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교주녀를 비롯한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셨는데 그 설법의 내용은 바로 사성제였습니다. 고-집-멸-도. 이 세상에 삶은 고통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생-로-병-사. 나는 것 고통이요, 늙는 것 고통이요, 병드는 것 고통이오, 죽는 것 고통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4가지의 큰 고통도 있지만, 그 다음에 고통이 이어지는 것은 애별리고_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거죠. 이 세상에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것은 부모님으로 부터 자식에게 내려 받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일 겁니다. 조건이 없는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이죠. 그렇지만 그 존경스러운 부모는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줄 수 없습니다. 언젠간 가야 되나요? 안 가야 되나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눈물이 나요? 안 나요? 가슴이 저리게 아픕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는데, 갈 때는 순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갈 때는 순서가 없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내려주신 사랑이라고 하는 부분과 헤어지는 부분의 고통이 고통이듯이, 또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 부모는 부모 잃은 자식의 마음보다도 더 큰, 그야말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이라는 자체는 애간장이 끊어진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랑의 반대편에는 괴로움도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서 묻고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대게 보면 불교적 사랑은 어떤 거냐? 이런 게 아마 궁금한 거 같아요. 일반적인 사랑은 그냥 무조건 좋은 거라고 따라가지만,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반대편으로 갔을 때는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어서 고통을 잉태하는 경우도 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내지는 배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배신을 당하는 사랑도 있잖아요.
그럴 때보면 내가 사랑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배신을 했을 때는 그 원망이 큽니까? 안 큽니까? 증오심이라는 것이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오라는 것을 낳는 것은 완벽한 사랑이 아니겠죠.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랑이라는 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사랑이어야 된다. 그래서 세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랑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고는 바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자비였습니다. 자비(사랑 자, 어여삐 여길 비)
중생이 사랑하는 것은 조건을 이야기하지만, 불보살이 행하는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자,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건이 없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우리라고 하는 파운다리를 치지만, 부처님의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동체대비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내 몸과 다르지 않은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우주법계의 모든 생명체가 다 내 자식 아닌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중생의 삶을 살기 때문에 울타리를 칩니다. 내거, 내 자식.
그래서 오늘날 흔히 보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모습을 봤을 때 편을 너무 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자식이 뭐를 먹고 물똥을 싸면 물똥이 싸는 것이 안타깝고, 내 자식이 똥을 쌌는데 아주 된 덩어리의 똥을 싸놓으면 고구마처럼 예뻐요? 안 예뻐요? 고구마처럼 예쁘잖아요. 그래서 내 자식의 똥은 냄새가 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난데. 나 안 낳아봐서 몰라.
그런데 조카가 와서 똥을 싸면 더러워요? 안 더러워요? 더러워요. 그러면 이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중생의 사랑이에요. 중생의 사랑. 그런데 부처님은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셨다 라는 거죠. 이것을 대자대비라 그래요. 불교는 뭘 배우는 거냐? 우리는 사랑을 배우러 가야 되요. 그런데 일반적인 사랑을 배우러 오는 것이 아닌 대자비를 배우러 가요. 편을 가르지 않는. 그냥 측은지심으로 상대를 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부터 나는 행복한 내가 될 수 있어요.
편을 가르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갈등이라는 게 없어요. 너는 너대로 좋고, 자식은 자식대로 좋고, 조카는 조카대로 좋고, 이웃은 이웃대로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있는 마음으로 가려고 하다보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수행이이라는 장르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을 우리가.
그리고 우리는 앞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처럼 일체의 모든 중생의 고통을 다 해결하는 그 순간까지 난 결코 불도를 이루지 않으리라. 이게 어떤 마음이에요? 부모님 마음이잖아요. 내가 시궁창에를 들어가도 내 자식 잘 되는 것을 보면 나는 결코 어떤 어려움도 어떤 괴로움도 다 감수하겠다라고 하는 어머니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는 부처님마음.
이 세상에 모든 중생중생이 다 지옥으로 부터 나오지 않는 순간에는 나는 결코 정토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는 지장보살 같은 마음. 이 부분을 일컬어 우리는 대자비, 내지는 사랑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대상적 부분의 사랑을 누리려고 하는 부분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관세음보살이 되어주고, 우리 스스로가 지장보살이 되어주고, 우리 스스로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그야말로 사랑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랑을 배우는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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