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반야심경강의 3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시간에는 반야심경의 배경, 즉 반야심경이 설해진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번 더 말씀 드리면, 반야심경이 설해진 장소는 마가다국 왕사성 영축산이다. 기사굴산. 또는 그리드라 쿠타라고 말해지죠.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대비구, 큰스님들과 보살 마하살들이었다. 부처님과 대중들이 아주 깊은 삼매에 드셨다. 그것을 우리는 광대심심삼매라고 한다.
그 삼매에 드셨을 때,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보살이
깊은 삼매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함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그것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리부트라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그것을 보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질문을 했다. 그 보살의 경지, 제법이 공함을 깨닫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 그런 대승보살의 경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관자재보살님께서는 사리부트라에게 아주 자세하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설했다. 이 설법이 끝나자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셔서 관자재보살과 사리부트라를 칭찬하며 바로 지금 설한 법이 진실 그대로다. 이렇게 증명을 해주셨다.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이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닫고 크게 기뻐하고 이 법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하리라 발심을 했다. 그러니까 이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 경의 주인공이 누구냐? 관자재보살입니다. 소승에서 또는 성문연각승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지혜제일 사리부트라가 대승보살인 관세음보살에게 대승사상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이 관세음보살님께서 대승의 공사상에 대해서 법을 설하셨다. 이런 형식을 빌어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이것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런 논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설해진 설법의 내용, 그것이 무엇인가? 누가 말했느냐? 역사적 배경이 어떠냐?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내용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내용인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으로 이끄는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봐야한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이제 본문에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문장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님께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실 때
오온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여실이 깨닫고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느니라.)
전체 문장에서 이 문장이 제일 중요합니다. 소위 우리가 글을 쓸 때 말하는 두괄식에 속한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첫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관자재보살입니다.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이 이 말이에요. 무엇을 했냐?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그러니까 대승보살이 주인공이 대승보살입니다. 성문연각승이 아니고. 대승보살이, 그 가운데 관자재보살이,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데 어떤 수행법을 닦았느냐? 바라밀수행법을 닦았다. 그 바라밀수행법 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이렇게 수행정진을 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어떻게 되었느냐? 깨달았다. 이거야. 무엇을 깨달았느냐?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았다. 이게 조견오온개공이다. 오온이 모두 공한다는 것을 비추어 보았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니 어떻게 되더냐?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버렸다. 도일체고액이오. 모든 번뇌와 모든 속박이 끊어져버렸다. 모든 괴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것을 불교용어에서는 니르바나, 열반, 또 해탈,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열반을 증득했다. 해탈을 했다. 이런 얘기에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누가? 대승보살이
*그 가운데 누가? 관자재보살이
*어떤 수행을 했느냐? 바라밀수행법을 닦았다.
*바라밀수행법이 몇 가지가 있느냐? 10가지. 십바라밀, 또는 6가지 육바라밀 수행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깨달음을 얻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았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버렸다. 일체의 문제가 사라져버렸다. 일체의 번뇌가 끊어져버렸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열반을 얻었다. 마침에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마침내 붓다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얘기에요.
이 한 문장가지고 앞으로 몇 번의 강의를 해야 될 거예요. 그 가운데 이 번 시간에는 보살이 뭐냐? 이거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보살의 원어는 보디사트바입니다. 발음 따서 한문으로 옮겨서 우리식으로 읽으면 보리살타입니다. 보리살타를 줄여서 뭐라고 한다? 보살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보디, 보디는 깨달음이라는 뜻이에요. 깨달음.
사트바는 무지,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정반대의 단어입니다.
하나는 아주 밝음을 상징하는 깨달음. 부처라는 뜻이고,
하나는 아주 깜깜한 어둠을 상징하는 무지, 무명,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이 두 개가 합해진 언어에요. 보디 사트바.
부처와 중생은 별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이거에요.
보디사트바.
앞에 것을 수식어로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깨달은 중생, 중생은 중생인데 보통 중생이 아니고 깨달은 중생이에요. 그런데 중생이 깨달으면 그건 뭐에요? 부처에요. 그러니까 깨달은, 아주 강조해서 깨달은 중생이다. 이렇게 말하면 보살은 부처라는 뜻이 됩니다. 깨달은 중생이다. 중생을 좀 힘 있게 발음하면 뭐가 됩니까? 깨닫기는 깨달아도 아직은 중생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중생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을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중생으로부터, 첫발을 디딘 보살, 보살의 길에, 깨달음의 길에 처음 발을 내딛은 보살을 우리가 초발심보살이라고 그래요. 초발심보살은 거의 중생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점점점점 정진을 해서 거의 부처에 이르기 직전까지 왔다. 그래도 보살이에요. 그런데 이건 말은 보살이지만, 거의 부처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보살은 이렇게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 중간단계, 이 보살을 52위, 5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부처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
그게 바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
신심입니다.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비록 괴롭게 살고 있지만, 내가 이 어리석음을 깨뜨리면, 나도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그런 부처님 같은 분이 될 수가 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되요. 이 믿음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자꾸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비록 내가 지금 몸에 병이 들고, 가정에 불화가 있어서 헤어지고, 사업은 망해서 부도가 나고, 온갖 고통에 빠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따라서 수행정진하면,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한 부처님 같은 존재가 될 수가 있다.
