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은
오랜 세월동안 각각 다른 도시 국가에서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성을 고취, 연대하여 그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외세의 침입이 끝난 후
페르시아 전쟁 때 뛰어난 활약을 했던 아테네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상대로
상납금을 거두며 제국처럼 군림하였죠.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 중심으로 이루어진 델로스 동맹과
이에 대항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력이 큰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직접 맞부딪히게 된다면
그리스 전역이 불타오를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기원전 446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평화조약을 맺으며, 서로의 동맹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죠.
하지만,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에는
두 나라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가가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436년. 작은 도시 국가 간의 에피담노스에서의 분쟁은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조약이
깨지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은
테베의 기습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전부터 테베는 플라타이아이를 침공하며, 영토를 얻고자 했는데
성공적인 결과를 얻진 못하고 있었죠.
그러다, 스파르타가 전쟁을 선포한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플라타이아이를 노렸습니다.
테베의 군사는 플라타이아이 성을 금세 둘러싸고
이에 플라타이아이로써는 아테네에게 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플라타이아이의 원군을 보내기 보다
스파르타 측의 다른 도시들
메가라, 미틸레네 등에게 해군 공격을 하고 있었죠.
플라타이아이는 원군 없이 처절한 공성전을 벌였는데
테베와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성을 함락하기 위해 불화살도 퍼붓고 땅굴도 만드는 등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지만 성을 함락하기가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안에서 수년간 대군을 상대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로
기원전 427년, 아테네가 미틸레네에게 항복을 받아낼 때쯤
플라타이아이는 스파르타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죠.
전투가 끝난 후에 전후처리는
승자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었습니다.
아테네가 승리를 거두었던 도시 미틸레네는
원래 델로스 동맹 소속이었는데요.
아테네 측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하고
배신을 했던 미틸레네를 상대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모든 남성은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정치를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 내부에서는
회의를 거쳐 그러한 행위는
너무 잔혹하다면서 결정을 취소하였죠.
반면, 플라타이아이를 차지한 테베군과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의 처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작은 도시국가인 테베와 플라타이아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스파르타가 결정하는 방식이었죠.
플라타이아이는 자신들의 상황을 스파르타에게 호소했습니다.
먼저 테베를 두고서, 이들은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에게 붙었던 도시라고 자신들과 비교를 했으며
자신들은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가 도와준 적이 있기 때문에
의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죠.
이에 테베는 자신들이 이미 예전부터
플라타이아이를 식민 지배하고 있었던 국가였기 때문에
네놈들이 우리를 배신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스파르타는 자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주도자만을 심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인 남성들을 다수 도륙하며 도시 자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스파르타가 플라타이아이를 휘젓는 동안
도망친 사람들은 아테네로 달려가서 아테네의 보호를 받게 되었죠.
이렇게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포로 처리 방식은
민주정을 행하던 국가와 군정 국가의 성격 차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도 전쟁 초기에 보인 양상일 뿐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포로학살의 잔인성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가리지 않고 일반화가 되어갔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작은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했으나
막상 둘이 맞붙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자타공인 최강이었지만
지중해 바다에서는 아테네의 해군을 막을 수 있는 국가가 없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해전을 꺼렸으며
아테네는 육상전을 피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해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군들을 불러 모아
대군을 형성해,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로 쳐들어가
아테네 인근 농지를 두들겼는데요.
그럴 때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해 농민들을 성벽 안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농지에 위협을 줄 때마다
아테네로서는 해군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했던 전략이었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앞마당을 황폐화시키려고 했으나
이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티카 반도의 농지는 대부분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나무들의 자생력으로 인해 농지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약 6만 명으로
그리스 세계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였는데
병사들이 올리브나무를 모두 황폐화시키기 위해서는
한 명당 200그루 넘게 훼손을 시켜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대체적으로 생업을 떠나 복무를 하고 있었고
원정을 떠나는 전쟁에서도 오래 머물러도 한 달 정도라고 하니
나무만 베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여기다, 스파르타군은
본국에서 자신들의 국가 노예인 헤일로타이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본국을 비울 수 없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며 잘 지켜내는가 싶었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였죠.
성 밖에서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단기간에 좁은 성안에 모여들게 되자
식량부족과 위생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원전 430년부터 성안에서는
아테네 역병이라 불리는 전염병이 수차례 퍼져 나갔습니다.
이 전염병은 아테네의 주요 항구이자
식량 공급원이었던 피레우스를 통해 시작되었는데
식량들이 유통되면서 아테네의 주요 도시로 퍼지게 되었죠.
동부 지중해에 있는 많은 곳에서 동일 질병이 발생했지만
아테네에 가장 악영향을 끼쳐 아테네 역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아테네 역병을 두고
장티푸스나 천연두 등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높은 인구 밀도와 빈약한 위생을 지녔던 아테네는
이 역병으로 사회가 붕괴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법치주의의 약화와 종교적인 신념의 약화
여기다 아테네를 이끌었던 구심점인 페리클레스까지 사망하게 되죠.
아테네의 대역병 결과 전체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혹은 그를 넘어선 숫자인 약 7, 8만 명이 사망하였고
전쟁의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아테네의 재정 상황도 어렵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기원전 429년 아테네는
77척의 스파르타-코린토스 연합함대를 맞아
절반의 숫자인 40척의 함대로
나우팍투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평소 아테네 함대의 훈련이
대단히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투이기도 했죠.
한편, 페리클레스가 역병으로 죽은 후
아테네의 정권은 급진파인 클레온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는 미틸레네를 점령했을 때도
최대한 잔인한 보복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호전적인 정치가였죠.
선동정치가의 대명사라는 평가도 받는 클레온은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이었습니다.
클레온은 극단적인 주장을 즐기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다소 신중한 성향을 보였던 페리클레스를 두고
겁쟁이라고 공격하며, 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했죠.
그간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귀족파와 민주파를 불문하고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는데 반해
클레온은 최초의 상공업 타입의 정치가였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죽고 나자 이제 아테네의 전략은
신중함을 유지하는 대신 클레온의 뜻에 따라
경제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죠.
오늘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3번째 이야기로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포로 처리 방식 문제와
이후,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대결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성전을 잘 이끌어가고 있었으나
높은 인구 밀도와 빈약한 위생 탓에
커다란 재앙인 아테네 역병을 겪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이 적게는 7만 명
많게는 10만 명의 사망자로 추산되고 있으며
그중에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도 있었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클레온이 지휘봉을 잡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4번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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