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지식] 영적 깨어남은 선택이 아니라 진화의 필수이다|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Buddhastudy 2024. 10. 15. 19:31

 

 

자신의 의식 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평화는 소음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는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는 그런 것들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의식 상태가

당신의 삶과 지구 행성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삶 전체의 여행은

지금 이 순간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당신의 삶을 지배해 온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추측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에고와 생각 등이다.

 

당신은 지금 즉시

에고와의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그것이 삶으로 다시 떠오르는 길이고, 새로운 지구로 향하는 길이다.

 

영적 깨어남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진화의 필수이다.

 

우리는 지금 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구 행성에 깨어있는 의식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자 운명이다.

 

오늘은 진정한 영적 깨어남을 경험한 에크하르트 톨레의 가르침을 담은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모든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11400만 년 전, 어느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지구라는 행성 최초의 꽃이다.

 

이 최초의 개화는 식물이라는 생명체의

획기적인 진화와 변화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그 섬세하고 향기로운 존재는

다른 종의 의식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류의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꽃은 실용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즉 어떤 식으로든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가치를 인정한 최초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는 꽃에 대해 명상하고

꽃으로부터 삶을 사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붓다는 어느 날 제자들 앞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며

침묵의 법문을 전했다.

오직 마하가섭이라 불리는 승려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

그만이 붓다가 준 침묵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최초의 알아봄은

인간 의식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 알아봄과 연결된 느낌이 기쁨과 사랑이다.

그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꽃은 우리 내면에 있는 가장 고고하고 성스러운 것

궁극적으로는 형상을 초월한 것에 표현이 되었다.

 

꽃은 다른 영역에서 온 메신저이자

물질적인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와 같은 것이 되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꽃, 수정, 보석, 새들은

인간의 정신에 특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인간이 왜 그것들에 그토록 매혹되는가는

그것들이 가진 비물질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깨어있는 주의력이 있으면

모든 생명 형태 속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본질, 의식 또는 영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과 하나임을 알아보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자신으로서 사랑하게 된다.

붓다, 예수, 그 밖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초기에 피어난 인류의 꽃들이었다.

 

그 당시는 꽃이 곳곳에 피어나는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잘못 이해되고 크게 왜곡되었다.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메시지는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한 송이의 꽃, 한 개의 수정 또는 한 마리 새를

깨어있는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면

그것들은 형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비록 작은 틈일지라도

영적인 세계로의 내적 열림이 있다.

그 세 가지 생명 형태들이

고대로부터 인류 의식에 진화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이유이다.

 

예를 들면

왜 연꽃 속 보석이 불교의 중심 상징이 되었는가?

왜 기독교에서 흰 비둘기가 성령을 나타내게 되었는가?

 

그것들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일어나도록 운명 지어진

행성 전체 의식의 대전환을 위한 토대를 준비해 왔다.

두려움, 탐욕, 권력욕은

국가와 종교, 이념 간의 전쟁과 폭력의 배후에 있는 심리적 동기일 뿐 아니라

개인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증의 원인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빠진 독이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 탐욕, 권력욕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집단적 망상이라는 기능 장애의 결과물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 좋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만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영적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힘이 되었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인식을 통해

폭력과 증오의 종지부를 찍는 대신

더 심한 폭력과 증오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같은 종교 내부마저 분열시켰다.

 

종교는 이념이 되고

사람들이 그것들과 동일화되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강화시키는 신념 체계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믿음을 토대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고 단정지었으며

대립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정당화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들의 관점과 철저히 동일화된 집단 에고체들이다.

 

하지만 에고는 소멸되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아직까지는 아닐지라도

지구상에 많은 이들이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인류는 지금 진화할 것인가? 사멸할 것인가?

중대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

 

인간의 마음 구조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똑같은 세상, 똑같은 악, 똑같은 기능장애를 계속해 창조할 것이다.

 

인간의 삶과 의식은

지구의 삶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낡은 의식이 소멸하면 그것에 공명해

지구의 많은 곳에서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대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중 일부를 이미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전쟁은 마음의 방식이며,

그런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은

악으로 인식된 상대방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

 

에고가 전쟁할 때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에고는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우리가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 순간의 존재함만이

당신을 에고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현존만이 당신 안의 과거를 해체시키고

당신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킨다.

 

영적인 깨달음이란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예수가 너 자신을 부정하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해체하라는 의미였다.

 

환상의 나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그 안에서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의 빛이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곳에 있는 나, [순수한 있음]이다.

 

나 자신이 그것임을 알 때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고

단지 상대적인 중요성만을 지니게 된다.

그 일을 존중하기는 해도

절대적인 심각성과 중압감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 안에 불행이 있다면

먼저 그 불행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다라고 말하지 말라.

불행은 당신 그 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내 안에 불행이 있다라고 말하라.

그런 다음 그것을 살펴보라.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그 불행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있는 그대로와 대면하라.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행복은 교묘히 달아나지만,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와 마주함으로써 가능하다.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인간 존재는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진화하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주의 진화라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통까지도

진화 과정의 일부이다.

 

끝없는 고통의 악순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당신은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느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은

당신을 흔들어놓거나 마음을 방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에 흔들리고 마음이 방해받는가를 기준으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모든 풍요의 원천은

당신의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일부이다.

 

그러나 먼저 바깥의 풍요를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을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보라.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꽃가게 앞에 놓인 꽃들의 아름다움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풍요 속에 젖는 즐거움 등

모든 걸음마다 삶의 충만함이 있다.

 

자기 주위 모든 곳에 있는 풍요를 알아보는 것이

자신 안에서 잠자고 있는 풍요를 깨어나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일들의 배후에는

높은 질서와 목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용물에 대한 것인 반면

더 높은 질서는 형상 없는 우주의 지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는 있고

더 나아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춤으로써

그 더 높은 목적이 펼쳐지는데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인도의 위대한 영적 교사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을 여는 열쇠이다.

그 힘에 의해 영원히 형상에 갇침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무엇이 존재하든, 무엇이 일어나든

형상에 대해 마음속에서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상의 절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본래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가 그 꿈 안에서 깨어나면

에고가 만들어낸 지구상의 드라마는 끝이 나고

더 평온하고 경이로운 꿈이 일어난다.

이것이 새로운 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