 제법이 공하다하는 지식, 알음알이, 이것을 지금 하고자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설, 교리는 알지만, 여러분들의 인생에 붓다의 가피, 법에 귀의한 어떤 과보, 이것은 안 일어난다.
/오온/
자, 그러면 조금 더 들어가서 오온이 뭐냐? 이것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일체가 오온이라고 했을 때, 왜 일체가 오온이라고 했는가? 그들은. 오온이 색수상행식.
*색
색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쉽게 말해서는 우리 몸뚱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몸뚱이. 몸뚱이가 뭐라고요? 색이다. 그런데 몸뚱이만 말하는 게 아니고, 몸뚱이를 포함한 이 세상에 있는 일체 물질현상계는 다 뭐다? 색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물질 현상계가 색이다. 이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그것이 눈으로 보든, 귀로 듣던, 코로 냄새 맡든, 혀로 맛보든, 손으로 만지든 인식의 어떤 대상, 그러니까 나 밖에, 내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 뭐다? 색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색은 우선 몸뚱이를 말하고, 몸과 마음 할 때는 뭘 말한다? 몸뚱이를 말하고, 이것은 정신과 물질하면 모든 물질세계를 말하고, 이것은 어떤 인식을 하는 모든 대상은 다 색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째 색이 있다. 밖에 색이 있어.
*식
그 다음에 크게 나누면 안에는 식이 있어요. 식. 사물을 인식하는 어떤 주체인 뭐가 있다? 식이 있어. 컴퓨터로 말하면 색은 하드웨어에요. 식은 뭐다? 소프트웨어. 그러니까 컴퓨터 그 기계 자체, 아주 고성능 컴퓨터, 이것은 색이라고 말 할 수 있고, 거기에 프로그램을 깔지 않으면 제대로 작용이 안 되죠. 어떤 프로그램이 깔렸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프로그램이 뭐다? 식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닌데 비유해서 얘기하면 그래요.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색과 식이에요. 몸뚱이와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수
그런데 바깥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이러면서 바깥에서 정보가 들어온다. 이 정보가 들어오는 작용 즉, 컴퓨터로 말하면 정보를 입력시켜야 될 거 아니오. 거기다 입력시키는 작용. 들어오는 작용. 이게 뭐요? 수에요. 감수작용.
그런데 이 수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감수작용을 뜻하는 이런 작용만 수를 뜻하는 게 아니고, 이런 감수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 몸과 마음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다. 기계 같으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바깥에서 어떤 정보가 들어올 때 여러분에게 소위 필링이 일어나죠. 어떤 떨림 현상이 일어난다. 몸과 마음에서. 그러니까 감각이 일어날 때 그냥 어떤 정보가 들어오면 정보가 들어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감각이 일어나는 거요. 필링이 일어난다. 이것을 수라고 한다. 수.
사물을 봤을 때, 내 것을 저 사람이 가져갔을 때 기분이 나쁜 거요. 내 것을 가져가면 기분이 나쁜 게 먼저 일어납니까? 우리는 “내 것을 가져가니까 기분이 나쁘다.” 이러는데, 기분 나쁨이 먼저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에서 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거요. 이 반응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까지도 어디에 들어간다? 수에 들어가는 거요.
*상: 생각, 지각, 표상작용, 기억, 상상
쉽게 말하면 이렇게 들어온 정보가 쌓여있어.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기억을 지금 되살려 낼 수가 있죠. 이게 다 상에 들어갑니다. 생각한다. 이게 다 상에 들어가요. 생각 상, 들어온 정보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이 기본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이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합니다. 이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 정도들이 저장이 되어있어. 저장되어 있다가 언제든지 되살려 낼 수가 있는 거요. 이게 상이에요.
*행
그러면 이렇게 표상작용이 일어나면 나한테서 감정이 일어납니다. 기분이 나쁘다. 그러니까 화가 난다. 욕심이 난다. 갖고 싶다. 이렇게 감정이 일어나면서 그것이 어떤 행위를 유발시키는 감정이에요. 뭐뭐하고 싶다든지, 하기 싫다든지, 이렇게 뭔가 행위가 유발되는, 바깥으로 정보가 밖에서 안에서 들어오는 게 있고,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행위를 유발하는 게 일어납니다. 이것을 뭐라고 한다? 행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행에는 3가지가 있어요.
