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아무개가 아니다. 이해되나요?
의식은 아무개가 아니다.
그리고 의식은 인간으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아상이 아니다.
인상도 아니다.
의식은 중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한테는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그런 생각이
의식한테는 없다.
의식한테는 생각이 없으므로
모든 분별이 불가능하고
분별이 불가능하면 중생이니
그 반대말인 부처님이 하는 것도 없다.
의식은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걸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아상도 의식한테는 해당되지 않고
인상도, 인간이라는 것도 정의될 수가 없고
중생이라고 할 수도 없고
금강경에 그 유명한
보살한테는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다.
사상이 없다.
보살한테는 없다.
보살한테는 중생상이 없으니까, 중생이라고 하는 고정관념이 없으니까
밖에 중생이 있어요? 없어요?
자기한테 중생이라고 하는 관념이 없으면
밖에 모든 사람은 있는 그대로지
중생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그럼 중생이 뭐냐?
이거다 이거예요, 이 한개 의식이다 이거예요.
모든 의식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일 뿐이다.
그럼 부처가 뭐냐?
이거다 이거예요.
의식도 하나의 이름이니까
의식도 의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식일 뿐이다.
그러면 말이 끊어져 버리죠.
그렇지만 깨어는 있잖아요.
말은 끊어지는데 여전히 깨어는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깨끗하게 싹 들어와야 된다, 이거예요.
나중에는 의식이라는 말도 없다.
다 버리고 말끔하게.
저기 전라도 담양에 가면 소쇄원이 있어요, 소쇄원.
소쇄원 들어보셨나요?
한국의 정원으로 유명...
한국의 정원이 잘 없어요.
그나마 거기를 대표적인 정원으로 삼는데
소쇄하다 할 때
물을 뿌려서 깨끗하다 이 말이에요.
소쇄원할 때
깨끗하다는 뜻이에요. 소쇄가.
펄펄 먼지 나다가 물을 쫙 뿌려주면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깨끗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우리의 의식이
물을 뿌려서
모든 생각이, 생각 먼지가 싹 가라앉은
그때 그 순수 의식
순수 의식을 소쇄라고 해요.
그러니까 표현을, 소쇄원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게 붙어진 겁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이 있죠.
이것이 조금 전에 그 의식하고 지금 의식하고 변했을까요?
하여튼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이게 변하지 않는다.
근데 자꾸 까먹는다. ㅎㅎㅎ
안 까먹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다시 이거를 놓친다.
이제 놓치지 말자고
지금 계속 모여서
이거 확인하는 것이 공부예요.
지금 오조 스님이 문제를 출제할 때
결국은 “너의 의식을 한번 드러내 보라” 이 말이죠.
그렇지 않나요?
그러면 자기의식이 있는 사람은
*~
뭐 이렇게 해도 의식이죠. 그죠?
그런 시가 있어
아유일기, 나한테 한 기틀이 있으니
이때 기는 비행기 할 때 기, 기계 기자예요.
아유일기, 나에게 한 기계가 있으니
순목시이, 이것을 그대에게
손목, 눈을 윙크해서 보여줄게.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니
이거를 그들에게 윙크해서 보여줄게.
혹시 못 알아듣거들랑
내가 사미야 하고 불러봐줄게.
그러니까 윙크에서 알아들으면 좋은데
혹시 이게 너무 작은 동작이라서 못 알아들을까 봐
큰소리로 내가
“사미야” 하고 불러봐 줄게.
이 시가 있어요.
이 시가 깨달음을 증명한 시에요.
아주 유명한 시예요. 유명한 시예요.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니
내가 윙크해서 보여주겠다.
혹시 못 알아들을까 봐
내가 큰소리로 불러봐 드리겠다.
요게 깨달음의 시에요.
이게 다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공부가
깨달은 것은 이런 “이 뭐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이런 말을 듣고
지금도 이렇게 있는 거
이거를 한번 확인을 한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다, 사실은.
의식이 뭔지는 알았죠?
그런데 의식은 알았는데
공부는 뭐냐 하면
이 의식은 본래 있던 거예요.
