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제 39페이지 펴주시구요, 먼저 프린터물 앞에 있는 불해,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가 있다. 즉, 사람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다 자신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뒤집어 말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람은 자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 오늘 부터는 불교의 어떤 가치관, 불교에서 말하는 도덕, 윤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그런 상태 하에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에는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이것은 맞고 이것은 틀리고,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고, 이것은 아름답고 이것은 추하며, 이것은 깨끗하고 이것은 더러우며, 이렇게 이 세상에 사람의 말이나 행동, 생각,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존재들에게는 옳고 그르고, 선이고 악이고, 깨끗하고 더럽고, 신성하고 부정하고, 귀하고 천하고 이런 것들이 있다. 우리가 늘 지금 보고, 또 삶속에서 판단을 해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깨달은 상태에서 보면, 그 본질이 텅 비어 있어서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불교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불교인들은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그러니 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겠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인들은 아무 행동도 안하고 손도 묶어놓고, 발도 묶어놓고, 가만히 있어야 되겠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 세상에 발 한 자국만 떼면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렸는지 끊임없이 판단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거 뭐 전부다 공하다 이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런 의심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 3일 동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 주로 다루려고 합니다. 법의 실상은 공하다. 여기는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고,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고, 이런데 공하다니 이게 무슨 얘기냐? 그것은 얘기를 들으며 쉽게 이해가 되는 편이죠.
정신을 차리고 하나하나 분석하고 따지고, 이 경우 저 경우, 이 사람 저 사람의 경우 다 고려해보니까 사실은 어떤 것을 선이다. 어떤 것을 악이다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시간적으로 전 인류역사를 살펴보고, 온갖 사람들의 집단 사람들의 종교 다 고려해보세요. 우리가 귀하다는 게 다른 지역에서는 천하다가 되고. 우리가 옳다 하는 게 같은 지역 안에서도 저 옛날에는 천한 게 된다.
즉, 신라시대에는 순종을 만들기 위해서 같은 혈통끼리 결혼을 했죠. 같은 혈통끼리 결혼을 해야 순종이 되요. 지금도 그런 게 있어요. 진돗개는 진돗개끼리 해야지 그래야 순종이지 다른 피가 섞이면 잡종이 된다. 그러니까 김 씨는 김 씨끼리 해야 순종이 되지 거기 박씨나 이런 게 섞이면 잡종이 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제일 순종끼리 한 게 뭐다? 성골, 거기 중간에 내려오다 어머니 쪽이 약간 잡종 피가 섞이면 진골, 이렇단 말이오. 그 다음에 잡종들은 따질 것도 없고, 성진골에 못들어 가는 거고, 그러니까 그것은 아예 왕위에 오를 수가 없단 말이오.
그런데 이조시대에 오면 어떻습니까? 같은 피는 고사하고, 성만 같아도 결혼하면 완전히 짐승같은, 짐승이나 그러지 사람이 어디! 이렇게 해서 오히려 같은 성이나 동성동본끼리 결혼하면 그것은 짐승취급을 받고, 오히려 그렇지 않게 결혼을 해야 아, 그것은 순수하고 도덕적이다. 이렇게 평가를 받는단 말이오. 틀리잖아요.
우린 지금 형님이 어머니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동생이 어머니 모시죠. 큰 문제없죠. 안 모시면 뭐가 됩니까? 불효막심한 놈. 그런데 형님이 돌아가시고 형수가 혼자 살면, 동생이 그 형수도 모셔야 될 거 아니오. 데려와서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예. 그 짐승 같은 놈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도 옛날에 고려시대 보면 형사취수제도가 있단 말이오. 형이 죽으면 동생이 취한다. 이 말이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그런 나라에는 지금도 있단 말이오. 이상한 놈들이냐? 아니다. 거기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부인으로 맞아들여야 그 형의 아들들, 또는 동생이 죽으면 그 재수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여야 그 동생의 아들들마저도 다 누구 아들이 된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죠.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형님이 부모님을 모시다가 돌아가시게 되면 동생이 당연히 부모님을 모시는 것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안 그러면 거기서는 뭐가 된다? 나쁜 놈이 된다. 형제를 외면하고 형에 대한 의리가 없는 놈. 이렇게 된단 말이오. 이런 게 한두 가지겠습니까?