마음이 하고 싶다. 이것도 행에 속합니다.
말로 하고 싶다. 이것도 뭐에 속한다? 행에 속해요.
몸이 가서 해버리는 것도 행에 속해요.
*식
그러면 이 행이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과보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업을 형성하는 것은
뭐에 의해서 형성이 됩니까?
행에 의해서 새로운 것이 형성되고,
그 형성 되어진 것은 다시,
어디 가서 저축이 되어서 작용 하냐? 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 순간의 작용을 할 때 식이 있습니다. 다음 순간에 작용할 때는 식이 또 달라져있습니다. 아무튼 내가 갓 태어났을 때는 모르겠는데, 전생부터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런데 그것을 뗀다면 그때나 내가 백지상태일까, 항상 이 식은 현존합니다. 그러니까 식에 대한 설명 없이 어떤 문제를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각자 이미 자기의 식이 있기 때문에.
업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늘 반응해서 각자에게 인식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견해도 생각도 가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다 소멸해 버리면 물론 객관이 그냥 투영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현존하는 한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럼 이런 사실을 확연히 우리가 알면 어떻겠어요?
나타나는 현상을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저 벽이 붉게 보이는 것은 그냥 있지만,
저 벽 색깔이 붉다고 고집하지는 않게 된다.
내가 “저 벽은 붉은 색이네.” “아니야 푸른색이야.” 이래도 갈등이 안 생깁니다. 이것은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고, 저것은 저 사람 눈에 저렇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나의 업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저 벽은 붉은 색깔이야.” 하는데 누가 “푸른색깔이야.” 하면 “너 잘못 봤어. 너 틀렸어.” 이렇게 되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체라는 것은
이렇게 인식대상이 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수작용이 있고,
표상작용이 있고, 의지작용이 있고.
그런데 그 안에 이미 형성되어진 식이 주관으로 여기 대응하고 있다.
이것이 일체다.
여기서 감수작용만 생각하면 색이 있고, 수가 있고, 상이 있고, 행이 있고, 식은 별개죠. 이래서 형성되어진 결과물이 쌓이는 것을 볼 때 식이 맨 끝에 올 수 있게죠.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어떠냐? 이 수가 식이 있기 때문에 색이 감수작용을 일으키면서 여기에 호불호의 기분 좋고 기분 나쁨의 떨림이 먼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색이 있고, 상이 있고, 수가 있고, 행이 있고, 식이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색수상이냐? 색상수냐? 이것은 그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거요. 이것이 딱 순서대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5가지의 쌓임이다. 이래서 나눌 때 ‘색은 몸뚱이다.’ 하면 나머지는 다 마음작용에 속하겠죠. 우리의 어떤 정신작용에 속하는 문제다. 그런데 수라는 것은 거의 몸뚱이로부터 일어나는 감각도 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필링도 수니까, 이 수라고 하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의 중간에 양쪽 위치를 가지고 있는 거요. 그래서 크게 우리가 육신과 정신, 몸과 마음, 이렇게 나누지만, 이 작용을 면밀하게 관찰해보면 그렇게 둘로 딱 나눌 수는 없는 거다. 자, 여기서 결론은 다시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오온은 곧 일체다. 그런데 일체가 공하다.
일체의 특성이 텅 빈 것임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확연히 보셨다. 그게 뭐다? 조견. 비추어봤다. 이 말이오. 이게 핵심이오.
그래서 이 오온은 색수상행식이기 때문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하는데, 그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조견오온개공을 그 다음 단락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다음 단락에 가서 색이 공하고, 수가 공하고, 상이 공하고, 행이 공하고, 식도 공하다. 이 설명을 그다음 단락에 가서 다시 하고 있다. 그러면 색이 공하다 할 때, 이 설명을 다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요. 그 색만 그런 게 아니라 수상행식도 다 그렇다. 그래서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제법이 확연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공한 세계에서는 아까 얘기한대로 강도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는 것처럼,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고,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요. 자, 여기까지 말씀 드리고 다음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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