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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_ 생사법과 열반법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Buddhastudy 2021. 7. 19. 19:24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_ 내가 부처님의 뜻을 아는 거와 같아서는

무유정법이 정한법이 있음이 없는 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무유라는 건 없다, 이 말이고요. 있음이 없다.

뭐가 없느냐?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 있음이 없다,

이게 옛날부터 새기는 법이에요.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깨달음이라는 것은

유법이냐 있는 법이냐? 이건 정해진 법이죠.

무법이냐 없는 법이냐? 이건 정해진 법이죠.

그러면 사는 법이냐? 이건 정해진 법이죠.

죽는 법이냐? 정해진 법이죠.

이런 게 아니다.

그러면 이거 다 떠나서 따로 있느냐? 이게 아니에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_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것이 없다.

또 정해진 법이 여래가 설법했다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하이고_ 왜냐하면

여래소설법은 취할 수가 없다. 가질 수가 없어요. 또 설명할 수가 없어요.

법이냐? 법도 아니에요. 법이라고 하는 거 있는 거.

비법_ 없느냐?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일체현성이, 일체현성이라는 것은 금강에서 볼 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런 분들을 다 현성이라고 그래요. 사과라고 그러거든요.

또 성은 부처님이고, 현은 이런 분들인데, 이런 분들이 다

무위법으로서_ 무위법이라는 게 용어는 노자도덕경에서 나온 말인데요, 불교용어가 아닙니다.

노자도덕경은 무위자연, 인간의 조작을 하지 않는 걸 무위라고 그러거든요. 무위자연.

그런데 이걸 불교를 번역하면서 열반을 무위라는 말로 쓰기시작했어요, 열반을.

생멸, 상사를 유위라는 말로 쓰기 시작했어요.

유위는 생사이고, 무위는 열반이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 일체 아라한이나 부처님이 다 무위법으로서 차별이 있다.

열반법으로서 그 열반법에 깊이 들어가면 부처님이고,

열반법에 조금 들어가면 수다원이되고

수다원보다 더 깊으면 사다함이 되고

사다함보다 더 깊으면 아나함이 되고

아나함보다 더 같으면 아라한이 됩니다.

이 소리에요,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리고 현장역에서는요,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말을

무유소법 이렇게 했어요.

소법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것이 없다.

적을 소, 작을 소 말고 적을 소, 적은 법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깨달았다라고 하니까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밖에서 얻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밖에서 얻는 것은 건강을 얻든지, 건강해지면 밖에서 얻는 거죠.

다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든지, 무슨 재물을 얻든지, 그것 뿐이에요.

사람 아니면 물질, 물질 아니면 사람. 그것 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전부가 사람을 얻어도 언제 떠날지 모르고, 물질을 얻어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 이것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이걸 생사법이라고 그럽니다.

얻으면 없어지고 얻으면 없어지고

만나면 헤어지고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죽고 태어나면 죽고,

이게 생사법인데 중생은 끊임없이 이 짓만 하려고 그래요.

그거 외에는 할 줄도 모르고, 안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거기서 열반법을 이루신 거예요.

열반이라는 건 여기서 말하는 생사 없는 법, 중생들은 생사법만 알았는데, 부처님이 생사 없는 법을 얻으셨어요.

그걸 무위법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이 생사법이라고 하는 것은 유위법인데,

유위법을 금강경 저 끄트머리에서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다.

몽환포영과 같다 이랬거든요. 유위법이라는 것은.

_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여로역여전_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응작여시관_ 응당 이와 같이 봐라, 이랬거든요.

 

유위법이 생사법이예요. 나고 죽는 법이에요.

나고 죽는 법이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건데

중생은 항상 그것만 구해요.

그래서 구하다가 또 고통받고, 구하다가 또 고통받고.

그래서 내가 구해서 얻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지 몰라요.

 

그런데 부처님은 거기서 생사 없는 법을 깨달으신 거예요.

그러면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밖에서 얻은 게 아니다.

내 마음이 바뀐 거다, 이거죠.

마음이 바뀐 거다.

 

그래서 이걸 어리석음이 바뀌어서 지혜가 되었다. 이래요.

어리석음이 되어서 지혜가 되었다.

어리석음이 지혜가 된 것이지, 무엇을 어디서 뭘 얻어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기 어리석음 바꾸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자꾸 뭘 얻어오려고 하는 게 우리 중생입니다.

얻어온 건 반드시 없어진다.

 

그런데 어리석음이 지혜가 되면 안 없어져요.

지혜는 누가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얻어온 건 다 가져갈 수가 있어요.

지혜는 못 가져갑니다.

 

그래서 지혜를 닦는 게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최상의 보물을 내가 얻는 거예요.

다른 거 아무리 좋은 것도요, 그건 없어지고 누가 가져가 버리니까 소용없어요.

 

이 몸이 국가에 충성한다고 열심히 해서 충성하다 이 몸 죽으면

반은 아버지가 가져가고 반은 어머니가 가져가고

본래 주인이니까 가져가는 게 당연한 거죠.

그렇잖아요. 법을 잘 만들어놓은 거 같아. 아주.

 

어떻게 부처님 법하고 맞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뭐, 이 몸을 어디에 어떤 단체나 어디 가서 열심히 하다가 이 몸을 단체를 위해서 죽으면

이 몸 주인이 부모니까 반반씩 아버지 어머니가 가져가는 거죠. 가져가는 거예요.

 

몸도 가져가는데, 물질은 물질대로 누가 가져가고

사람은 사람대로 떠나버리고

없어요.

그런데 지혜는 못 가져가요.

가져갈 수 없는 것을 무위법이라고 그럽니다.

무위법_ 생멸하는 변화가 없는 법이다. 이 말이거든요.

