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정신이 저절로 늙지는 않는다.
나이 때문에 정신이 변했다고 생각이 들면
그건 나이가 들어서 변한 게 아니라
‘나는 나이 들었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한 것이다.
즉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자기 내면의 타협이다.
사고력이나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도
뇌가 노화해서 생긴 육체의 문제이지
정신의 문제는 아니다.
아마도 정신은 머리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게 아닐까?
<늙지 않기에 힘든 우리>라는 책은
삶과 행복, 그리고 마음의 성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당신은 불행한 마음을 느낄 필요가 없다.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진화심리학에 기반한
행복론과 인과적 필연론을 담은 깨달음이 있는 책
<늙지 않기에 힘든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나이가 들수록 쾌락에 관심 없는 이유
현대 사회는 나이 들수록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인간이 느끼는 무기력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무엇이 위험한지 모르기 때문에 생존율이 떨어지는데
실제로 고통을 못 느끼는 무통각증 환자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과거 인류의 조상들 중
무기력감을 못 느끼는 유전자를 타고났던 개체들은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 일에 끝없이 매달리다가 도태되었다.
예를 들어
백상아리를 사냥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아무리 실패해도 무기력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영원히 백상아리 사냥의 에너지를 낭비하다
굶어 죽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차라리 빨리 포기하고 토끼를 사냥하는 게
생존에 유리할 수 있는데
그렇게 포기하게 해주는 장치가 바로 무기력이다.
게임처럼 쾌감을 빠르게 느끼는 일들은 위험하다.
현대 문명은 급격히 발전했지만
생물의 진화 속도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현대에 적응 못한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뇌는 생존 번식에 도움되는 활동을 할 때
행복감을 발생시키는데
현대 문명에 적응 못한 이 원시 뇌는
게임에서의 성취를 아주 효율적인 생존 활동이라 착각하고
자신이 사회 활동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실에 더 많이 적응하고 타협한 사람일수록
게임에서 느끼는 쾌락이
생존과 관련 없는 걸 깨닫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게임에서도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보통 나이가 들수록 게임이 재미없어지는 것이다.
--이유 없이 우울한 감정이 드는 이유
가끔 이유 없이 우울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울감은
지금 처한 뇌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신체가 보내는 신호이다.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우울감이 든다는 건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그 환경에서 기대할 수 있는 미래에
내가 진심으로 욕망하는 게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우울감은 즐거운 일을 하다 보면 충분히 사라질 수 있지만
우울증은 아무리 즐거운 행동을 해도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즉 우울증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도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신체적인 병이다.
그러므로 약 복용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주변 환경을 바꾸고
즐거울 수 있는 일도 해야 한다.
마음이 힘들고 슬플 때야말로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런 데이터들이 쌓이면서
[나 사용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상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상처가 생긴 이유를 이해하고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껏 몸부림치다가 포기하고
오히려 아픔을 받아들이니 나아졌다는 사람들도
한껏 몸부림쳤던 시간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감을 쌓다 보면
아무리 우울해져도 금세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는데
이상적 자아에 내 실제 모습이 근접할수록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자아실현이란
단순히 어떤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뭘 원하는가를 정확히 알고
내 본성과 신념이 요구하는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을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내가 어떤 일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의 세뇌로 만들어진 욕구가
자신의 본성인 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자기 수용력이다.
자기 수용력이 높으면
자신의 진짜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문제없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인데
자기 수용력이 높은 사람은 자존감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을 수용하면
내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기 수용력은
[마음의 면역력]이다.
--불행한 마음이 드는 이유
우리의 뇌는 안 좋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불행감을 발생시켜서
그 문제에 어떻게든 대처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겪으면
그 문제가 주는 불행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복을 시도하지만
극복에 실패할수록 신체에 무기력감이 쌓인다.
결국 한계에 다다르면 그 문제 자체를 증오하게 되고,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능력에 실망하게 된다.
그래야만 앞으로 같은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거나
애초에 그 문제로부터 회피해서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극복 못했던 트라우마가 생기면
이후엔 그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거나 그 문제로부터 도망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행감은
[뇌가 나에게 내리는 채찍질]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그것을 성취하여 완전히 내 것이 됐다고 판단하는 순간
뇌는 행복감 생성을 아주 빠르게 중단시킨다.
그래야만 우리가 생존 번식에 도움되는 다른 일을
또 찾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으며
어떤 성취에도 만족할 수 없다.
즉 행복은 도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기 힘들어
우울증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경쟁 대상으로 삼고
자기 분야의 새 개척지를 찾는 창의적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초보자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는 게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
비교로부터 얻는 상대적 성취감은 짧지만
비교로부터 받는 상대적 박탈감은 영원하다.
타인과 비교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아주 작은 상을 주고는
영원히 벌 받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내 능력 밖의 일을 아는 것도 능력이란 말이 있듯이
환상이 환상임을 깨닫는 건 포기가 아니라 성숙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그만큼 성숙하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서 오는 불행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거의 모든 불행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에 있다.
--중년들이 유난히 우울증을 겪는 이유
사람은 호르몬이 크게 변하는 시기가 두 번 있다.