열반과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
믿는다면 이런 믿음이에요.
이런 믿음이 있어요?
이런 믿음이 확고부동합니까?
이게 있어야 보살로서 출발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 이 발심, 마음을 낸다. 이 말이오. 마음을 내어야 돼. 어떤 마음을 내느냐? 깨닫겠다는 마음을 낸다. 발보리심.
어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느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최상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자, 이를 뭐라고 한다?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해요.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하면, 그를 곧 뭐라고 한다? 보살이라고 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자=발보리심 자, 발심한 자, 즉, 보살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고 마음을 확~ 내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늘 “나는 괴롭다”하고 수렁 속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이렇게 웅크려 들어 있으면
영원히 이 고통의 바다, 육도를 윤회할 뿐이다.
비록 내가 지금 이 고통에 빠져있지만,
“내가 여기서 벗어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어야 된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여기 깜깜한, 어리석음, 고통에 빠져있는,
온갖 것에 속박 받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있다.
중생의 특징은 무지, 어리석음이에요.
무지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는 고통이에요.
그 반대편에 아주 밝은, 깨달은, 자유롭고 행복한, 이런 세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세계다.
부처의 특징은 밝음, 깨달음.
그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는
괴로움이 없는 행복, 속박이 없는 자유, 이렇습니다.
바로 이 중생이 부처의 길로 나아간다.
이 나아가는 길에 있는 자를 뭐라고 한다?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한다.
출발점에서 종착점에 이르는, 이 과정에서 화엄경에서는 5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한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느 지점에 와 있습니까? 출발은 하셨습니까? 출발도 못하셨어요? 네. 출발은 했어요? 예.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어디쯤 왔나를 이제 점검을 해보시면서 뒤로 돌아보면서
“아,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하는데 대해서
여러분들이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희망을 가져야 된다.
그러나 목적지를 보니 아직 까마득하다.
그러니 게을러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정진해야 되겠다.
아직 갈 길이 머니 중도에 앉아서 쉬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고 나아가야 한다.
자, 보살은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 보살이 부처가 된다. 그랬는데, 어떻게 될 수 있느냐? 금강경에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합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쉽게 말하면 ‘어떻게 수행정진을 해야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이 괴로운 중생이 어떻게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어라./ 지금 내가 내 문제도, 내 인생도 해결을 못해서 누구한테 도움을 좀 얻어서 해결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다 들어주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렇게 말했어요.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죠. 돈이 없어서 괴로워서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부처님이 “딴 사람 도와줘라.” 그랬어요. 사랑을 못 받아 괴로워서 하소연을 했더니 “사랑하라.” 이랬어요. “쟤가 나를 이해 안 해주는데요. 괴로워죽겠어요.” 하소연 했더니 “네가 그 사람을 이해하라.” 그랬어요.
“저를 좀 구제해주세요.” 이랬더니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이랬어요. 그런 부처님이 내 문제를 외면하고 내 질문에는 응답을 안 하시고 딴 얘기를 하셨냐? 아니다. 이게 부처님이 내 질문에 따른,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나에게 일러주신 거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번뇌를 항복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그래서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바가 없느니,
즉,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는 이 생각까지도 버려라.
내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그래도 일체중생을 다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는 이 생각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 수 있다?
해탈할 수 있다.
이것이 상구보리_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하화중생_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이게 상하의 개념이 아니에요.
좌우의 개념도 아니에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낼 때,
곧 상구보리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장보살의 원이 뭐겠어요? 중생을 구제하는 게 본원이에요? 깨달음을 얻는 게 본원이에요? 아니에요. 깨달음을 얻는 게 본원이에요. 모든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얻는 게 본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느냐? 부처님 가르침대로 이 세상에 한 중생도 괴로워하는 자가 없도록, 괴로워하는 자가 한명도 없도록, 내가 다 구제해 마치면 누가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 이 세상에 괴로워하는 중생가운데 가장 열악한 게 어디 있는 중생이에요? 지옥에 있는 중생이에요. 그 지옥에 있는 중생, 한명도 남김없이 다 구제를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금강경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전국적으로 표현이 된 게 뭐에요? “지옥의 한 중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으니라.” 성불하기 싫다는 얘깁니까? 아니에요. 보살의 본원은 성불하는 것인데,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이 성불 앞에 가 있을 정도로 그 원이 강하다. 성불하겠다는 원은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는 원이 아니에요.
