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보시물은 똑같이 나누어라./
자, 스님들이 부처님 당시에 탁발하는 거 한번 봅니다. 아침이 되면 탁발을 하러 나가는데, 몇 시쯤 나가야 될까? 즉, 거지가 남의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갈 때 몇 시쯤 가야 가장 적당할까? 자, 밥을 막 해서 풀려고 그러는데 거지가 와서 “밥 주시오.” 이러면 기분 나빠요? 안 나빠요? 나쁘지. "어디 아침부터" 이러죠.
밥 다 먹고 치우고 일 가려고 하는데 와서 "밥 주시오." 이러면 어때요? “올려면 좀 일찍 오지.” 이런단 말이오. 가장 적당한 때는 밥 먹을 때요. 밥 먹고 있을 때, 그때 밥그릇 들고 쓱 가면 안줄 수도 없죠. 먹다가. 그래서 늘 "때가 되었습니다." 하면 곧바로 밥 먹을 때란 말이오. 고때 가서 탁발하거든요.
그러면 어떤 집에 간 사람은 많이 얻어 온 사람도 있고, 어떤 집에 간 사람은 적게 얻어 온 사람도 있고, 어떤 집에 간 사람은 못 얻어온 사람도 있단 말이오. 다 돌아옵니다. 그것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먹는 게 아니오. 받아서 환지본처. 금강경에 그런 말 있죠. 예.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쭉~ 둘러앉으면 부처님 당시로 굳이 표현하자면
아난존자는 하얀 쌀밥을 많이 얻어오고, 마하가섭 존자는 밀기울 같은 아주 못 얻어오고, 어떤 사람은 빈 바리때 들고 오고. 그러면 둘러앉아서 다시 조정을 합니다.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에게, 안 얻어온 사람에게 주고, 또 환자라든지 이런 사람은 얻으러 못나가죠. 그런 사람은 그냥 먹습니다. 이렇게 나눠먹는 단 말이오.
보시물은 다 같이 나눠먹습니다. 왜 그럴까?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필요한 사람이 먹으니까. 필요한 사람이 쓰니까.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자, 이 보시 들어온 물건을 평등하게,
평등하다는 말은
똑같이 나눠쓴다는 이 똑같이가 평등하게란 뜻이고,
평등하게란 개념이
너도 하나 나도 하나,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평등의 개념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쓰는 게
평등의 개념이에요. 불가에서는.
그러니까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은 밥을 좀 많이 먹어야 되겠죠. 어린아이는 좀 적게 먹어야 되겠죠. 어른은 하루 한 끼 먹지만, 어린아이는 자랄 때 두 끼 먹어야 되겠죠. 거기에 맞게 먹는 게 평등한 거지, 똑같이 한 끼 먹는다. 똑같은 양으로 먹는다. 이게 평등한 게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점심 바루공양 때도 그렇잖아요. 평등공양을 어떻게 하느냐? 똑같은 양으로 일단 한 주걱씩 딱 퍼줍니다. 쭉 퍼줘.
그리고 남는 것을 내려 보냅니다. 그러면 그 최소한도의 양을 가지고 만족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남는 게 내려가니까 그다음부터는 더 먹고 싶은 대로 밥 먹어도 된다 이거야. 왜? 누구나 다 최소치는 먹었기 때문에. 이해하시겠어요? 배분방법? 예. 사람이 10명이 있는데, 물건이 15개가 있다. 그러면 하나씩 쪽 돌리고 나머지 5개를 그냥 돌리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한다. 이런 방식이에요.
자, 이러니까 이게 뭐요? 경제적인 평등이죠. 우리가 경제정의라는 게 뭡니까? 가진 자는 많이 가지고 없는 자는 없고. 이렇게 되니까 사회가 갈등이 생기죠. 온갖 사회의 부조리와 갈등이 빈부격파가 심해서 그러잖아요. 한쪽에는 굶어죽고, 한쪽에는 음식이 썩어나가고. 지금 이런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이 경제적인 평등을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말하는 주의를 굳이 말한다면 평등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죠. 사회주의가 원래 이게 좀 평등하게 나눠쓰자. 이런데서 나왔죠. 그런데 그 나누는 것을 독재로 해서 나누자 하는 게 뭐요? 이게 공산주의 아니오. 그죠? 그 나누는 것을 민주적으로 의논해서 서로 의견을 맞추어서 필요한 것을 나누자. 이게 사회 민주의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이런 말 하죠.
