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사랑하시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설민석입니다.
이번에는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중심 무대가 된 장소인데요,
자, 그럼 영화의 배경이 된 병자호란은 과연 어떤 사건이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며 조선을 침략한 7년간의 전쟁, 이때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구원병을 파병했고, 이순신 장군, 의병, 명나라의 원군이 하나가 돼서 우리는 일본을 잘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방에는 여진이라는 민족이 우리의 혼란을 틈타서 강성해지고 있었으니, 이들이 훗날 후금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여진족의 후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명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자,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는 중립외교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해의 중립외교를 비판했던 세력이 광해군을 내쫓고,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등장했으니 바로 인조 정권인 것입니다.
(인조: 조선의 16대 왕)
후금은 자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광해군을 내쫓았다는 명분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는데요, 이것이 바로 정묘년에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 정묘호란이 되겠습니다.
후금은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기병 부대였기 때문에 우리의 왕을 사로잡고자 단 10일 만에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왔는데요, 우리의 왕은 강화도로 급히 몸을 숨긴 것이죠.
그리고 평안도에서 우리의 관군과 의병이 격렬하게 저항을 했고, 더군다나 후금은 아직 명과 전쟁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결국 후금은 우리 조선에게
“우리를 형님의 나라로 불러준다면 돌아가겠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결국 형제의 맹약을 조선이 받아들임으로써 정묘호란은 마무리 되게 됩니다. 그렇게 약 10년이 흐르게 됩니다.
그동안 명나라는 더욱 더 약해지고 후금은 더욱 더 막강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후금의 우두머리였던, 즉 칸이었던 홍타이지가 자신을 황제로 높이고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참에 우리 조선에게도 관계의 재정립을 요구하게 되는데요, 자신들의 후금을 형님의 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러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후에 청나라는 수차례 집요하게 군신관계를 요청했지만 계속해서 조선은 이에 대해서 답하지 않았습니다.
자,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분노 게이지가 머리끝까지 올라가게 되고, 조선에 최후통첩을 날리게 됩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고 우리를 아버지의 나라, 임금의 나라로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까, 당시 조정의 의견은 둘로 나뉘게 되는데요,
“일단은 청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훗날을 도모하자”라는 화친을 주장한다. 주화파.
“뭔 소리냐? 아직 명나라가 살아있는데 어찌 오랑캐와 군신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화친을
배척한다. 척화파로 나뉘게 됩니다.
당시 왕이었던 인조는 고민 끝에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조선은 청나라에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자, 조선의 군인들은 각 지역의 성 안으로 들어가서 적과의 전투를 준비하게 되지만, 1636년 12월 강물이 꽁꽁 어는 추운 겨울날
그들은 우리의 성들을 훅하고 지나쳐 곧바로 서울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바람처럼, 마치 야수처럼 말이죠.
아무도, 아무도 단 5일 만에 서울 부근까지 그들이 진격해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자, 순식간에 적들이 서울 근처까지 당도하니까, 강화도로 피신할 길이 막혀버린 인조는 당황한 나머지 오늘날 송파구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져 있는 남쪽에 있었던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 <남한산성>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건 청나라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먼저 막아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고 일종의 고립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청나라 군사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이렇게 47일간의 기나긴 항전이 시작되게 됩니다.
남한산성 안에 고립된 인조와 신하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그 안에서도 신하들은 화친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항전을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눠져서 그 유명한 대립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화친을 배척하는 예조판서 김상헌! 오늘날 외교부 장관에 해당합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 무려 7년간 원군을 보내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명나라가 오랑캐의 발밑에 깔려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오랑캐들과 화친을 한다고요?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의리 있고, 명분이 있고, 원칙이 있으면 절대 그들과 화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김상헌의 항전 의지에는 현실적인 기대감도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들, 저들이 우리의 성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훅하고 지나쳐 왔죠.
그러니 전방에 있는 우리 성의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와서 적의 보급로를 끊어줄 것이다. 그리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 지방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용감한 우리 군사가 임금을 구하러 이곳 남한산성으로 달려와서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중국 명나라가 또 구원병을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화파의 대표, 이조판서 최명길, 오늘날 인사혁신처 처장에 해당됩니다.
그 당시는 장관급이었죠.
그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명나라요? 고맙죠. 은혜? 잊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이지, 국제관계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살아야 백성이 살 수 있고, 백성의 삶이 평안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정의입니다!
눈앞의 치욕은 견딜 수 있고, 영원한 죽음은 이겨낼 수 없으니까, 성 밖으로 나아가서 항복해야 한다는 맥락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최명길의 주장처럼 우리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원군이 남한산성 근처로 오기는 옵니다.
하지만 4만 명의 조선군이 고작 청나라의 기병 300명한테 패배를 하게 됩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조선 군인들이 승전보를 울리지도 못하고 족족 깨지게 되죠.
자,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인조와 대신들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인조는 임금의 옷을 벗고 죄인의 신분으로 푸른 색 옷을 걸친 채 성밖으로 나오게 되죠.
이 땅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우리의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 다른 나라 왕에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였지만,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최명길과 김상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특단의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인조,
이 3사람의 숨막히는 갈등을 영화 <남한산성>은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찬란하고 빛나는 역사도 있었지만, 이토록 가슴 아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교훈 삼아서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하겠죠.
그 당시의 최고 결정권자는 인조 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날의 최고 결정권자는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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