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사담 3화 -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 일본군 '위안부'

Buddhastudy 2019. 5. 1. 22:16


역사속의 정책 또는 정책의 역사를 함께 보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입니다.

지난 1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진실을 용기있게 밝히시고 그 이후 여성인권과 평화운동을 쉬지 않고 벌이셨던 김복동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비판하시고 그것을 무효화하는 운동을 벌이셨는데요,

오늘은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밝힌 진실에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보고 우리에게 남긴 숙제가 무엇인지, 그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의 진상을 알리고 반전 평화운동을 함께 벌이셨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30

수요집회·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위한 뜨거운 노력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이제 조금 현실로 느끼는 중이고요,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였기 때문에 막상 떠나보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사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요.

어제, 그저께, 또 그 전날, 계속 매일매일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계속되는 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분간이 안 되는 그런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긴 세월을 모녀처럼 같이 보내신 거 아닙니까?

여러 가지 숙제가 있겠지만,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싶어요.

 

<미래 세대를 향한 메시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지금 세간에는 보통 위안부박물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식명칭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죠.

독립운동관련이든 아니면 일본군에 대한 피해자 단체 관련이든, 이런 박물관 또는 기념관들이 모여있는 곳과는 달리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서울 마포구 성산동 주택가 한구석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름을 짓게 된 경우, 또 거기에 자리를 잡게 된 경위부터 말씀주시겠습니까?

 

사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갖고 있는 인식이라고 할까요? 가치라고 할까요? 굉장한 다양한 게 녹여져 있다고 생각을 해요.

 

물론 그게 조선의 여성들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우리나라가 당시 일제식민지의 치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서, 그게 식민지 역사를 청산해내고 일본으로부터 책임을 촉구해내는 그런 흐름 속에 놓여 있기도 하고요,

 

이게 민족문제적 관점이기도 하죠.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접근하고 싶었던 것은

왜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문제가 침묵되어 있었을까,

바로 그것은 여성문제였다는 지점이 존재한다고 시작을 해서 운동도 시작되었던 거고, 박물관에 건립할 때도 여성이란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고요,

 

그럼 과연 어떤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인가, 미래 세대들에게 피해자들과 우리들이 함께 싸워왔던 역사의 유산인데, 이 유산을 미래 세대들은 어떤 인식으로 받아들일까.

그것을 두 가지 지점에서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여성 인권이라는 초점

다른 하나는 바로 평화라는 초점

 

지금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그 전쟁에서 여성들은 마치 전쟁의 무기처럼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 이런 현실을 우리가 연결 지어 미래 세대에게는 어떤 평화로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노력을 이 박물관에 담아보자 해서 그것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접근성이 있어야 하니까, 박물관이라는 거는 그러니까 딱 위안부 문제만 동떨어져서 배우기보다 주변에 그런 것을 함께 배울 수 있는 박물관이나 유적지나 이런 게 있으면 접근성을 가지고 아이들이 네트워크로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결국 서울시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서대문독립공원에 서대문독립기념관이 훼손되지 않게끔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어떻게 설립할 수 있을까.

그게 주차장 입구에 작은 공간, 매점이 있던 자리, 이 자리가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다들 여기에 위안부 박물관이 세워지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세워지면, 오히려 서대문형무소도 상승효과를 받을 수 있겠고, 여성 인권이라는 가치가 또 하나 세워지는 것이니까, 의미가 있겠다는 판단들이 들었습니다. 문화재청의 생각도 마찬가지...

그때부터 시작이 된 거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공개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박물관 개관을 알리지를 않았어요. 저희가 어떻든 해결하고 싶어서.

그런데 이분들이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개화를 시킨 거예요.

 

광복회와 순국선열유족회가 그때 그 기자회견에서 반대한 입장은 우선

첫 번째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두 번째는 거기 서대문독립공원에 위안부 관련 박물관이 세워지면 우리 민족에 대한 웃음거리를 세계에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관련 박물관이 세워지면 아이들에게 피해사를 강조하게 되어서 결국은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자학적인. 그거였어요.