오늘날 사회주의가 망한 게 아니에요. 오늘 영국이나 독일이나 EU라고 말하는 유럽공동체의 대부분이 지금 정치체제가 사회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좀 평등하게 나누자. 이런 얘기에요. 이런 정신은 부처님의 상가에서 이미 2500년전에 다 이루어졌던 얘기요. 그것이 대대로 또 전수되어 내려왔던 거거든요.
그러면 저희들도 한번, 저의 절을 볼까요? 우리 절에 한 50명이 삽니다. 그런데 50명이 다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사는데, 대중 앞에서 얼굴을 떡 내밀고 법문이나 하고 인사나 받고 하는 것은 주로 누가 합니까? 법륜스님이 하죠. 그러니까 절에 보시물이 들어올 때, 주로 여러분들이 선물 하나 하고 싶다하면 여기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저 식당에 있는 분한테 선물을 하고 싶겠어요? 법륜스님한테 하고 싶겠어요? 법륜스님한테 하고 싶겠죠.
그러니까 “스님, 빵 드세요.” “스님, 양말 이거 사왔습니다.” “스님, 차 사왔습니다.” 이렇게 준단 말이오. 그럼 내가 받았으니까 내 거죠. 그래서 내 방에는 늘 먹을 거, 입을 거, 좋은 거, 가득 있단 말이오. 그런데 부엌에서 공양 짓거나 저 뒤에서 청소하는 사람은 1년 가봐야 누가 양말 하는 갖다 주는 사람도 없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사실은 절이 유지되는 데는 밥 짓고 청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히려 유지가 된단 말이오. 그러면 월급이라도 많이 주면이야, 월급 때문이라도 살지만, 이 절에는 월급이 없습니다. 이 절에는 어떤 사람도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다 그냥 산단 말이오. 그러면 같이 살아보니까 처음에는 좋다고 들어왔는데 살면 불만이 생길까? 안 생길까? 생기겠죠. “그래, 니 혼자 다 해먹어라.” 이러고 가버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들어오는 물건은 “이거 스님 꼭 쓰세요. 딴 데 주면 안 돼요. 꼭 쓰세요.” 요렇게 주는 것도 있고, 어떻게 주든지 그것은 정토회에서, 이 상가에서 내가 맡은 역할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로 오는 거지, 내가 잘나서 오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돈이든 그것이 다른 것은 다 모아야 된단 말이오. 돈은 사무처에서 모으고, 물건은 어떤 사람은 또 섭섭하니까 방에 또 며칠 놔놔야 되겠죠.
이렇게 해서 가만히 모아놨다가 일정한 수, 양말 같으면 사람이 30명 산다하면 20켤레가 여기저기 들어온 것을 모아서 한 켤레씩 나누면 되겠죠. 또 신도가 주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개인이 주는 것도 있어요. 여기 들어온 사람 중에도 부잣집 아들도 있고 가난한집 아들도 있을 거 아니오.
그러면 부잣집 아들이나 딸은 부모가 와서 호주머니에 뭘 자꾸 찔러주고 간단 말이오. 스님들 중에도 세속에 부잣집 아들도 있죠. 그런데 어렵게 성장한 사람들은 일가친척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경우가 없단 말이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자기는 커피도 마시고 뭐도 쓰고 용돈을 펑펑 쓴단 말이오. 여기서는 물론 월급을 안주지마는, 어쨌든 개인이 쓰는 거란 말이오. 이래도 화합이 깨지겠어요? 안 깨지겠어요? 깨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에게 세속 가족 쪽에서 들어오는 것마저도 한쪽으로 모아서 써야 된단 말이오. 여러분들이 스님이 재를 지내주면 반드시 재주는 고맙죠.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재를 지내주니까. 그러니까 꼭 법주스님한테 봉투를 드린단 말이오. 그러면 다 누가 가집니까? 개인이 가지죠. 대웅사찰에서. 그런데 여기서는 개인이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저 위에서 청소하고, 어떤 사람은 저 위에서 전화 받고, 어떤 사람은 뭐 했다하듯이 스님은 여기서 목탁 치는 역할을 달리했을 뿐이란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면 여기서 보면 초파일날, 여기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고, 큰 스님이 요 위에 계시니까 초파일날 사람 모자란다 해서 한 5명 거기 보냈단 말이오.