그 수행자의 절대 천명의 원 앞에 중생구제를 둔 거요. 그만큼 중생을 구제를 하겠다는 원이 크다. 그러면 중생을 구제해야 만이 부처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논리에요.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중생구제 안하고도 부처를 이룰 수가 있는데, 중생이 하도 불쌍해서 중생 구제 다 해주고 부처를 이루겠다. 이런 뜻이에요?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는 한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얘기에요?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는 한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즉,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는 것을 외면하고는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중생구제를 중생을 위해서 합니까? 수행삼아 합니까? 예. 수행삼아 합니다. 이 얘기 들으면 약간 좀 헷갈릴 거요. 아, 그럼 지장보살도 이기심 아닙니까? 예. 이기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것을 우리가 이기심이라고 하죠. 지장보살이 성불하겠다는 이 마음이 남을 헤치는 거요? 남에게 이익을 주는 거요? 남에게 이익을 주는 거요.
그러면 중생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거 하고, 내 수행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거하고 차이가 뭘까? 오히려 중생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면 더 고상하게 보이고, 내 수행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한다면 좀 이기심으로 보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큰 잘못이 있습니다. 중생을 위해서 지옥에 가서 내가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그런데 중생이 내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어요? 자기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어요? 자기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다. 다 각자 자기 잘못으로 자기 업보로 지옥에 떨어진 거요.
그런데 하도 불쌍해서 내가 구해줬어. 구해주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는 지옥에 안 와야 되는데, 이게 구해주면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지옥에 떨어진단 말이오. 내가 3번까지 구해줬는데 또 떨어지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 중생 고통 좀 받게 내버려 둬라. 정신 못 차렸으니까.” 이렇게 되기가 쉽다. 왜? 그 중생을 위해서 내가 도와주기 때문에 그 중생이 몇 번 도와줬는데도 효과가 없으면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원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원이 중간에 멈추게 돼.
그런데 10번 구해주니 10번 떨어지고, 100번 구해줘도 100번 떨어진다. 그래도 그 중생을 구해줘야 내가 성불할 수 있다면, 이 중생 구제는 내 일이에요? 그 중생을 위하는 일이에요? 내 일이에요. 내 일이니까 도로 짜증낸다. 내 일을 방해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중생심이고, 바로 내 일이다. 이 말 속에는 중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
그가 업을 짓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누구의 일이고?
그의 일이고,
그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누구의 일이다?
나의 일이에요.
나는 다만 구제할 뿐이다.
어떤 바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구제할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보살의 원은 끝이 없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시 이 단어를 가지고 설명을 해보면, 자, 여기 깜깜한 중생이 하나 있고, 이쪽에 아주 밝은 부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중생과 부처 사이에 보디사트바, 보살이 있다, 이 말이오. 보디니까 한쪽은 밝고, 사트바니까 한쪽은 어둡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밝은 쪽은 왜 밝으냐? 부처의 광명이 비추어서 밝습니다. 그럼 어두운 쪽은 왜 어두운가? 중생의 어두움이 비추어서 어둡다, 이 말이오. 그럼 이 중생이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점점점점 부처 쪽으로 가면 되겠죠. 그럼 어둠은 점점 적어지고 밝음은 점점 커진다. 그러면 처음에 출발할 때는 밝음은 1%, 어둠은 99%다. 중간쯤 오니까 50:50이다. 그리고 부처에 가까이 가니까 99:1이다. 좀 더 가까이 가면 99.1, 좀 더 가까이 가면 99.99요. 그래도 아직 100이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왜 100이 안 될까? 아무리 가도 100이 안됩니다. 이유는? 중생의 어두움이 있는 한은 이것이 100이 될 수가 없다. 또 반대로 이 보디사트바가 아무리 중생 쪽으로 와도 부처의 광명이 있는 한은 제로는 될 수가 없다. 이해하시겠어요? 즉, 빛이 1%, 더 가까이 가면 0.1, 더 가까이 가면 0.01이다 하지만 제로는 안 된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한은 보디사트바는 중생이 될 수가 없고, 중생이 있는 한은 보디사트바는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처가 있는 한 여러분은 구제 못할 중생은 되지 않는다. 부처의 씨앗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불성이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요. 반대로 중생이 있는 한은 보디사트바는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 보디사트바가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될 수 있겠어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 쪽으로 갈 게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어디 쪽으로 가야 된다? 중생세계로 가서 중생의 어두움을 하나도 없이 다 소멸해 버리면 보디사트바는 어떻게 될까? 부처가 된다.