 

지금 이 경과만 보더라도 사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굉장히 다층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일본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광복회나 순국선열유족회에서조차도 다른 각도에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우리가 겪어 왔었고요,

 

쉽지 않은 문제다. 김복동 할머니가 남기고 간 숙제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시청자분들도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서대문독립공원을 벗어나 성산동으로 온 거죠.

 

<피해자들의 외침: “우리는 정신대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였다>

애초에 이 단체가 시작할 때 여러 층의 오해들이 걸려있어서 그걸 풀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처음에는 정신대 대책협의회로 시작을 하셨죠.

 

굉장히 용어 하나에도 긴 역사가 있어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운동 역사와 거의 맞먹는데요,

처음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 때는 그 동시대를 살았던 피해자들도 그렇고, 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었던 여성들도 엄밀하게 위안부라는 용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 만들고, 또 연구소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건 별도로 정신대연구소라고 만든 거예요.

 

그런데 운동을 출발할 때만 해도 잘 몰랐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데 운동을 출발하다 보니까 문서가 발견되고 그 문서에서 위안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결합하게 되고, 역사학자들이 결합하면서 엄밀하게 역사적으로 전개가 달랐다는 것이,

그러니까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명확하게 다른 범주였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저희가 주목했던 것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주목했어요.

피해자들 대부분이 우리 김복동 할머니도 위안부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죠.

군복 만드는 공장에 일손이 부족해서 우리 집은 아들이 없으니까 딸도 보내야 한다고 해서 끌려갔다.

또 황금주 할머니라는 분도 처녀공출이라는 표현을 늘 하셨고 학교에서 단체로 선생님의 인솔하에 가셨다가 일본에서 비행기 부속품 만드는 공장에서 그다음에 위안부로 넘겨진 그런 피해사례도 생기기도 하고,

 

시청자 여러분의 혼동을 피하고자 윤미향 대표님이 다 말씀해주셨습니다만

첨언하자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서 첫째로 주목한 것이 식민지 남성이었고요

징용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징병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강제 징벌한다는 뜻이었어요.

여성까지 강제로 끌고 갈 수 없으니까 주체의 자발적 의지를 강조하는 이상한 이름을 지었어요.

 

그게 근로대, 정신대라고 하는 이름이었죠.

자기의 몸을 던져서 나라를 위해 일한다.

 

말은 자발성, 여자정신근로령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말은 자발성인데, 실제로는 강제로 끌고 가면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정도의 자발성을 요구하진 않겠다는 그런 식의 이름을 붙였던 거예요.

 

그래서 근로정신대는 본래 남성의 징용에 해당하는 역할을 부여했던 것인데, 실제로는 근로정신대로 일본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이런 곳에 노동자로 간다, 이렇게 모집을 해놓고, 중간에 군 위안소로 빼돌리거나, 일단 공장에 갔다가 거기에서 2차로 빼돌리거나

이런 사례들이 피해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또는 일본군성노예가 혼동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중간에 짚고 넘어가고요,

 

“9310월에 일본에서 두 번째 아시아연대회의가 개최되었고, 그때 또 용어 문제가 제기돼요. 맞지 않다, 이거는.

그래서 그때 우리가 했던 것은 역사의 어떤 사실을 군 문서에도 사용되었던 위안부라는 말은 사용하자, 범죄 주체의 종군이라는 말은 빼고요, 왜냐면 종군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또 군민의 측면에서 보니까 다를 (), 군대 (),

 

그러니까 군을 따라왔다고 해서 종군이라고 붙여서 종군위안부라고 붙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종군은 빼고 일본군이라는 범죄 주체를 붙여서 일본군 작은따옴표, 역사적인 소위 그렇게 불렀던 여성들이라고 해서 위안부라고 사용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영어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죠.

그런데 영어로는 역시 위안부라는 말을 하면 comfort woman이고 이것을 그대로 쓰면 이게 주로 comfort woman 즉 성매매 여성들과 관련된 용어들이 쭉 올라왔기 때문에, comfort woman라는 말보다는 위안부가 성노예였기 때문에 성노예라는 용어를 쓰자고 해서 Military Sexual Skavery By Japan이렇게 쓰기로 하고, UN에 제출한 문서에도 그렇게 성노예라는 용어를 쓰게 돼요.