그러면 큰 스님이 수고했다고 다 5만 원짜리 10만 원짜리 봉투를 준단 말이오. 그러면 자기가 가지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바깥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뭐에요? 봉투 하나씩 받아오고 이러죠. 이것도 또 불화의 요인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러면 이게 가만 놔놓으면 사람이 나중에 돈이 궁하면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서로 가려고 그럴 거 아니오. 이렇게 받아오는 것도 다 사무처로 들어가죠.
그래서 주로 여기서는 신도님이 낸 것은 사무처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집에서 개인이 오거나 개인이 어디 가서 강의를 하면, 내가 어디를 가서 강연을 하거나 TV출현했거나 해도 다 들어오겠죠. 누구든지 다. 그런 것도 다 한쪽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내부에 약값으로 쓰든지 이렇게 쓴단 말이오. 이렇게 균등하게 나누면 불화가 없지만, 이게 그렇지 않으면 불화가 생깁니다.
그러면 지금 가정집에서도 이런 불화가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죠. 돈을 다 아들딸이 필요해서 같이 씁니까? 아니죠. 애가 오토바이 사달라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2가 말이오. 그런데 다른 애는 다 사주는데 왜 우리 집에서는 안 사주나? 이렇게 애가 우긴다는 거요. 그래서 내가 “사주에요.” 이랬어요. “사주면 애가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사주지 말지 뭐.”
“안사주면 자꾸 사달라고 울고불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꼭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요.” 이랬어. “아, 스님 시키는 대로 하죠.” “내 시키는 것은 어려운데요.” “그래도 하겠습니다.” “보살님 차 뭐타고 다녀요?” “그랜저.” “네. 오늘부터 보살님 자가용을 없애든지 프라이든 타고 다니십시오.”
그러면 애가 “딴 집에는 오토바이 사주는데 왜 우리는 안 사주냐?” 이런 일은 안 생깁니다. 아이 교육을 제대로 시키려면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야 되요. 다 오토바이 사는 건 아니에요. 자기 친구 몇몇이 샀어. 그런데 엄마나 아버지는 좋은 차타고 다니고, 자기 친구들 아빠보다 더 좋은 차타고 다니면서 그 집에는 오토바이 사주는데 왜 나는 안 사주냐? 이렇게 되는 거요.
부모가 정말 절약해서 살고, 검소하게 살고, 옷도 떨어진 거 기워 입고 이러는데 애가 오토바이 사 달라 우기겠어요? 그렇게 안 돼요.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 문제의 해결이 금방 찾을 수가 있는데,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자꾸 문제를 풀려니까
해결책이 안 나온다 이거야.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하면 딱 들으니까 “아, 우리나라 스님들이 이래야 되는데, 조계종단이 이래야 되는데.” 이 생각만 하죠. 그러면서 “우리 집이 이래야 되는데.” 이 생각은 안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법문을 딱 듣고 “아, 참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법문을 들으면서 “우리 남편이 저 얘기를 들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도 이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거요.
부처님의 법문은
내가 어떻게 할 거냐? 이거요.
부처님 이렇게 가르치니
너 이렇게 해라.
이게 불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상은 본래 다 이익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중생계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 승단도 중생계 안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는 아, 그렇게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가해서 또 부처님 바른 가르침으로 살아가려니 우선 누구만이라도 나만이라도, 우리 단체만이라도 그렇게 안 되도록 한번 해보자. 여러분들 가정만이라도 이 상가가 공동체니까 “아,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내 가정만이라도 이렇게 먼저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다 잘되면 여러분들이 다니는 회사나 직장이나 절에서 신도회에서나 이렇게 확대를 해가 보면 되겠죠. 그런데 자기는 빼고 늘 다른 데 가서 이거 들고 와서 “부처님 이랬는데, 스님 이거 왜 안 지킵니까?” 이렇게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들이 신도들 공부시켜 놓으면 골치 아프다 이럽니다. 요구조건만 많다 이거요.
자, 그러니까 현대사회에서도 가장 이상을 지향하는 사람들, 세속사람에도 사회가 법에 의해서 통치가 되고 모든 국민이 똑같이 다 권리를 갖고 의견을 맞추고, 그 다음에 경제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이것이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요인이오. 이게 잘 갖추어진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이게 다 불법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괜히 법조문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3가지만 지켜져도 나라가 아마 조용할 거요.