바로 사춘기와 갱년기이다.
이때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본성과 자아도 조금씩 바뀐다.
인간 여성은 폐경기 이후에도 길게는 수십 년을 더 사는데
이건 모든 동물 중에서 아주 드문 경우이다.
신체가 늙고 번식 능력을 잃은 개체가 식량을 낭비하면
더 많은 번식에 손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능이 높은 동물의 경우
나이 든 개체가 가진 지식이
자기 자손들에게 이득이 되기도 하므로
식량 소비를 감수하더라도
이른바 할머니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생식 능력을 잃고 몸도 약한 개체가 생존 번식 게임에 직접 뛰어들면
자식들에게 손해만 끼칠 테니
그때부터는 내 유전자를 보유한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는
간접적인 전략이 유전자 보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는
이 똑똑한 전략은 계속 선택되어
우리한테까지 전달됐다.
한마디로 갱년기 때 호르몬이 바뀌면
성취 지향적인 본성에서 관계 지향적인 본성으로 바뀌면서
자식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40~50대의 사람들이 유난히 우울증을 많이 겪는 것이다.
그동안 성취 지향적으로 살면서
돈을 모으고 이룬 것이 많더라도
그것들이 어느 순간 부질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관계 지향적으로 바뀌면
젊을 때 관심도 없던 꽃과 나무가 예뻐 보이고
젊은이들을 보면 뭐 하나라도 알려주고 싶어지며
세상의 지혜를 나누고 사회에 기여하고 싶게 된다.
사명감이 생기고, 그 사명을 지키는 삶을 살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정해져 있는 이유
만약 영혼에 선과 악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아무리 선한 환경에 태어나도 악하거나
악한 환경에 태어나도 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운명론을 벗어나려면
영혼 같은 건 없거나 선과 악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함이나 악함은
내가 타고난 [유전자와 살아온 환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가 서울 한 골목에서 사람을 칼로 찔렀다고 생각해 보자.
이제 그 범죄자가 태어나기 전 과거로 돌아가서
그 범죄자의 부모에게서, 그 범죄자가 태어날 때 가졌던
모든 유전자를 완벽히 똑같이 지닌 그 아기에게
내 영혼이 들어가서 같은 시간에 태어나고
완벽히 같은 환경에서 같은 경험을 답습하여
결국 서울의 그 골목까지 오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나는 또 그 사람을 찌를 것이다.
이 운명론은 내가 어떻게 살든 만날 인연은 만나고,
어떻게 살든 수명은 정해져 있다는
허무주의식의 운명론이 아니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내 미래는 분명히 내가 설계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미래든 간에
그 미래에 도달하는 순간
그 미래는 내가 반드시 겪게 될
필연적이었던 것이 돼버릴 뿐인 것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완벽히 정해져 있다.
만약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 뒤에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신체에 저장된 기억 역시 소멸하여 과거로 돌아갈 테니
완벽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범죄자들이 사회에서 벌을 받고 도태되는 것
그들이 본질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성격과 행동이
지금 당장 이 사회에 해가 되고 필요 없기 때문이다.
즉 현대의 자연선택인 것이다.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도
인류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을 뿐
본질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라도 소크라테스 대신 소크라테스로 태어났으면
소크라테스가 됐을 테니까.
우린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자유의지 역시
지금 이 순간엔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 확정된 그 미래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끔찍할 만큼의 노력으로 얻은 위대한 결과물도
그저 자신의 운명 안에 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남들보다 돈이 많거나 머리가 좋다 해서
혹은 타인과의 비교 없이 행복해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것들이 내가 남들을 한심하다고 평가할
그 어떤 근거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만약 이 물질 세상을 초월한
고차원의 관점인 신의 눈으로 우리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를 사진처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존재는 우리의 삶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결말까지 정해져 있는 삶을 살 뿐인데
무슨 평가를 하겠는가?
만약 영혼의 개별적인 고유 성격이나
어떤 우주의 시스템을 가정해서 운명을 바꿀 가능성을 내놓더라도
그것들 역시 현실에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본질적으로 운명론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미 내 운명이 삶의 끝까지 다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삶이 더 훌륭한 삶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 하나
영혼적인 삶이든 영혼적이지 않은 삶이든 간에
그저 행복하게만 살면 되는 것이다.
결국 세상엔 더 나은 삶, 더 훌륭한 삶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단지 더 행복한 삶만이 있을 뿐이다.
운명론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것
타인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막지 못한 것
이 모든 것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잘못에 대하여 확실한 책임을 지고
앞으로 그 잘못을 하지 않겠다 다짐만 한다면
더 이상 자책감이라는 감정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똑같이 남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것을 비판하고 혼내되
마음은 평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들의 모든 행동 역시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으니까.
우리가 느끼는 불행이란 감정은
과거 인류 생존에 도움 됐던 진화적 사물일 뿐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우리의 신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신체가 없는 영혼은 지구 같은 3차원 세상에서나 필요한
이런 감정들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행하다고 생각되는가?
<늙지 않기에 힘든 우리>와 함께한다면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단 일부분조차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 누구로 태어났으면
그 누구가 됐을 테니까.
'체인지그라운드(20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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