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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준비한 테마는요.
진짜 재미있는 테마이고
뭐 언제는 안 재밌는 게 있었을까요?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테마입니다.
바로 ‘물질이라는 것은 의식으로부터 온다’라는 명제를
한번 증명해 보려고 그래요.
테마는 물상과 심상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겁니다.
물질이 어떻게 의식으로부터 오게 되는지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거예요.
수많은 종교 경전들의 가르침이나
아니면 깨어난 많은 그 스승들의 가르침을 보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의식이다
의식이며 마음속에 나타난 심상하고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이에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는지
단순히 깊은 수행을 통해가지고 직관적으로 알려지는 앎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간단한 방식으로 사유를 통해서 알아보는 거예요.
오늘도 역시 여러분들이 충분히 사유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상 vs 상 vs 상
여러분 우리나라 말 중에 ‘상’이라는 말이 있죠.
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예전에는 한문하고 한글을 혼용했었어요.
이유가 뭐냐면
우리나라 말에 유독 ‘동음이의어’가 많습니다.
이게 뭐냐면 발음은 같은데, 뜻하는 그 내용이 다른 단어들의 경우에요.
예를 들어볼게요.
배
일단 배 하면 생각나는 게 뭐가 있죠?
-우리 인체에 이 배 있고
-먹는 배 있고
-그다음에 바다에 띄워서 타는 배가 또 있죠.
이런 식으로 배라는 단어 하나만 해도 서너 가지의 뜻이 존재해요.
눈
눈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예요.
-이 눈, ‘보는 눈’ 있죠. 이 눈하고 또 뭐가 있죠?
-하늘에서 내리는 눈
-그다음에 어떤 ‘곡식의 눈- 쌀눈’ 그런 것도 있잖아요.
발음은 같은데 지칭하는 내용, 그 뜻이 다른 단어들이에요.
이처럼 ‘상’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말로 동일한 단어인 ‘상’을 뜻하는
한문 단어 3개를 한번 알아볼게요.
첫 번째는 ‘형상 상狀(모양 상)’이에요.
이 형상 상자는 보통 ‘물상’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물질적인 형상이라는 뜻이죠.
정의를 하자면
‘고정된 실체적 형태를 가진 사물’
아니면 오감을 통해서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특정한 시공간의 좌표 안에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들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현실의 공간에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상’들이
‘물상’이 되는 것이고
이 물상을 지칭할 때는 한문으로 ‘형상 상’자를 써요.
두 번째 상자는 ‘서로 상相’자예요.
이 서로 상자 상대성을 말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형상 상’자보다 오히려 경전 등에서는
인식의 모든 대상을 지칭할 때 이 ‘서로 상’자를 써요.
‘형상 상’자보다 이 ‘서로 상’자가 더 많이 쓰여요.
또 뭐가 있나 ‘생각할 상想’자가 있습니다.
이 ‘생각할 상’자는 다른 게 아니에요.
서로 상자 상대성을 말할 때 쓰이는 이 ‘서로 상’자
동시에 인식의 대상을 지칭하는 이 ‘서로 상’자에다가
밑에 ‘마음 심’자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합쳐져 있어요.
‘생각할 상’자는 심상을 뜻하는 용어예요.
여러분들이 경전 같은 거를 나중에 공부하고 보신다면은
같은 ‘상’자더라도 ‘서로 상’자 밑에 ‘마음 심’자가 들어가 있으면
이거는 ‘심상을 지칭하는 단어로구나’라고 받아들이시면 돼요.
‘심상’ 뭡니까?
감정, 느낌, 생각, 꿈, 상상에 등장한 사물, 상상에 등장한 상황
결국 뭐예요?
마음에서 창조된 상상력인 사물을 지칭합니다.
혹은 내면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의식의 공간에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상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는 것이죠.
이 세 가지의 상자는 ‘동음이의어’입니다.
음은 같은데 뜻은 다른 단어예요.
한자를 병행하지 않는 현재로서는 세세한 구분 자체가 힘들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한문으로 되어 있는 고대 경전들
이 단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공부에 심화와 향상을 위해서는 알아두셔야 돼요.
--심상과 물상
‘상’자를 한번 파헤쳐 볼게요.
아까 말씀드렸던 ‘심상’ 있죠.
‘심상’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 한문 ‘생각할 상’자예요.
이 ‘생각할 상’자는 흔히 머리 세상에서 나타난 걸 지칭을 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 그것들을 총칭해서 ‘상’이라고 일컫습니다.
즉 ‘상(생각 상)’은
기억이나 꿈이나 감정, 상상, 아이디어, 심지어는 지식
이러한 것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 제 나이 때는 어렸을 때 놀이터가 동네마다 있어서 놀이터에서 뛰어놀았어요.
지금 기억을 통해서 동네 놀이터, 어릴 적 뛰놀던 놀이터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게 뭐예요?
이게 ‘심상’이 되는 거죠.
그곳에 있던 미끄럼틀, 철봉, 구름다리, 그네, 근처의 건물 등등 모두 뭡니까?