본래 있던 건데 발견했는데
여전히 자기한테는 생각하는 힘은 강해요.
생각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거예요.
근데 분별하는 순간
이 전체가
의식은 전체인데
분별하는 순간, 이 전체는 싹 모습을 감춰버려요.
분별하는 순간.
그리고 현상계의 차원으로 떨어져요.
요 습관이 강하다 이거예요.
그리고 의식으로서 깨어 있는 그거는 약해, 미약해.
자기가 의식으로 깨어 있기는 미약하고
생각이 들어오고, 생각 따라가는 것은 강해요.
이거는 잠시만 앉아보면 금방 확인돼요.
3분만 앉아보면
그 3분 사이에도 엄청난 생각이 계속 와서
우리를 어디론가 생각은 끌고 간다.
주로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과거 아니면 미래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니까 ‘현재에 온전하게 깨어 있는 힘은 약하다.’
이 말 들어옵니까?
그러니까 지금 공부는
현재에 깨어 있는 이 약한 힘은
강하게 하고, 자꾸 익숙하게 하고,
이 낯선 현재에 깨어 있는 이것을 익숙하게 하고
그리고 이미 익어 있는
현재를 떠나서 생각이 빨려들어서 생각 따라 어디로 가버리는
그 익어 있는 것은
낯설게 하고
낯선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하고
이게 공부다.
이게 수행이다.
이거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습관과 싸우기 때문에.
현상계가 본질 입장에서는, 변하지 않는 본질 입장에서는
찰라생 찰라멸 하는 식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하는 식
찰라생 찰라멸하고 나타나는 것들은 식이다.
또 각이라고 해도
지금 보여지는 이 지각된 거
이 지각된 모든 것들은
본질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찰나 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식, 각
식각을 요즘 젊은이들 용어로 쓴다면
이미지예요.
특별한 거 아니죠?
인종도 상관없고, 남녀도 상관없고, 나이도 상관없고
하여튼 의식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의식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부처님” 해도
보세요.
“부처님” 해도
지금 의식 속에 부처님이라는 말이 나타난 거죠.
그러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왔다 가지만
왔다가 가는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이 의식 공간은
항상 이대로 있잖아요.
그러면 의식 공간이 먼저 있고
부처님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왔다가 가죠.
그럼 존재의 순서가
의식 공간이 먼저예요? 나타나는 부처님이 먼저예요?
의식 공간이 먼저죠.
아미타불 그러면
의식 공간에서 아미타불이 나타났죠, 지금.
그리고 지나가죠.
그럼 순서로 따지면
요 의식 공간이 먼저고
아미타불은 여기서 인연 따라 왔다가 가죠.
모든 현상은 왔다가 가요.
근데 모든 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 공간은
언제나 있다.
그 사람이 생명이다. 이게
의식=생명
이 말도 이해되나요?
의식= 명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존재.
존재를 요즘은 현존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그러면 여러분 현존이
누구한테나 거저 주어져 있나요?
아니면 노력해야 되나요?
중요해요.
의식이 노력해야 되나요? 그저 주어져 있나요?
그저 주어져 있죠.
그래서 무위자연이에요.
무위자연.
의식, 존재, 생명
그저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거를 깨닫는 거지
이거를 다시 또 이걸 뭘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옥상, 옥을 만들면 안 된다.
관객이 자기가 누구인지 깨달으려면
영화를 보는
영화는 지금 현상이에요.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미지의 세계.
저도 공부할 때, 여러분도 그럴 거예요.
“아니 이렇게 촉각이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근데 이것이 이미지라고요?” 하고 저도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여러분 그럴 거예요.
지금 나타나는 멀리 보이는 것들은
이미지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되시겠지만
촉각, 이런 거는 굉장히 이게 리얼하거든.
그래서 “이게 이미지라고요?”
한데 세월이 가면 이 촉각도 각인 거예요.
그냥 각.
각은 뭐예요?
느낌이란 말이에요.
각은 느낌이라는 뜻이잖아요.
촉각은 느낌이거든.