/4번째, 같은 장소에 모여 살아라./
요게 조금 아마 이해 안 될 수가 있는데, 어떻게 다 한데 모여 사나? 이러는데, 이것은 공동체라는 뜻이오. 공동체. ‘모여 살아라.’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사적으로 흩어지지 말고 공동체를 형성해라. 그럼 사적으로 흩어져 사는 삶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경쟁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승리하고 누군가가 패배하고, 누군가가 성공하고 누군가가 실패하는 삶이고,
공동체란 뭐냐?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족은 공동체요? 아니오. 공동체죠. 이 공동체 안에서는 니꺼 내게 없지 않습니까. 자식들이 잘되는 게 부모가 잘되는 거고, 남편이 잘되는 게 아내가 잘되는 길이죠. 남편 잘되는 게 아내가 불행해 지는 길이고 이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가족 안에서도 자기를 서로 세우니까 남편이 잘 되는 게 아내가 잘못되는 그런 케이스가 생기죠. 그래서 소유권도 서로 가지려고 하니까, 남편 쪽으로 많이 가면 아내 쪽으로 적게 오고, 이게 세속적인 거란 말이오. 그런데 그게 진정한 공동체가 되면 이게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바로 그 전체가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는 거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거다.
그러니까 가족 공동체는 한집에 살아요? 떨어져 살아요? 한 집에 살아요. 공동체는 같이 살아요. 남편이 뭐하는지 아내가 뭐하는지 서로 다 보고 살아야 된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남편은 저 집 얻어서 따로 살면서 가끔 집에 한 번씩 옵니다. 예. 가끔 한 번씩 온단 말이오. 그리고 남편은 내가 어이 사는지는 다 아는데, 나는 남편이 거기 뭐하고 사는지는 전혀 몰라. 이러면 갈등이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생기죠. 불만이 생겨요. 불신이 생긴다.
그래서 모여 살아라. 이런 말은 옛날에는 정말 다 볼 수 있는 한 울타리에 모여 살아라는 얘기고, 지금은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각자 자기가 사는 삶의 정보를 다 공개하고 살아라. 이 말이오. 요즘 유식한 말로 하면 뭐가 될까? 투명성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투명성. 속이 훤히 보이도록, 돈을 어떻게 썼는지 훤히 보여야 되겠죠.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뭐 먹는지, 어떤 사람이 주로 오는지,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런 거 국민이 알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게 투명성이란 말이오. 그게 같이 사는 거란 말이오. 정치인들이국회에 앉아서 저희끼리 뒷방에서 쑥덕쑥덕 패 가르지 말고, 요즘 회의할 때도 카메라로 직접 방송을 하자. 이런 얘기 있죠. 그거 뭐요? 너희 뭐하는지 우리 좀 보자 이 말이오. 무슨 짓 하고 있는지.
그리고 요즘은 거기다가 감시하고 감독하는 민간단체가 들어가서 평점도 매기고 그러죠. 이게 이 얘기요. 이게 같이 모여 사는 것과 같은 거다. 정보를 소수의 사람만이 움켜쥐고 공개하지 않고 비밀주의로 살지 말고, 다 서로 알도록 살자. 이렇게 서로 다 알도록 살면 어떤 일이 있을까? 비밀주의로 살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게 이롭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에 손해가 나는 일이 계속 될 수 있지만,
만약에 전부다 공개가 되어버린다면 결국은 이게 어떻게 흘러가겠어요? 어느 부분에는 이익이 되고 어느 부분에 손해가 되는 것은 계속 될 수가 없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선이 되는 거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뭐가 된다? 선이 되는 거요. 그런데 인류에게 양심 있죠. 양심이라는 이게 공동성이란 말이오. 양심이 왜 생겼겠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류학적으로 따지면
구석기시대, 원시 공산체제라고 하는 30명 정도 무리를 지어서 짐승처럼 몰려다니는 그런 생활을 한 100만년 했거든요. 100만년이나. 그때는 다 보고 살았어요? 가리고 살았어요? 다 보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다 보고 살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로운 것만이 선이 되고, 그것이 후손에게 어떻게 됩니까? 전수가 된단 말이오.
모두에게 이로운 것만이 다른 사람에게 전수가 되는 거요. 그렇지 않은 것은 전달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류의 양심이 그런 조건에서 생긴 거거든요. 그것은 또 나중에 얘기할 수 있은 시간이 있으면 할게요.