불교에서 선인 것이 기독교에서 악이 될 수도 있고, 기독교에서 선인 것이 이슬람에서 악일 수도 있고, 힌두교인들은 절대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는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신성한 것을 먹는다는 것은 부모의 육신을 먹는 것보다도 더 나쁜 놈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민들은 소고기를 먹거든요. 그것은 아예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 것들, 아예 포기한 인생들이니까 그것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절대 안 먹습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은 또 돼지고기하고 닭고기를 안 먹어요. 왜 그럴까? 그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이어서. 그 고기 자체가 아주 부정 타는 거라서 그것을 먹게 되면 이 육신이 더러워져서 영혼까지도 더러워져서 절대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 사람들 돼지고기 입에 갖다 대면 그것은 정말 죽기로 거절을 합니다. 안 먹고 죽으면 천당이라도 가는데 그거 먹었다가는 못 간단 말이오. 그런데 그런 고기를 먹는 인간을 보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죠.
그런데 회교도들은 소고기를 먹고, 힌두교들은 돼지고기를 먹는다면 서로가 볼 때 인간 아닌 것들이죠. 인간 아닌 것들은 어떻게 해버려도 된다? 죽여 버려도 되요. 그럼 살려 놓을만한 가치가 별로 없잖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그것은 살아있으나 뭐가 없는 사람이다? 혼이 없는 사람이오. 혼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거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죽여 버려도 되요. 아무런 죄가 안 돼요.
그래서 다 전쟁을 그렇게 극렬하게 하는 거요. 유교에서는 조상을 잘 숭배해야 되지 않습니까. 조상이 있어서 내가 있다. 조상을 모시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아니에요. 조상을 모시지 않는 그것은 짐승보다 못한 것들이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죽여도 괜찮아요.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제사를 안 지낸단 말이오. 부모 묘에 가서 절을 안 한단 말이오. 그런 것은 죽여 버려야 돼. 그것은 인간으로서 값어치가 없는 사람들이오. 그렇기 때문에 다 천주교 믿고 제사 안 지내니까 죽여 버린 거요. 여러분들이 그 당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아이고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죽이나?” 이럴지 몰라도 여러분들 그 당시에 태어났다면 “저런 인간은 죽여야 돼.” 한 가닥씩 참가했을 사람이고 그런 재판을 다 했을 사람들이오.
그런데 사상이 다르다고 "아, 이 세상은 이래야 된다."하는 그 사상이 다르다고 죽였잖아. 그죠? 저 빨갱이다. 빨갱이라는 게 뭐요? “아, 이 세상은 평등하게 나눠먹어야 된다. 안 그러면 내거 네게 없다.” 이런 주장하면 빨갱이란 말이오. 그것은 죽여 버려야 돼? 안 죽여야 돼? 그런 것들은 죽여 버려야 돼. 그런 것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인권탄압에 안 들어 가. 그것은 양심수 명단에 안 들어가요. 왜? 그것은 빨갱이니까.
빨갱이가 어떻게 양심수 명단에 들어가요. 우리가 지난 인권을 해와도 빨갱이는 양심수 명단에 안 들어갔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빨갱이는 죽여야 된다 해서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이조시대 때, 조상제사 안 지내는 것 보고 “저런 인간 천인 공로할 그런 인간 죽여야 된다.” 하는 거나 “빨갱이 죽여야 된다.”하는 거와 마찬가지란 말이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사람 죽이는데 알게 모르게 다 동참했어요. 그 잘난 판사들이 다 사형판결 내린 거요. 도둑질하고 강도한 것은 그래도 어때요? 죄가 몇 명에 미치지, 빨갱이는 어때요? 이것은 죄가 엄청난 거요. “너 간첩, 빨갱이” 이렇게 규정 받아들이면 고문을 하든 죽이든지, 아무도 거기는 인권운동도 못해요. 했다가는 같이 가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회교도 힌두교 싸우고, 기독교 회교 싸우고, 사람 죽이고 종족이 다르다고 다 죽이고, 세계 신문에 나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야, 아직 저 무식한 놈들이다.” 하지만,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볼 때 정말 무식한 사람들이오. 사상이 다르다고 사람을 20몇 살에 감옥에 집어넣어 40년씩 감옥에 쳐놓고, 그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오. 그런데 우린 다 그거 보통으로 생각하잖아.