느낌도 사실은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미지 같은 것들이에요.
이 느낌도.
그러니까 참, 모든 것이
모든 알아지는 거, 느껴지는 것이
알아지는 식, 느껴지는 각
이거 전부 다 찰라생 찰라멸하는 마치 이미지 같아서
영화라고 표현한다.
영화라는 말의 한자 말은 환이에요.
영화라는 말에
지금 제가 영화라고 썼는데
우리 알기 쉽게
옛날 사람은 환이라는 말로 영화를 표현했어요.
지환즉리(知幻卽離)
유명한 문구에요.
불경에 지환, 환인 줄 알면
찰나 생멸하는 식, 각이라고 하는 것이 환이라서
지환, 이 현상이
환, 영화 같은 줄 알면
즉리, 리, 여기에 대한 집착이 이별한다.
이별, 여기에 대한 집착이 이별로 변한다.
이게 환인 줄 알면 이별하게 된다.
환과 이별하면, 현상과 이별하면
즉각, 꿈에서 깬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현상이 하나의 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꿈을 깨는 방식은 이렇게 된다 이거예요.
이것이 환인 줄 알면.
이것이 환인 줄 알려면
나의 의식이 분명하게 자각이 돼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 아이덴티티가
몸에서 의식으로 넘어가면
이게 환인 줄 알아요.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몰라요.
그리고 생생하잖아요.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모른다.
근데 꿈을 벗어난, 꿈을 보고 있는 의식이 되면
의식한테는 이 현상계가 꿈과 같다.
지환, 현상계가 환인 줄 알면
즉리, 이별할 때 리
지환즉리
이별한다.
이환, 환상하고 현상과 이별하는 즉시
각, 깬다. 꿈에서 깬다.
이게 지금 꿈이다, 이거예요.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생각=에고예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에고는 존재한다.
에고는 생각이에요.
그러면 이 현상계의 생각도 포함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생각은 교묘하게
이 몸을 자기라고 동일시하고 살고 있어요,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서 몸이 리얼함으로
생각하는 에고도 리얼해요.
이해되나요?
그래서 이것이 환이라고 하는 것을 에고는
극구 거부해요.
현상계가 환이면
에고는 자동적으로 환이 되잖아요.
환이 된다, 이 말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에고로서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 방에 형광등 하나 켠 것보다
여러 개를 켜면 훨씬 더 밝아요.
이해되죠?
의식이 하나만 끼어 있는 것보다는
여러 의식이 같이 끼어 있으면
훨씬 더 밝아져요. 더 힘이 강해져요.
그래서 우리 수업은 목적이
같이 깨어 있는 게 목적이에요.
제가 돌아보면
제가 30대, 40대, 주로 40대
그때 제가 어느 선생님 이런 강의에 출석해서
고전 텍스트를 놓고 강의를 하면서
주제는 본질이 주제였어요.
왜냐하면 모든 고전은 본질을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그 선생님 강의에 출석해서
본질을 소통하는 그 시간이
제가 일생에서 돌아보니까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제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때는 왜 행복했는지 몰랐어, 그 시간이.
근데 지금 돌아보니까
선생님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 본질을 말하는 선생님이 깨어서 얘기하기 때문에
나도 저절로 한눈팔 새가 없었어요.
그러면 두 시간 강의하시면
오롯이 깨워서 그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무엇이 좋았는가는 모르겠는데 그때는
지금 돌아보니까
의식으로서 이심전심
이심할 때 심이 의식이잖아요.
의식에서 의식으로 깨어 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어요.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43] 현상도 없고, 본질도 없다 | 의식 하나가 움직일 뿐 (0) | 2024.10.03 |
---|---|
[육조단경42] 깨달음이라는 병(feat.오안五眼) | 자기를 돌아보라 (0) | 2024.10.02 |
[육조단경40]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 이심전심(以心傳心) (0) | 2024.09.25 |
[육조단경39]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 할 일이 없다 (0) | 2024.09.19 |
[육조단경38]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되라 | 흐름을 타고 산다 (0) | 2024.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