자,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라. 즉, 정보를 공개해라. 비밀주의로 살지 마라.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게 다 그런데서 생긴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 되는 그러한 가치관이 형성이 된다.
/5번째,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자, 아무리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일을 해줘도 말을 잘못하면 복 다 까먹습니까? 안 까먹습니까? 까먹죠. 그래서 천냥 빚도 말 한마디에 갚는다는 말이 있고, 또 지어놓은 복을 말 한마디에 까먹는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돈을 백만 원 주면서 "아이고, 이 그지 같은 게 맨날 이렇게 얻어나 먹고, 그래 줄 테니까 실컷 얻어먹어라." 이러면서 백만 원을 주면 기분이 좋을까? 나쁠까? 기분이 나쁘겠지.
그러니 앞에 것을 다 지킨다고 해도 서로 말을 사납게 하고, 욕설을 하고, 비난을 하게 되면 이게 불화가 생긴다. 말을 자비롭게 해라. 말을 자비롭게 하려면 고상한 말을 쓰려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바로 자비심이 있어야 되겠죠. 사랑이 담겨 있어야 된다.
그러면 사랑 하는 마음을 내서 말한다고
말이 자비롭게 되느냐? 아닙니다.
정말 자비로운 말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려면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해 위해선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이지,
이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맹목적 집착이다.
여러분들 내가 싫다는데도 남자나 여자가 좋다고 죽어라하고 따라다니면 귀찮아요? 안 귀찮아요? 귀찮죠. 괴롭죠.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죠. 사랑이오? 아니오? 사랑이 아니잖아. 왜? 나를 이해하지 않고 덤비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거의 대부분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자기 뜻대로 될 때는 사랑이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미움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애가 변해서 뭐가 된다? 증이 되는 거요. 애가 증이 된다는 것은 그때 애나 증이나 다 똑같이 집착입니다. 자기 식대로 하겠다고. 자기 식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식대로 안 되면 미워하고.
그러니까 자기 식대로 하겠다는 것을 놓아버린, 타인을 이해하는 위에서 바로 사랑을 해야 그것이 증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북한에 뭘 보낼 때도, 정말 북한 사람이 굶주리고 아픈 것을 같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보냅니까? 아니죠. 그렇게 안보내기 때문에 보내주고 15만 톤 주고 뺨때기 한대 맞았다고 엄청나게 화를 내서 대통령 그만둘 때까지 봉쇄정책을 쓰고, 압박정책을 쓰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죠.
우리도 지금 남 주고 지맘에 안 들면 어때요? 탁 끊어버리죠. “그러면 그만 둬.” 탁 끊어버려요. 이게 왜 그러냐? 자기 식대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화를 내고 이런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쪽의 이해, 그의 아픔을 이해위에서 여러분들이 사랑을 베풀면, 이것이 증으로 바뀌지 않는다.
설령 잠수함을 샀다하더라도 무장간첩이 침투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민중은 굶어죽고 있어요? 안 굶어죽고 있어요? 굶어죽고 있죠. 내가 보낼 때는 굶어죽는 사람을 위해서 보냈지 군인을 위해서 보낸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군인이 내려오면 막고, 잠수함이 내려오면 잡고, 그것은 그것대로 하되 배고픈 사람에게 주는 것은 주고 이렇게 해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되죠. 그렇게 안 된단 말이오.
이것이 우리가 이해 없는,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늘 증오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자비롭게 말하라. 서로 부드럽게, 그리고 진실을, 이렇게 말하는 기초의 가장 밑에 기초는 뭐다? 상대를 이해하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를 이해하는 거다.
/6번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남의 뜻을 존중하라는 것은 의견을 맞추어라라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좀 틀립니다. 의견을 맞추는 것은 의견이 서로 다를 때 그 의견이 어떤 것이 더 나은 의견일까를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맞추어 나가는 거고, 남의 뜻을 존중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틀렸든 옳든, 그 사람을 존중해라. 이런 얘기요.
예를 든다면 저 같은 사람에게 제일 안 된다면 6번이 오히려 잘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어떤 일을 할 때, 우리 여기 행자님들이 "스님, 이러면 어떨까요?" 이렇게 의견을 냈는데, 내가 보니까 얼토당토 않는 의견이야.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야야야, 치워라. 치워. 너 대학이나 나온 게 생각이 그렇게 밖에 안 돌아가나?" 내가 만약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자기 의견이 가만히 스님 말을 보니 자기 의견이 틀리기는 틀렸어.
