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1_2. 스님들의 성격으로 인한 삶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Buddhastudy 2017. 10. 18. 20:44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중심으로, 부처님 되기 위해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전혀 다투지 않고 정말 잘 살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들어와 보면 여기도 똑같아요. 어쨌든 스님들의 삶도 여러가지 부분의 사고와 성격을 가지신 분들이 함께 모여 삽니다.

 

그러다보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성격차이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무척 많았습니다. 요즘 밖에서 흔히 보면 부부들이 상담을 하러오는 경우의 다수는 성격차이에 의해서 뭔가 같이 못살겠다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이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세상이라면 구태여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고해중생의 삶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만약에 다투지 않고 모두가 성격이 잘 맞아서 화합으로만 일관해서 삶을 영위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아마 극락정토라고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고해중생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중의 하나는 세상의 모든 부분이 내 입에 맞는 떡은 없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이야기 할 때, 중생의 삶과 소위 깨달은 부처세계의 차이를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중생의 삶은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드는 세계가 중생의 세계고,

 

정토의 세계라는 자체는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의 세계인데,

내 맘에 드는 세계는 누군가가 만들어줘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바꿔가는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라고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 수많은 제자들은 시기와 질투가 난무했었어요. 틈만 나면 싸웠죠. 너무 많이 싸우다보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들에게 갈등이 없는 삶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대중 생활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흔히 보면 도라고 하는 것은

혼자 닦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불어, 함께 닦는 것이 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강가에 조약돌이

혼자 둥그러지지 않습니다.

서로 몸을 부딪쳐야만 둥그러질 수 있듯이

파도라고 하는 에너지에 의해서

몸을 부딪쳤을 때 둥그러질 수 있듯이

 

우리가 1250비구의 기본 단위를 이루고 수백 명 수천 명 스님들이 모여 사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바닷가의 조약돌이 서로 부딪혀 갉고 닦듯이 그 마음이라고 하는 부분의 결정체를 닦고 부딪치는 부분이 바로 승단의 모습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난존자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께 여쭈었죠. "부처님 이 세상의 모든 대중들이 우리가 모여 사는 이 대중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한다면 그것이 도의 반은 이룬 게 아니겠습니까? 하고 여준 적이 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그것은 도의 반이 아니고 도의 다를 완성한 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가정에서 살 때도 서로 참고 견디고 맞추려고 애를 써야 되는 건데, 상대가 맞추기를 원하지 내가 맞추기를 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인사 같은 경우에 출가한 스님들이 수백 명이 모여 살다 보니까, 부처님 진리가 싫어서 그만두고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미워서 가는 사람도 무척 많아요.

 

그런데 행주스님이나 나는 잘 참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면 지금 똑같은 승복을 샀고,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와서 같은 어떤 그런 공부를 하고, 같은 수행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행주스님하고 저하고도 겉모습만 봐도 성격이 같아요? 달라요? 다르잖아요. 저기는 엄청 착해요. 그런데 저는 엄청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모습들을 그 상대와 내가 다르다라고 하는 것을 비판하기 보다는 상대의 좋은 점을 자꾸 받아들이려고 애쓰다보면 내가 부드러워지는 부분이고, 그 날카로운 면을 자꾸 갈아내는 자체가 수행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특히 우리 삼운사 같은 경우를 보면 구구각각 모두 딴 신도들이, 모두 모여서 한 목표를 통해서 신행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느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빠른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빠른 사람은 느린 사람을 비판하게 되어있고, 느린 사람은 빠른 사람을 비판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부처님은 뭐라고 그러냐하면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고 그러시거든요.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분들을 잘 섞어서 할 수 있는 부분의 삶의 방법을 얻는 것 자체가 출가의 본질이요, 수행자의 본질이요, 불자 된 도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쪼록 열심히 여러분들이 마음을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애쓰는 하심의 마음을 통해서 멋진 불자로서의 도리를 다해갈 수 있는 그런 신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