생멸하는 변화가 있는 법은 유위법이고요.

 

그런데 무위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간단하게 한 서너 가지만 말하면

생멸 변화가 없는 첫 번째를 허공이라고 그래요. 허공무위.

허공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생멸하는 작용이 없거든요.

허공은 무위다 이래요.

허공은 누가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어요.

아무리 폭탄을 떨어뜨려도 허공은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뭐를 잘 만들어내는 사람도 허공은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래서 허공은 무조작상이다, 조작상이 없다. 허공무위고요.

 

그다음에 열반 무위에요.

열반을 한번 증득하면 열반은 생멸이 없습니다. 열반무위.

 

그다음엔 진여무위에요.

진여라는 게 있는데, 아무리 아무리 없어져도 그 가운데, 없어지지 않는 그 본성, 아주 본질, 그것이 있어요.

생겨도 생기지 않는 본성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비유로 설명할 때,

진여는 물과 같고, 생멸은 파도와 같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물과 파도.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하는 것은 생멸, 생사법이고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해도 그 가운데 생멸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게 진여인데

그건 물과 같다.

파도가 아무리 오르락내리락해도 물은 그대로죠.

그래서 이걸 진여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진여가 생멸을 완전히 떠나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파도가 물을 떠나있느냐? 그건 아니에요.

파도는 물을 떠나지 않죠.

다만 바람과 함께 있을 뿐이에요, 바람.

 

그래서 물이 바람을 만나면 파도가 되는 거지

바람을 반나서 파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물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죠.

그래서 그걸 진여라고 그럽니다.

_ 무망이라, 허망한 것이 없다. 허망한 것이 없어요.

_ 불변이라, 변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진여라고 그래요.

 

이 진여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왜 어렵느냐?

물과 파도가 완전히 하나냐? 하나는 아니거든요.

완전히 다르냐? 다른 건 아니거든요.

이걸 비일비이라고 그래요.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다르면 다르고 하나면 하나지

어째서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그러느냐?

얻었으면 얻은 거고, 못 얻었으면 못 얻은 거지

얻은 바가 없다고 하느냐?

 

그런데 이런 게요, 본래 우리 근본이에요.

생각으로 있는 거다. 없는거다 하는 것은 우리가 머무는 생각이고요

머문다, 머물 때는 있다 없다 이게 머무는 거구요.

무주심이 되면 머묾이 없는 마음이 되면 그게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에요.

 

어느 분이 법문을 하는데

옛날 사람이 한 얘긴 다 빼고 오직 스님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이렇게 누가 질문했거든요.

만날 얘기하면 옛날 사람이 한 말만 하니까 화가 났던 가봐요.

옛날 말 다 빼고 오직 스님 얘기를 한마디 해주십시오이렇게 하니까

물건을 이런 거 하나 떡 내보이면서

이게 옛날 사람 물건이냐? 지금 사람 물건이냐?” 이렇게 물었어요.

이게 옛날 사람 물건인가요? 지금 사람 물건인가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꼼짝 못 했어요.

 

이게 옛날과 지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이게 무거무래역무주라는 게 바로 이런 것에요.

(여래를 화엄경에서는 무거무래역무주라고 하였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다.

(진여는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다.)

 

이게 우리 고향심이에요.

본래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 불성은

불성이죠, 부처님은 지혜인데, 지혜의 본성이 그게 불성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걸 법이라고 그러는데

법의 본성을 법성이라고 그래요.

법성을 불성이라고는 안 합니다.

법성을 불성이라고는 절대 안 해요.

경전에 다 설명하는 법이 불성이라 그러지 법성이라고 안 하거든요.

일체중생에게 법성이 있다, 이런 말 안해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이렇게 말해요.

 

불에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래가 가지고 있는 10가지 힘, 이것도 다 지혜의 힘이고,

18불공법, 18가지 특별히 다른 이것도 지혜의 힘이고, 자비의 힘이고, 신통의 힘이고

이런 여러 가지 그 지혜 신통 권력 자비의 힘을 가진 게 부처님인데

그 본성을 우리가 가졌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불성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불성.

 

그 불성이 있는데, 또 중생은 중생이다, 이 말이에요.

여래하고 중생하고 같으냐?

같은 게 아니거든요.

그럼 다르냐?

다른 게 아니란 말이에요. 불성은 다 있으니까.

그럼 다르면 다르고, 같으면 같지 왜 말이 그렇게 애매 모호하냐? ㅎㅎ

그게 바로 어리석은 중생심이에요.

 

왜냐?

확실한 걸 좋아하거든요.

그 확실하다는 게 그게 망상이에요.

확실하다 라는 그것은 상에 머무는 거다. 이 말이죠, 상에.

상만 확실하게 보이지, 무상에는 확실한 게 없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불확실하냐? 불확실한 것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지혜죠. 그게 지혜.

그래서 진여무위가 있는 거예요.

진여는 무위법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워서 이 더운 날,

집에서 쉬지도 않고, 아니면 시원한데 놀러도 가지 않고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법상에 올라와서 하는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알 것도 같지만 생판 모를 것도 같고.

이거 참 이상하단 말이에요.

이게 바로 부처님 법은 아무도 얻지 못한 걸, 처음으로 얻으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다 밖에서 얻으려고 그러는데

이 부처님 법이 어떤 건가?

이걸 생각하고 찾아와서 눈뜨고 쳐다보는 것만 해도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지금 저 법상에 올라앉아서 뭔 말 하는가? ㅎㅎ

이렇게 쳐다보는 것만 해도 이게 참 대단한 거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그게 나의 고향을 이야기하는 거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예요.

 

오늘 금강경 법문은 이제 이걸로 마치고

같이 두 번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수보리언 여야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수고하셨습니다.