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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 나눔과 행복이란?

Buddhastudy 2020. 12. 14. 19:38

 

 

 

시원합니다.

멋있습니다.

 

봉원사는 전통사찰인데요

이 법회는 야단법석입니다.

 

야단은 들에 단상 하나 놓고 그냥 있는 거 다 동원해서 하는 게 야단법석이거든요.

야단친다고 야단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단상 하나 놓고

법회자리를 마련하는 게 야단법석이거든요.

 

야단법석은 어디서나 하는 초현대적인 법석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회가 전통사찰 봉원사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멋있어요.

자비나눔, 강남지역 불자대법회

참 근사하고, 멋있습니다.

 

청중이 어느 구석에 들어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분 모두를 포함해서 보이지 않는 모든 분과 함께

자비나눔, 대법회를 함께 봉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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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문의 기본 언구는

불생불멸 일체유심. 두 구절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불생불멸입니다.

불생불멸이 뭐냐?

멀리서도 보이실라나요? 보이십니까?

이게 주먹인데요, 이게 주먹이 하나 생겼어요.

그런데 이걸 슬 풀면 주먹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 손바닥은 주먹이 생겼을 때나 없어졌을 때나 변함이 없어요.

불생불멸입니다. 이게.

 

또 일체유심은

마음의 본성은 불생불멸인데 마음의 작용이 전부 일어나요.

이게 일체가 오직 마음이다.

그래서 불생불멸은 심성이라고 그래요. 심성.

마음의 본성, 불생불멸이거든요.

 

그런데 심용은 마음의 작용은 전부 달라요.

중생심이 있고, 제불심이 있는데

이 부처님은 그 심성에서 좋은 마음을 전부 쓰시는 분입니다.

그걸 성불이라고 그럽니다.

좋은 마음만, 좋은 마음만 쓰시는 분이 부처님이세요.

 

그런데 우리 중생은 부처님하고 똑같은 이 심성을 가지고 있는데

좋은 마음을 별로 못 써요.

그래서 그걸 중생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중생심이죠.

 

중생심 참 재밌어요.

정말 재밌습니다.

어떻게 재미있는가?

가도가도 중생심 안에 있는데요,

새가 나르고 나르고 날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 있거든요.

그게 뭘까요?

허공입니다. 허공.

새는 아무리 날아도 허공 안에 있습니다.

 

물고기가 가도가도가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물입니다. .

 

새는 허공을 떠나지 못하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지 못합니다.

모든 중생은 마음을 떠나지 못해요.

좋은 마음, 좋지 않은 마음. 그런 작용만 있을 뿐이지

 

이리 가도 마음이고, 저리 가도 마음이고,

성공을 인식하는 것도 마음이고, 실패를 인식하는 것도 마음이고

자존감을 느끼는 것도 마음이고, 또 모멸감을 느끼는 것도 마음이고요

내내 한 마음이에요.

죽음을 인식하는 것도 마음이고 삶을 인식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일체유심이죠.

 

그런데 이 중생심이 참 묘해요.

어떻게 묘한가?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가 있는데요

그 노랫말이 참 재밌어요.

혹시 잊어버릴까 봐 여기 적어왔는데요, 그런 겁니다.

 

/해는 지고 저문 날에

옷갓을 하고 어디를 가오?/

 

옛날에 옷차람 히고 갓쓰고 하는 것을 옷갓이라고 그랬거든요.

할아버지 하는 소리거든요.

 

/작은집에 가시려거든, (할아버지가 작은집 잘 가거든요.)

이내 한 말 듣고 가소.

작은집은 꽃밭이요, 나의 집은 연못이라.

꽃과 나비는 봄 한 철인데, 물과 고기는 사시사철/

 

그러면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작은집을 가라는 소리인가요? 가지 말라는 소리인가요?

속으로는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서

가지 말라는 소리를 못해요. 요게 중생심이에요.

 

속으로 싫어하고, 겉으로 좋아하고, 또 겉으로 싫어하고 속으로 좋아하고

아주 복잡해요.

그게 중생심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사람의 마음이 그래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그다음 뭐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ㅎㅎ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 딱 부러진다.

 

이거 참 묘해요.

이런 것이 중생심이거든요.

 

그런데 이 중생심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가 고생해요.

모든 고통은 바라는 데서 옵니다.

바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쏴악~ 가셔졌을 때, 근심걱정 원망질투, 없습니다.

 

요즘에 나이 먹는 거 싫어해서 50만 되어도 바겐세일감이라고 그러는데 ㅎㅎ

나이 먹는 걸 왜 싫어합니까?

다 우리 젊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나이 먹는 것 좋습니다.

 

죽는 거 왜 싫어합니까?

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죽는 거 아~~주 좋아요.

그거 참 좋아요.

 

할아버지가 작은집에 가는 게 왜 나쁩니까?

작은집에 가지 말았으면하고 바라는 마음만 없으면 좋습니다.

 

작은집에 갈 때는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또 작은집에서 못살고 올 때는 어서 오십시오.’