이 심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을 지칭하는 단어는 ‘생각할 상’자를 쓰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머릿속에, 의식 속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모두 이 ‘심상- 생각할 상’자
이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다른 한편,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이거는 머릿속이 아니라
육체를 중심으로 했을 때 내면인 의식 공간 외의 것
외부, ‘나’라는 어떤 정체성이 외부에
실제로,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형상 상’자와 ‘서로 상’자를 써서 표현하죠.
경전에서는 오히려 ‘서로 상’자가 더 많이 쓰입니다.
인식되는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예요.
‘형상 상’을 쓸 때는 ‘물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고요.
간단해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 마이크 보이시죠?
마이크, 이게 ‘물상’이 되는 거죠.
또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들 눈앞에 보이는 책상,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계시면 그 모니터, 핸드폰 이런 것들
몸을 포함해서 모니터, 책상, 볼펜 또 뭐 있을까요?
마우스, 선풍기 이런 것도 마찬가지죠.
휴대폰, 여러분 아침에 이렇게 머리 빗을 때 쓰셨던 머리 빗
눈을 들어보세요.
저 하늘, 하늘에 떠 있는 태양, 구름, 공기, 물, 바다
심지어는 시간, 공간 이런 것들도
진짜로 있는 것들,
나하고는 별개로 동떨어져서
나의 존재 유무하고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정리하자면
머리 안에서 나타나는 것들은 ‘생각 상’자를 씁니다.
그래서 ‘심상’이라 부르고
머리 바깥에서 나타난 것들은 ‘서로 상’자와 ‘형상 상’자를 쓰죠.
‘물상’이라고 부르는 거죠.
물론 ‘서로 상’자는 ‘심상’마저도 포함할 수 있는 단어예요.
하지만 혼동하지 않도록 구분하는 겁니다.
‘생각 상’을 쓰는 ‘심상’은 머릿속에서
의식 안에서,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구예요.
가짜예요. 가짜. 가상의 것이죠.
-어젯밤 꿈에 나타났었던 공룡
-아니면은 한 10년 전 기억 안에 나타나 있는 내가 먹었던 커피 한 잔,
-심지어는 어제 저녁에 먹었던 메뉴들 같은 것처럼
이러한 모든 것들을 ‘심상’이라고 지칭을 하는 겁니다.
‘심상’은 그 형상이 무엇이든, 어떤 모습이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건 간에
실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의식에 의해 나타난 하나의 상’일 뿐이에요.
지금 당장 머릿속으로 백두산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게 뭐예요?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그 산은 실재하는 게 아니죠.
그 형상은 단지 의식이 만들어 낸 환영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심상’이라는 건 단지
심상으로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마치 여러분 폰이나 지금 컴퓨터 모니터에
제 모습과 제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죠. 동일해요.
컴퓨터 모니터 보면서 제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게 실제는 아니잖아요. 비슷한 겁니다.
반면 ‘형상 상’과 ‘서로 상’자를 쓰는 이 ‘물상’은
나의 의식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라고 여겨집니다.
얘네는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진짜로, ‘실재’로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것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고 나서도
이것들은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계속해서 존재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죠.
나와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저 하늘의 별들과 태양은
진짜로 있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의식 상태인 겁니다.
‘심상’이라는 거는 어찌 됐든 간에 나름대로
나의 의지로 이리저리 꾸미거나 가공을 할 수는 있지만
물론 이게 예전 영상에서 찾아봤지만
생각을 내가 한다라는 착각이거든요.
어찌 됐든 간에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나의 의지로 이리저리 가공할 수 있지만
‘물상’은 나의 의지로 가공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죠.
이런 이유로
‘심상’과 ‘물상’은 서로가 전혀 다른 별개의 차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겁니다.
--사유, 몸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근데 과연 그럴까요?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은
이제까지 수많은 경전들과 스승들의 가르침은 다 틀린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재밌는 테스트를 한번 해보자고요.
과연 그런지.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이 자기 탐구의 과정으로서 활용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나’, 지금의 나라고 여겨지는
이 ‘지금의 나(몸뚱이)’를 대상으로 한번 테스트를 한번 해볼게요.
범위를 축소해가지고 ‘내 몸’이 되는 거예요.
지금의 내 몸뚱이는 어떤 방식으로 있습니까?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죠?
진짜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물상’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있다, 존재한다, ‘물상’이라고 부를 수가 있죠.
그런데 지금의 이 ‘내 몸’이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들이 그 안에, 이 존재성 안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걸 살펴보는 겁니다.
뭐가 있을까요?
이 몸이 있기 위해서, 지금의 나의 몸.
-부모님이 있어야 되죠.
-그분들이 드신 음식, 그런 것도 있어야 되죠.
찾아보는 거예요.
예전에 부모님들이 존재하셔야 됩니다.
수십 년 전에 부모님들이 먼저 존재하셔야 돼요.
그렇다면은 ‘그 부모님(수 십년 전의 부모님)’들은 뭐예요?
기억의 형태로 있죠.
‘지금 부모님들 제 옆에 계신데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마시고요.
지금의 이 몸을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들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돼요.
그 부모님들의 시작을 한번 살펴보자라는 거예요.
어떤 형태로 있습니까?
