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여러분,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방송은 실제상황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1983년 8월 7일 한낮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천안 북일고와 인천 동산고가 맞붙은 봉황대기 고교야구전이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난데없이 울린 대공 경계 공습경보 사이렌...
실제상황이란 한 마디에 야구경기가 중단된 것은 물론이고
도로 위 차들은 일제히 멈춰 섰고
그때 마침 저희 집에 놀러와 계셨던 이모님들은 훗날 부산 어딘가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하고는 흩어졌던 기억...
중공군 미그기 조종사 손천근의 망명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죠.
더구나 그해 1983년은 연초부터 유독 경계경보가 수차례 울리기도 했었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나서 손을 마주 잡고
비록 멈춰 섰으나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린 지금의 세상에서 보자면...
너무나 먼 옛날 같은 ‘실제상황 경계경보’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6시 50분
36년 전 우리를 놀라게 했던 그 실제상황 경계경보는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으니..
그것이 비록 전투기는 아니라 해도...
중국 대륙이 날려 보낸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은
결국 커다란 덩어리로 형체화 돼서
‘긴급’ ‘재난’ ‘경보’라는 무거운 세 단어와 함께
우리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이후 벌써 다섯 번째, 심지어 오늘만 해도 세 번...
경보발령은 어느 사이에 사람들의 일상이 돼가고 있는 중이죠.
“이 방송은 실제상황입니다.”
1983년 전 국민을 혼비백산 당황하게 만들었던 중공군 미그기 망명 사건은 그렇게 단 17분 만에 종료됐습니다.
도시는 평온을 되찾아서 시민들은 녹색의 풍경 속에 따가운 여름의 햇살을 누릴 수가 있었지요.
언젠가 우리는 마치 손천근의 미그기 사건처럼..
미세먼지 때문에 경계경보가 울렸던 시절이 있었다고 옛날 얘기하듯 되돌아볼 때가 올까..
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더 마음이 무거운 오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족을 하나 답니다.
손천근이 미그기를 몰고 왔던 그해 83년,
제가 치렀던 방송사의 입사시험 상식 문제에는
‘그 손천근이 누구냐’는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그가 누군지 몰라서 오답을 썼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천근과 경계경보를 잊어갔던 것이죠.
봄이 지나면 또 한동안 미세먼지는 뜸해질 것이라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또 잊고 지내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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