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로부터 지켜낸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 해군들의 활약으로 인해
앞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굴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인간 본성의 욕심이 있는 한
꼭 외부의 침입이 아니더라도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인들끼리의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두각을 보였던 아테네는
이때부터 다른 폴리스들에게
그리스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상납금을 받아가며
제국화 되는 과정을 거쳤고
이에 다른 폴리스들 중에서는
불만이 쌓여가는 도시국가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최강의 육군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되어 대립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기원전 4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반 경과는
스파르타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무난하게 잘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아테네 도시에서 대규모의 역병이 발생하여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잃어버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아테네에서는 강경파 클레온이 권력을 잡았고
스팍테리아 섬을 공략하며 아테네가 우위를 잡았지만
델리온에서 대패를 맞딱드리게 됩니다.
여기다 아테네의 중요한 은광 지역이었던
암피폴리스가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로부터 탈취당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장군 멍군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던 중, 양측의 강경파였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전투 중 목숨을 잃게 되고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뒤인 기원전 421년에는
아테네의 온건파 정치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두 나라 간에는 50년간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니키아스 평화협정이 체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스팍테리아 섬의 인질을 돌려주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암피폴리스를 돌려주었지만
두 강대국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니키아스 협정은 24년 전에 있었던
두 나라 간의 협정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스파르타가 열세인 형국이었습니다.
얼마 전 필로스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후로는
더 이상 다른 도시국가에서도 스파르타를 무적이라 여기진 않았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건파 니키아스와는 달리 강경파의 지도자로서
애매한 평화관계 보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아테네의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갈라놓기 위해 고민을 했는데
니키아스 평화협정에는 스파르타만 서명했고
테베와 코린토스가 서명하지 않았던 것을 빌미로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생긴 틈을 최대한 벌어지게 하려고 했던 겁니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50년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클레이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기원전 447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외삼촌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아테네 최고의 권력자 페리클레스였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성장기 시절
소크라테스의 제자임과 동시에 동성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청소년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관계일 때
젊음의 대가를 주는 대신
지식을 전수받는 동성애적 교육방식이 일상적이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 출신에 부족할 것이 없었던 집안 환경으로 인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외모 관리도 잘 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살 연상인 소크라테스만 바라보였으며
질투가 워낙 심한 바람에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다른 잘생긴 청년들과는
대화도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긴 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육체를 함부로 탐하진 않았습니다.
이에 알키비아데스가 스승을 끊임없이 유혹했지만
스승은 끝까지 거절했다는 일화가 유명하기도 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단둘만 있을 때
육체적 관계를 가지길 기대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누었고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레슬링 연습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레슬링은 알몸으로 하는 경기로
이때를 빌미로 스킨십 이상을 원했지만
역시 기대했던 일을 이루진 못했다고 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기원전 431년.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는
10대 후반의 나이로 전투에 참가합니다.
이때 당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소크라테스가 곁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지켜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이후 기원전 424년에 있었던
델리온 전투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델리온에서 아테네는 보이오티아군의 기습과
아테네군의 혼란으로 대패를 맞이하게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살아남은 군사들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조카이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고
여기다 전쟁터에서의 경험도 많게 되니
성인이 되어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릴적부터 모든 것을 갖추고 성장해서인지
그는 능력과 더불어 야망과 자만감을 함께 지니게 됩니다.
젊은 나이 때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그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거나 반대하는 자들에게
공격적인 발언들도 서슴지 않아
알키비아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그를 싫어하는 적들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31년 무렵.
아테네를 그리스 세계의 제국화에 성공시켰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온건파 니키아스를
반대하는 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강경파 대표인물 정치가로서 급부상하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고 약 10년이 흐른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호전적인 인물들이었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모두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음 해인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니키아스는
아테네 민회를 설득해 스파르타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테네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순순히 호응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서른 정도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의 어설픈 평화보다
지금 아테네가 우세인 상황에서 스파르타를 확고하게 멸절시키길 바랬던 겁니다.
기원전 415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민회에 시라쿠스를 공격하자고 주장합니다.
시라쿠스는 현대 시대의 시칠리아로
이들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습니다.
시라쿠스는 예로부터 부를 축적한 부유한 폴리스였으며
또한 함대 건조 기술까지 발달하여
우수한 배들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라쿠스를 삼키기로 결정합니다.
아테네는 그동안 다수의 전투 경험과 수많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던
알키비아데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시라쿠스 원정 준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전투 승리를 확신하며 원정 선단을 준비하였으나
평소 그의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원정 선단이 출정하기 전날, 신성모독죄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누군가가 헤르메스 신의 흉상을 모신
헤르메 기둥들을 조직적으로 훼손하였고
이 사건은 알키비아데스가 평소 신들을 가볍게 취급하는 행동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원정 함대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고
그건 결국 이제 아테네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나 존재감 없이 살아가기 보다는
고국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로 망명할 것을 결정합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이자
전투 명장이었던 알키비아데스가 망명을 신청하자
득이 될지 독이 될지 계산을 하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준 피해보다
더 큰 이익을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이에 스파르타는 그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풍요로웠던
아테네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철저하게 스파르타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후,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시라쿠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전술에 따라
아테네 함대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시도합니다.
아테네로서는 모든 함대를 준비했던
사령관이 갑자기 적군에 붙게 되어 혼비백산하였고
알키비아데스를 대신한 사령관이었던 평화의 상징 니키아스는
전투 경험 부족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의 함대는 시라쿠스를 공격하였지만
전투의 신이었던 알키비아데스에게 막혀
4~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등의 주요 지휘관들은 모조리 전멸당하고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 전쟁 시절부터
밀티아데스나 테미스토클레스를 비롯해
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장군들에게
도덕심이나 행동의 선악을 이유로
장군직을 박탈한 사례가 자주 있어왔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인성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아테네에 있을 때도, 스파르타에 있을 때도
추후 페르시아 등으로 옮겨 다닐 때도
그가 있던 곳에서는 승리를 불러왔기 때문에
인기와 원망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에서
최근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리즈를 이어가던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로
펠로폰네소스 4.5편을 꾸려보았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리즈 5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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