빨갱이 간첩, 당연히 그런 놈 죽여버려야지. 살려놓은 것만 해도 큰 복이죠. 이렇게 다 자기 나름대로 가치관이 있단 말이오. 종교나 민족이나 또는 지역이나 이런 거에 따라서 아주 작게는 부부간에도 견해가 다르고, 크게는 이렇게 달라서 선이니 악이니 하지만, 조금만 찬찬히 살펴보면 다 그게 사람들의 생각이오.
여기서 무서운 것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은 오히려 해독이 적고, 사람사람이 생각이 같은 것은 해독이 커요. 아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안경을 다 비슷하게 끼면 안경 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를 못해. 그게 곧 진리다. 다수면 진리다 이런 게 우리한테 있거든요. 그래서 부부가 싸우거나 누구하고 서로 싸우다가 누가 맞다 맞다 이렇게 되면 억울하죠.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길가는 사람 다 잡고 물어봐라. 누가 맞는고.” 이런 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옳다. 그러니까 다수를 확보하려는 거요. 그래서 부부가 싸우면 아내는 밀리면 누구라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돼. 5살 7살짜리도 애도 자기편으로 만들어 다수를 해야 돼. 그래서 그런 애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니까 이 꼬마들이 엄마말만 듣고 아빠에 대해 복수심이, 이거잖아. 이렇게 해서 다 고만고만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거요.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 입장에도 서서 이렇게도 보고, 이렇게도 보고, 전체적으로 보고, 길게 보고, 이렇게 보면 옳다할 것도 없고 그르다할 것도 없다. 다만 서로 다르다. 차이가 난다. 높다 할 것도 없고 낮다 할 것도 없고 서로 다르다. 귀하다할 것도 없고 천하다 할 것도 없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것을 두고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붙여서 하나는 높다하고 하나는 낮다하고, 하나는 귀하다 하나는 천하다. 하나는 아름답다하고 하나는 추하다. 하나는 깨끗하다 하나는 더럽다. 하나는 옳다 하나는 그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마치 정말 옳고 그른 게 있고 아름답고 추한 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딱 세뇌 되어 있단 말이오.
자, 그러면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아름답고 추한 것도 없다. 그것은 다 사람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생각, 그의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더 말하면 마음에서 생긴 거다.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거다. 이것을 원효대사께서는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으셨죠. 저녁에 깜깜해서 보이지 않고 더듬을 때 목이 말라서 바가지가 하나 있어 그거 갖고 물을 떠먹었더니 꿀맛이었어.
아침에 일어나 훤한데 눈뜨고 생각해서 물 또 떠먹으려고 바가지를 보니까 해골이오. 그러니 구역질을 했다. 어제 저녁의 물은 청정한 물이고, 오늘 아침 물은 더러운 물이냐? 아니잖아. 똑같은 물이잖아. 똑같은 물인데 왜 어제 저녁에는 그렇게 달콤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구역질을 할까? 이게 만약에 어제는 박바지에 담겼고, 오늘은 해골바가지에 담겼으면, 어제는 박바가지에 담긴 게 깨끗한 거고, 오늘은 해골바가지에 담겨 있으니 더럽다 하지만, 똑같은 해골바가지 였단 말이오.
그러니 여기서는 내 마음에 있다하는 게 너무나 분명해 졌단 말이오. 늘 일체는 다 마음이 짓는 바다 하고 일찍이 화엄경공부를 하면서 늘 읽었지만, 그냥 그렇게 옳거니 이렇게 생각했지, 오늘처럼 이렇게 현실 속에서 탁! 체험한 적은 없었단 말이오. 얼마나 좋았겠어. 그래서 일어나서 끄덕끄덕 어깨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단 말이오.
한 생각 일어나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
일체가 마음가운데 있는 것이구나.
마음이 짓는 바구나.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라면 진리를 구하러 중국에 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 놀러간다면 모를까. 그래서 진리를 찾아 어디 간다. 뭘 본다. 이러면 불교인은 벌써 웃기는 사람이다. “어디 왜 가냐?” “놀러갑니다.” 이래요. “눈요기하러 갑니다.” “공부하러 갑니다.” 이러지 말고. 그래서 돌아온 거요.
자, 그래서 존재 그 자체는 어떠한 실체도 없다. 이것을 뭐라고 한다 그랬어요? 제법 무아. 제법 무아. 또는 대승불교에서는 공. 제법개공.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공하다.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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