 

그럼 우리 단체 명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 단체명칭을 새로 토론을 시작하면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하고 또 20151228일 이후에 만들어졌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있었습니다.

 

그 두 조직을 만들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로 만든 거거든요.

일종의 정의기억연대 속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재단이 녹여져 있어요. 두 활동이.

 

정신대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남게 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도 역시 상징으로, 우리 28년 운동의 역사로 남기자.

대신에 우리가 앞으로 사용할 말은 일본군성노예제라고 하자라고 하고 있죠.

 

<일본군 위안부국익이 아니고 범죄다>

계속해서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 내부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또 절교를 외면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 어떻게 해결 하실 계획이십니까?

 

거의 30여 년 동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지금은 정의기억재단이지만 활동하는 대상이 일본 정부에게 가해책임을 묻는 데만 있지 않았어요.

물론 성폭력 범죄에 있어서 명확한 책임은 가해자가 그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 또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재발 방지 조치를 교육이라든가 추모사업, 또 그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행위를 통해서 계속해나가는 것, 그걸 통해서 피해자의 인권은 회복되는 것이고.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것은 지금 그 당시에 일어나서 그 당시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은폐되어왔고, 침묵 되어 왔잖아요.

이 은폐되고 침묵되는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이 2, 3차 가해를 만들어내느냐면 일본 정부의 그런 범죄 부정 법적 책임 회피에 그런 언행들도 2, 3차 가해가 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피해자들의 그 고통을 한으로 응축시키게 했던 것은, 침묵한 것도 사실 23차 가해죠.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했던 것.

 

그리고 침묵을 강요합니다, 피해자들에게.

너희들이 부끄러운 짓 했으니까 너희들이 입 닫아.’

부모들조차도 내가 무덤가에 갈 때까지

네가 어디 갔다 왔는지 나에게 이야기하지 마라.’

 

해방 후 40여 년 가까이 되어서야 표면화된 거죠.

사실은 그런 분위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 발언들이 많이 나왔었잖아요.

대표적으로 한일위안부 합의는 잘한 일이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 이면에는 피해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되 국익을 위해서 참으라는 이야기가 한편으로 있었어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들이 같은 맥락에 놓여있어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국익에 위험을 주는 목소리로 치부를 해서 오히려...

 

일본군의 이른바 성노예 동원이라는 만행 자체가 국익 우선주의의 산물이었잖아요.

그렇습니다.”

국익을 위해서 개개인의 인권은 침해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인데

 

그렇죠. 대표적인 게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였죠.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

20151228, 당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상, 타결한 사건

피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진행돼 문제가 남았다.)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고.

 

이른바 위안부 합의에서 집어넣었던 것이 비가역적 합의라고 하는 것을 합의했잖아요.

이건 도대체 피해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어떻게 비가역적 합의, 최종적인 합의를 이룰 수가 있는가, 그런 절차에 대해서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고, 일본은 여전히 그 합의가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지금 그 합의로부터는 전혀 나갈 생각이 없다고 하고 있죠.

 

오히려 일본에서 바라는 것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많을 때는 240여 명까지 되셨다가 이제 생존자가 23분이시잖아요. 몇 년 내에 증인들이, 산증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일본이 과연 이 합의를 잘못된 합의라고 인정할 수 있을지 참 답답한 현실이거든요.

 

이럴수록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합리적이고 또 피해당사자들에게 목소리를 기울이는 그런 태도가 우리 사회 내부에 확산되어야 할 텐데요,

 

<오늘도 피해자들의 절규는 이어진다>

이번 김복동 여사 빈소에는 역대대통령 중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조문하셨잖아요.

그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문재인 대통령께서 김복동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오셨어요.

2018, 작년이죠.

전혀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방문하셔서 김복동 할머니께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하셨고, 그리고 정부가 앞으로 10억 엔(100억 원)도 정부 예산에서 마련해서 예비비에서 마련해서 일본정부에게 돌려주도록 하겠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약속하셨어요.

 

이름도... ... 도대체 누가 누구와 화해를 한다는 이름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끔찍한, 이름 자체도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인권 유린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죠.

어쩌면 김복동 할머니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상을 가끔 해봅니다.