틀려도 기분이 나쁠까? 안 나쁠까? 기분이 나쁘다 이 말이오. 틀려도 기분이 억수로 나쁘다. 왜?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시당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뜻을 존중해주라는 거요. 틀리고 옳고 전에 일단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견해가 생겼으니까 그렇게 말했을 거 아니오,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 주고, 잘못했다 싶으면 이렇게 이렇게 잘못했다고 지적을 해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살면 안 그러죠.
경험이 많고, 또 지위가 높고,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이런 게 쉽습니다. "자식, 되도 않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렇게 나아가기가 쉽다. 제가 언젠가 부부 상담을 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조사도 하고. 이런 것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부부가 같이 왔어요. 남편 10명은 이쪽에 모이고, 부인들 10명은 이쪽에 모여서 아내들에게 어떨 때 가장 섭섭하냐? 남편이 어떻게 할 때.
또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게 뭐냐? 반대로 남편들에게는 당신이 어떻게 했을 때 아내가 가장 섭섭하다고 생각하느냐? 당신 아내는 당신에게 뭘 가장 해주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했을 때, 그때의 몇 번한 샘플에 있어서는 남편은 자기 아내가 남편들에게 뭘 제일 해주기를 원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 남자들이 생각할 때. 우리 부인이 나한테 뭘 제일 원하는 거 같아? 남편들은 대부분 돈이라고 생각 합니다.
부인이 남편한테 가장 원하는 게 물론 사람마다 좀 다르지만 다수가 돈을 일단 벌어올 것을 가장 원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부인들은 무엇을 남편에게 가장 원하느냐 했을 때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 이게 1번이 아니에요. 동의합니까? 그래서 서로 안 맞아요. 이게. 한참 안 맞아요. 서로가.
그런데 자기를 한 사람으로 존중해 달라. 이게 부인들의 가장 다수의견이었어요. 그리고 어떨 때 가장 섭섭했느냐? 하는 케이스에 가장 다수는 아들이나 딸이 있는, 자식이 있는 앞에서 무시했을 때. 그때 제일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 이 숫자가 제일 많았어요. 개인마다 다 케이스가 다른데.
아들하고 딸이 다 같이 있는데 아내가 “여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네가 뭘 알아?” 이렇게 탁 했을 때, 굉장히 상처가 많고 섭섭하다. 여기 앉아있는 거사님들 이해가 잘 안되죠. “그만한 일에 뭐가 섭섭하노?” 이렇게 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엄마는 뭡니까? 부처님이며 하나님이며 스승이며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 앞에서 엄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밟아버렸을 때, 가장 상처가 크다는 거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분들이 적겠지만, 하하하.
그러니까 서로 이렇게 조금씩 다르다. 이거요. 그러니까 존중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한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일정한 존중을 해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존중을 해주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게 된다.
자, 이렇게 6가지를 잘 살펴보면, 그 중에 뭔가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하면 지금은 조용할지 몰라도 여기에 불만이 불화가 생길 거다. 또 지금 불화가 생기고 있다 그러면 이 6가지 중에 뭔가 한두 가지나 아니면 전부다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보고 “화합해라. 화합하자.” 이렇게 하지 마라. 이 말이오.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 6가지 지켜지지 않는 부분을 지켜나가도록 서로 애를 쓰면 저절로 화합이 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르쳤습니다. 대부분 동의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죠. 어려운 얘깁니까? 쉽잖아요. 절대 복잡한 애기가 아니다. 그러니 괜히 헌법조문 많이 만들고 법조문 많이 만들지 말고 이 6개라도 제대로 딱 정해놓고 지키면, 나라도 편안하고 여러분들 가정에도 이 6가지 조문을 지키도록 노력을 해보고, 저희 정토회에서도 그렇고, 모든 데에서 이렇게 지키도록 애써가는 과정에서 바로 상가는 즉, 공동체는 청정하고 화합해진다.
조금 바쁘지만 한 번 더 읽읍시다.
부처님은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6가지 화합 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6가지 화합하는 법이 있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하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추어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은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해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 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계율을 따라 무리를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뜨리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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