가도 좋고, 와도 좋고 다 좋은 것인데, 늙어도 좋고 죽어도 좋고 다 좋은 것인데

 

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갔으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바라는 마음이 요게 중생심입니다.

이게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좋아하는 마음은 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흐릅니다, 이게.

이걸 욕심이라고 그러고 탐욕이라고 그러는데,,

이 욕심 탐욕은 잠잘 때도 흐르고, 말할 때도 흐르고 말 안할 때도 흐르고

물이 안 흐를 때가 없거든요.

이 마음 때문에 막 화가 나요.

바라는 대로 안 되니까.

 

그런데 이 화나는 것은 불과 같아요.

분노, 분노는 불과 같고

이 바라는 마음, 탐욕은 물과 같다.

항상 물과 불이 우리 마음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좋은 마음, 좋은 마음을 보리심이라 그럽니다. 깨달은 마음.

이 보리심은 자비, 원력, 지혜.

 

보리, 보리는요, 부처님 마음인데요,

부처님 마음은 자비심이에요.

그 자비가 한두 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중생계가 다 끝날 때까지 허공계가 다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걸 원력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자비와 원력을 항상 실행하면서도, 늘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심성 속에 계세요.

 

우리가 제일 고생하는 것은

불생불멸을 몰라서 고생하고

또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고생하고

바라는 마음이 안 이루어졌을 때 화가 나서 고생하고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알고

, 우리도 불심을 일으켜야 하겠다.” 이걸 발심수행이라고 그럽니다.

중생몸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자비심과 원력심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이라고 그럽니다. 발심.

 

그 자비와 원력을 실천하는 걸 수행이라고 그래요.

발심수행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 나눔 대법회, 자비심을 일으키면 그게 바로 발심수행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심은요, 그냥 일으키면 그게 바로 수행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자비는요

바라는 마음 없이 원력으로 되어야 해요.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욕심으로 하면 상처받아요.

 

자비는 원력으로 하는 거다.

원력은 뭐냐?

나도 불생불멸을 깨닫고, 나도 자유롭고, 나도 존엄하고, 나도 멋있게 대지혜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런 원력으로 하는 것이 이게 자비나눔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바라는 마음이 속에 있으면 그것이 안 채워질 때 굉장히 상처받아요.

보통 일 아니에요.

 

우리가 정원에 나무를 심어서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키우는 사람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나무 한테는 원망을 안해요.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야단납니다.

또 아내가 뭐 좀 잘못한다 싶으면 야단나요.

 

그럼 그게 왜 그러냐?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내가 뭘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게 아니고요

아내한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화내는 건 전부 자기 문제에요.

남편이 바람피워서 화내는 게 아니라,

내 남편은 절대로 바람피우면 안된다라는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화가 나는 거예요.

 

그 남편을 저 뜰에 있는 정원수 가꾸듯이

물주고, 밥주고, 옷주고, 그냥 예뻐해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면

바람을 피워도 귀엽고, 딴 살림을 차려도 귀엽고, 무슨 짓을 해도 귀여운 거예요.

화날 일 없죠.

 

그런데 그걸 모르고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내가 그런 말을 하지이러거든요.

저 딴 동네 딴 남자가 바람피워도 그러나요? 그거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을 모르는 거 하고

항상 자기를 위해서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거 하고

요것 때문에 고생을 하는데

 

법문 오래 하면 안 되거든요. ㅎㅎ

그래서 간단하게 마쳐야 하는데요,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는데

 

자비심을 턱~ 일으키면 이건 부처님 마음이에요.

바라는 마음 없이 나누는 거예요.

여기에 주인이 있고, 여기에 자유가 있고,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나누는 거, 완전 불심이고, 완전 부처님께서 깨달은 마음이에요.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 동참하신 모든 분들도 자비 나눔의 다 동참하셨다고 아까 회장스님께서 설명하시더라고요.

법문 시간에 이 말을 꼭 하라고.

그래서 지금 하는 겁니다. 혹시 잊어버릴까 봐.

이 바라는 마음없이 나눌 때, 그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한다.

죽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 아니에요.

살고 싶은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국회의원에 낙선했다고 괴로운 거 아니에요.

당선하고자 하는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여기 국회의원이 많이 안 오셔서, 딱 한 분이...

제가 찍었어. 저 분을.

그래서 내가 아는 분이..

 

당선 낙선 그게 괴로운게 아니에요.

꼭 당선을 좋아하고 낙선을 싫어하는 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 바라는 마음없이 나누는 자비나눔이 이루어지면

그게 뭐냐?

나눔은 뭘 받기 위해서 나누는 게 아니라

받으려고 하는 바라는 마음 없이 나누는 거다.

그래서 나눔은 욕심이 아니라 자비이다.

이게 결론입니다.

나눔은 욕심이 아니라 자비다.

 

또 나눔은 공덕이다.

금강경에 보면 바라는 마음 없이 보시하는 무주상 보시를 실천할 때

그 공덕이 허공계와 같다고 그랬어요.

이건 말로 헤아릴 수가 없고, 생각으로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눔은 공덕이다.

또 나눔은 행복이다.

 

그래서 오늘 법문 주제가 나눔과 행복이었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