하나의 기억의 형태로 있는 거예요.
‘심상(기억)’이에요, 심상.
‘그분들이 드셨던 음식’이 또 있어야 되죠.
그분들이 드셨던 음식
지금, 이 순간 어떤 형태로 있는 거예요?
어떤 하나의 관념이에요, 개념이에요.
‘심상’이죠.
그분들이 만나서 인연을 지었던 그 시절 인연 뭐예요?
‘심상’이죠.
이 몸의 차원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 아침에, 점심에 내가 먹었던 음식이 필요하겠죠.
지금 ‘이 몸’이 지금 있으려면.
내가 먹었던 음식
1분 전에 먹었던 음식이더라도 그건 어떤 형태로 존재해요?
‘기억’과 같은 ‘심상’의 형태로 있는 겁니다.
‘내가 들이마셨던 공기’
마찬가지죠, 심상이에요.
심지어는 ‘내가 태어났던 어떤 집’, ‘내가 태어났던 병원’
이게 또 뭐예요? 이것도 심상이죠. 기타 등등
그 무엇이 되더라도
지금, 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존재의 대전제는 ‘인식된 것’입니다.
‘인식됨’ ‘이미 인식된 것’이에요.
이러한 인식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지금의 나’, 지금의 내 몸으로서의 나라는 ‘물상’은
이런저런 여러 가지의 ‘심상’에 영향받아서 형성되어졌다라는 말이에요.
--물상과 심상은 같은 것
‘형상 상’과 ‘서로 상’
이 ‘물상’은 물질이라고 할 수 있고
‘심상’, ‘생각 상’은 ‘의식’ 또는 ‘생각’으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무슨 뜻이에요?
존재하는, 인식되어 존재하는 ‘물질’이라는 것은
‘의식’으로부터 왔다라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조금 어렵죠?
보통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래요.
이게 왜 가능한가?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모습은
1초 전의 내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어서 왔다라고 지금 여기고 있잖아요. 그렇죠
의심의 여지 없이
‘1초 전에 내 모습’이 쭉 변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라고 여기고 있죠.
그렇다면 1초 전의 나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 존재합니까?
기억이에요. 기억.
어떤 하나의 이미지 ‘정신적인 이미지’입니다.
이게 결국엔 뭐예요?
‘심상’이에요.
‘0.1초 전의 내 모습’이 변해서
‘지금의 이 몸이 됐다’라고 말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0.1초 전에 내 모습’은 그 실체를 증명할 수가 없어요.
오직 매 순간, 기억과 같은
어떤 의식상의 이미지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의 내가, ‘과거에 내가’
유지되면서 변해서 지금까지 왔다라고 여기고 있는 이상
결국엔 뭐예요?
오히려 이 사실이 ‘물질로서의 지금의 나’는
의식인 ‘1초 전에나’, 10초 전에나, 10년 전에나,
수십 년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쭉~ 하고 이어져서 왔다라는
왔다라고 여기고 있는 이 사실 자체가 결국엔 뭐냐 하면
지금 이 순간에 물질인 이 몸이 무엇으로부터 왔다라는 거예요?
‘1초 전에 나로부터 왔다’라고 말을 하려면?
‘의식’으로부터 왔다라는 거예요.
물론 나중에 가서는
인식의 맹점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지금의 나’라고 여기는 이것마저도
끊임없이 이미 지나가버린,
(인식이 완료돼 버린)심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유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방식으로 한번 사유를 해보는 거죠.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야말로 별개로 펼쳐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세상이
사실은 ‘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생각’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꿈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뭡니까?
의식이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죠.
그래서 ‘환영’이라고 불러요.
마찬가지예요.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 역시
‘일종의 영상화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인식의 맹점을 통해 살펴보면 뭡니까?
(보이는 세상) 이미 완료된 것의 ‘잔상’에 불과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완료된 것의 잔상이라는 것은
그 속성이 하나의 ‘정신적인 이미지’로서 ‘심상’인 거예요.
일종의 ‘영상화된 생각’, ‘가상의 환영’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잘 고찰해 보시면
여러 가지 경전이나 영적 스승들의 말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것들
물질로 보이는, ‘물상’으로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뭐라 얘기예요?
‘심상’ 즉 ‘의식’이 드러난 것이란 말입니다.
단지 뭡니까?
‘이것은 물질이다’라는 관념이 붙으면서
그것이 당연시되는 거죠.
당연하게 ‘물질이다’라고 착각되었을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즉 ‘형상’, ‘물상’이, ‘물질’이 ‘심상’이고
결국에는 ‘생각’이며 ‘의식’이라는 소리입니다.
불교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물질이 의식이고 의식이 물질이다.
여러분, 이 말이 어느 정도나 믿어지십니까?
본인 스스로에게 한번 증명을 해보는 거예요.
물질이 물질로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한번 들여다보시면 돼요.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시는 게
결국에는 시크릿을 할 때
파생되는 괴리감과 개연성을 따지는
항복하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에요.
왜냐하면 시크릿이라는 것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인식.
오늘 내용이 조금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깊이깊이 사유를 해 보시다 보면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번 영상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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