그러니까 이 용어에 대한 이해, 하시겠습니까? 예. 그러니까 이런 사상을 갖고, 이런 관점을 갖고 수행 정진하는 자를 일러서 뭐라고 한다? 보디사트바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대승보살은 이런 이념,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해탈의 방편으로 삼는 거요. 그러니까 수행 처를 숲속이나 깊은 산속을 택하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을 자기 수행의 처소, 수행의 도량으로 삼는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을 수행도량으로 삼고,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를 수행의 도량으로 삼는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비구라고 하는 한 수행자가 그 당시에 부처님께 중생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사는 게 가슴이 아파서 부처님께 “중생들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어 주십시오.”하고 부처님께 청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네가 해봐라. 그런 세계를 네가 만들어라. 그럼, 신심이 없는 자는 “아이고, 부처님 제가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신심이 있는 자는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그리고 질문을 해야 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방법을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십만억 세계를 보여주셨다. 그 세계를 보니까 정말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런 중생들이 사는 세계도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사는 그런 세계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보시고는 “부처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 중에서 48가지 원을 세운 거요. “이러이러한 고통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이러이러한 좋은 것은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이렇게.
그래서 거기에 신체장애가 없는 세상, 여성이라고 차별이 없는 세상, 전쟁이 없는 세상, 이렇게 온갖 조건을 만들었다. 이게 48대 원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세세생생이 다겁생내로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세계를 이루었다. 그 세계를 이루자, 그는 곧 부처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세계를 이루자 부처가 되었다. 하니까, 이 보디사트바의 원리하고 똑같죠? 중생을 다 소멸해야 성불할 수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런 정토세계를 이루니까 그가 부처가 되었다. 성불했다. 그 정토세계를 무슨 정토라고 합니까? 극락정토라고 그래. 수많은 정토가 있는 중에도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정토다. 극락정토다. 그러자 부처가 되었는데, 그 부처님의 이름이 뭐다?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이다. 그래서 우리가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 곳에 날 수가 있습니까? 이제 가는 방식이 좀 쉬워야죠. 너무 어려우면 못가잖아. 그죠? 그래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10번만이라도 그곳에 나겠다는 마음을 내어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 날 수가 있다. “그러면 나쁜 짓 많이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10번만 부르면 되네요.” “됩니다.” “그거 참 쉽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쉽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을 불러도 돌부리에 탁 채어서 넘어지면 아미타불이 안 나오고, “아야, 엄마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갈 때가 급해요? 숨넘어갈 때가 급해요? 숨넘어갈 때가 급하겠지? 그러니 아미타불이 입에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그 10번을 부른다는 것은 정말로 간절해야 됩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재산이 다 날라 가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입에서 뭐가 나올 수 있어야 된다? “나무아미타불”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야” 이렇게 하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아무리 괴로워도 사람이 죽어도, 오늘 병원에 갔는데 암 검사를 했더니 암이라고 판명이 났어. 뭐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숨넘어갈 때 아미타불이 안 나올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부르는 염불이 그게 염불이에요? 노래지. 그저 기분 좋으면 부르고, 기분 안 좋으면 안 부르고, 답답하면 부르고, 조금 살만하면 안 부르고. 그건 수행이 아니에요. 그냥 여가로 그냥 하는 거지.
그러면 이런 법장비구의 서원, 48대원, 극락세계 아미타불원. 이런데도 다 대승수행의 원리에 의해서 경전이 설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금강경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의 원리,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했을 때,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어라. 일체중생을 다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한 중생이도 구제를 얻은바가 없다 하라.”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목욕하고, 이랬다고 나와서 “야, 내가 오늘 세수했다. 나 오늘 목욕했다.” 이렇게 자랑합니까? 안합니까? 안 하죠. “나 세수했는데 뭐 줄래?” 안하죠. 그런데 가끔 어린애는 그렇게 해요. 엄마한테. “나 세수했는데 뭐 줄 거냐?” 어리석기 때문에 그래. 어리다는 어리석다는 뜻이에요. 어른은 그런 사람이 없죠. 왜? 이건 누구의 일이니까? 내 일이니까. 남의 일이면 대가를 바랍니다. 내 일에는 대가가 없어요.
보살은 중생 구제하는 일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바라는 바가 없어요. 여기에 “세수했다” 이런 생각 없는 거처럼, 매일매일 세수하지만 “세수했다” 매일매일 숨 쉬지만 “나 오늘 숨 쉬었다.” 이런 얘기 안 하듯이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되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런 말 안 한다. 이런 생각도 안한다. 이렇게 우리가 정진을 해야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보살이라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보살, 보살이라고 다 불리고 있잖아. 그러니까 보살이라는 수행법이 바로 이런 수행법이다. 이런 관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바라밀 수행법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여러분들이 정진을 해나가야 한다. 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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