2015 ·일위안부합의를 그렇게 무효화시키고, 또 새롭게 위안부 문제에 정의로운 해결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런 기초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저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명확하게 그렇게 강하게 국제사회에 내밀 수 있는 분들이 이제 정말 한, 두 명에 불과하거든요.

그런 상황이셨는데, 결국은 대통령께서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채 김복동 할머니께서 떠나셨죠.

 

아마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하셨던 것은 할머니가 눈 감으시기 전까지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지 못했다는 회한, 그것을 정부 대표로서, 대통령으로서 조문을 통해서 할머니께도 전하고 싶었을 것이고, 할머니와 함께했던 우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이 좀 들고요,

 

그런데 그것이 저는 대외적으로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피해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고

피해자들의 죽음에 함께하고 있다.

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보고요,

 

그것을 보도했던 세계 언론통신도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를 주의 깊게 다뤘다는 그 자체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우리 정부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고 보고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문재인 대통령께서 피해자들을 위한 행보 자체가 그런 아시아피해국들에 경고가 됐으면 좋겠고, 다른 한편 피해자들에게는 그들의 정부를 향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왜 우리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운동의 발화점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하셨는데요,

우리 국민에게 남긴 유언이랄까요? 들으셨습니까?

 

당일 우리는 두 분의 피해자를 잃었어요.

아침 7시경에 서울에 사시는 한 분의 할머니를 또 떠나보내야 했고, 저녁 1041분에 김복동 할머니를 보내야 했는데, 할머니는 아셨던 것 같습니다.

이미 당신 떠나실 시간을 아셨던 것 같은데, 당일 한 오후 5시경에 계속 무의식 상태에 계시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시더니 의식을 차리시고 말씀을 토해내기 시작했어요.

 

온 사력을 다해서 일본 정부를 향해서

나쁜 것들!’

 

나쁜 것들이라고 거의 절규에 가까운 욕을 하시고, 저는 이게 피를 토하는 것이구나.

실제로 새카만 피를 토해내셨어요.

 

나쁜 것들을 나쁜 것들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나쁜 것들에 대해서 나쁜 행동을 수정하고, 교정하고 바로잡을 수가 있을 테니까요.

굉장히 강렬한 메시지네요.

강렬한 메시지를 남겨주셨고, 나쁜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한, 그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남겨주셨고,

끝으로 수요집회, 이미 매주 기네스북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정의기억연대가 수요시위를 시작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고 했어요.

500차를 지냈고 1000차를 지날 때 우리가 이미 이겼다.

1000차 시위를 했다는 건 이미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겼다는 것이고

일본 정부는 아무리 지금 부정하고 회피고 있지만, 일본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 1300차는 갖지 맙시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미 1300차를 했구요, 김학순 할머니께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서 증언했던 8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키고 있는데, 그날이 1400차에요.

그때 1400차를 하게 되겠죠?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갖는 정말 큰 의미가 이른바 군국주의 역사의 피해자, 희생자였던 분들이 반전, 평화, 여성인권운동에서 그 역사의 주역으로서 새 역사를 쓰고 계시는 거잖아요.

 

늘 우리가 일본 정부에게 이야기를 하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과연 우리 사회는 얼마나 과거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역사 속에서 정의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가.

 

인권과 평화, 정의의 가치는 경제적인 수치로 거래되어선 안 된다는 그런 인식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게 김복동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윤미향 대표님뿐 아니라 수요집회를 이끌고 있는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넓은 곳에 씨를 뿌려두셨으니까, 김복동 할머니가 남긴 역사에 남긴 자취 아주 무거울 것이고요, 우리 후손들에게는 다시는 그런 일을 안 겪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는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큰 물고를 터주시고, 돌아가셨고 생각이 되네요.

,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전우용의 사담,

오늘은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다.

그에겐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

 

일본군이 유독 전시 종군 위안소라고 하는 반인륜적인 제도를 운용한 것을 일본인들의 형질 인류학적 특성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그들의 역사가 만들어 낸 범죄입니다.

그 역사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그 역사로 인한 피해자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가 있을 때만이 일본의 역사도 또 일본인들의 역사도 인류공영을 위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